내가 배웠던 세상은 모두 거짓이었다
일곱살이 반절쯤 지나자, 내게는 동생이 생겼다. 꼬물꼬물한 아기가 너무 예뻤지만
동생만 생기면 같이 놀 친구가 생길거라 믿었는데
버둥버둥 누워만 있을뿐 당췌 나랑 놀 수가 없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데 동생은 딱 그런 존재였다.
예쁘다고 뽀뽀를 해주는 내 머리채를 잡아쥐었고, 노래를 불러주면 빽빽 울어댔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나만 나무랐다.
엄마는 물론이거니와, 퇴근하면 늘 나와 놀아주던 아빠도 동생에게 온 맘을 뺏긴듯 했고,
심지어 깐깐한 할머니마저 동생에게는 솜사탕 같았다.
가을이 되고 나는 유치원에 가게 되었다.
아마도 갓 태어난 동생과 막 은퇴하신 할머니만으로도
엄마와 준구아줌마는 벅찼을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나는
놀아주지 못하는 동생 대신에 유치원 친구들이 생겨서 신나는 날들이었다.
명자언니와 보내던 오전시간은 이제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었고
집에 돌아와도 내 나름대로 할 일이 많았다.
지영이 언니도 왠지 전같지가 않아서 언니의 방문이 닫혀있는 날들이 허다했기에
가끔 가영이 언니를 보러 옆집에 갔다가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생길 때에나
명자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내가 학교에 입학하자 더더욱 나는 명자언니와 멀어졌다.
한가한 날에도 나는
더이상 옆집을 기웃대지 않는 날들이 늘어갔다.
놀이터에 나가면 아는 얼굴들이 있었고, 아무때나 놀러가도 좋을 친구들 집이 생겼다.
나를 늘 꼬맹이 취급하는 옆집 언니들보다 친구들이 훨씬 재미있고 신이 났다.
심지어 앞 동에 사는 성훈이네는 비디오도 있었다.
좀 치사하게 비위를 맞춰줘야 선심쓰듯 비디오를 보여줬지만
성훈이는 그닥 모질지 못해서 내가 "나 집에 갈래!" 하면 얼른 마징가제트를 틀어줬다.
하도 봐서 지겹다는 성훈이와 달리, 나는 하루에 열 번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명자언니는
마주칠 때마다 미리 준비해둔 듯, 따발총처럼 자기 얘기를 늘어놓곤 했다.
내용은 때마다 다양했으나 내가 머리가 커지기 시작하며
언니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남의 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언니 얘기를 듣다보면 왠지 모를 불쾌함이 느껴졌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명자언니는 지영이 언니네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집에 새로온 준구아줌마에 대해서도 못 생겼네 무뚝뚝하네, 하며 괜한 트집을 잡았다.
나도 준구아줌마에게 서운한 일이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명자언니가 준구아줌마를 흉보면 왠지 발끈한 마음이 들었다.
준구아줌마는 이쁘진 않았지만 못생기진 않았었다. 수다스럽진 않아도 무뚝뚝한 사람은 아니었다.
준구아줌마 뿐이랴. 내 친구들도 덮어놓고 싫어했다.
내 친구들을 본 적도 없으면서
이 친구의 집에 다녀오는 길이라 하면 그 친구는 별로라 했고
저 친구와 놀이터에서 놀다 오는 길이라 해도 표정이 샐쭉해졌다.
전에는 지영이 아줌마나 언니들을 흉 볼 때마다 열심히 끄덕여줬지만
사운드오브뮤직을 본 이후로 내 마음이 바뀐건지,
아니면 언니의 흉보기가 지겨워진건지,
내게 명자언니는 더 이상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매사 불평만 늘어놓는 심술궂은 캐릭터로 변해 있었다.
내가 읽은 모든 책들과, 내가 본 모든 영화에서의 약자는 무조건 선한 존재였다.
구박에도 너그럽고, 설움에도 밝았다.
캔디가 그랬고, 신데렐라가 그랬으며, 콩쥐, 왕눈이, 소공녀, 하이디,
내가 믿던 진리를 증명해줄만한 인물들은 차고도 넘쳤다.
명자언니가 특별히 좋은 사람이길 기대하진 않았으나,
일 삼아서 남의 트집을 잡는 사람이라는 건
명자언니를 캔디처럼 여겼던 어린 마음에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내 맘을 괴롭힌 부분은
그런 주인공 곁에는 꼭, 못 잡아먹어 안달난 못된 캐릭터가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명자언니가 싫은 마음이 들 때마다
혹시 내 마음이 비뚤어진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알고보니 나는 이라이자 같은 사람인걸까, 아니면 계모같은 어른이 되는걸까 겁이 났다.
명자언니를 만나고 나면 자꾸 맘이 불편해지니
나는 어떻게든 명자언니를 피하고 싶었다.
명자언니는 장 보고 오다가 놀이터에 있는 나를 발견하면 한참을 놓아주지를 않았고,
엄마 심부름으로 지영이 언니네 갔다가 마주치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나를 붙잡았다.
그 시절엔 아파트도 집집마다 대문을 열어두는 일이 허다해서,
지영이 언니네 앞을 지나가다가 명자언니가 날 발견하기라도 하면
부리나케 신발을 꿰어신고 뛰어나와 복도 끝에서 수다를 늘어놓곤 했다.
명자언니의 흉보기는 갈수록 싫증이 나서
시큰둥하게 대답하거나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멈추어 보려 했지만
명자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반응은 언니에게 관심 밖의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해 두해 지나며
불편함을 지나 차츰 무관심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내가 훌쩍 커서인지, 너무 멀어져서인지
나는 명자언니가 이제는 아주 남처럼 느껴졌던지라
언니의 이야기에 더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응응- 대충 대답하며 피하기에 바빴다.
그럼에도 명자언니는 틈만 나면 날 붙들었는데, 나는 그런 언니가 한 편으로는 대단하다 싶기도 했다.
아빠가 늘 내게 강조하는 끈기라는게 저런거구나, 비아냥거리는 마음까지 일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학원에서 돌아온 엄마가 전에 없이 지영이 아줌마네로 가서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내 기억이 닿는 한, 엄마는 한 번도 식사때를 놓친 적이 없었다.
저녁이 늦어지면 '쯧' 소리를 내는 할머니가 있는데도
지영이 아줌마네서 좀처럼 돌아올 생각이 없는걸 보면 무슨 일이 생긴게 분명했다.
엄마는 어디갔냐고 쫓아다니며 묻는 동생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할머니가 기어이
"굶겨 죽일 셈인건지 원, 쯧!" 하는 소리를 내었다. 안그래도 무슨 일인지 궁금하던 나는 핑계꺼리를 들고서 옆집으로 내달렸다.
"엄마, 할머니가 저녁 먹재요!!“ 하며 뛰어들어간 지영이 언니네는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한참 저녁때인데 어울리지 않는 정적이 흘렀다. 명자언니가 분주해야 할 부엌도 조용했다.
문닫힌 안방에서 엄마 소리가 들리는듯 해서 빼꼼이 문을 열어보니
장농이며 서랍장이며 문이란 문들은 다 열어젖혀진 채로
지영이 아줌마도 엄마도 이리저리 뒤지고 있었다.
지영이 아줌마는 화인지 푸념인지 모를 말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방문 닫고 가라는 엄마의 눈빛에 더는 못 서 있고 얼른 언니들 방으로 가 보았다.
가영이 언니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씩씩대고 있었다.
"명자 걔 도망갔어! 우리집 비싼 것들 죄다 들고 도망갔어! 내 꺼도 가져갔어! 걔 도둑놈이야!!"
명자언니 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명자언니가 그리 해놓고 간건지, 나중에 아줌마가 뒤져본 것인지는 모르나
자질구레한 것들이 방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활짝 열린 작은 장농 안에는 덩그러니 이불만 들어 있었다.
명자언니가 도둑놈이라니!
나에게 도둑은 살인범 다음으로 나쁜 사람이었다.
안그래도 얼마전 학교에서
친구들 물건을 자꾸 훔치던 아이가 잡혔었는데
아이들 눈총에 더는 못 견디고 전학을 간 터였다.
도둑질은 그리 무서운 일이었다.
메모지나 샤프 같은걸 훔쳐도 그리 심한 벌을 받아야했는데 그 비싼 것들을 훔쳐 달아났다니!
그런 사람은 TV에서나 보는건줄 알았다.
요즘 명자언니가 못마땅하긴 했어도 그리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한 적은 없었다.
며칠 전, 복도에서 명자언니를 만났을 때에도
그런 흉악한 낌새는 느끼지 못했다.
되려, 더 길게 나를 붙들고 있었고 더 밝게 떠들어댔었다.
끼어들면 안되는 수위의 사건이라 느꼈기에
나는 평소보다 귀를 쫑긋 세운 채, 어른들 눈치만 열심히 살폈다.
"고 기집애 눈빛이 평소에도 좋잖았어. 고거 잡아야 하는데 어떻게 한다든?"
할머니의 물음에 엄마는
"경찰에 신고할까 고민중이긴 한데, 정이 있으니 선뜻 안되나봐요."
라고 대답했다.
지영이 아줌마는 이리도 좋은 사람이었다.
집 안의 비싼 것들을 다 들고 도망갔다는데도
경찰에 신고를 주저하는 사람이었다.
명자언니는 그런 아줌마 말을 오지게도 안 듣고 뺀질대더니
종국엔 아줌마 물건을 죄다 훔쳐 도망간 도둑놈이었던 것이다.
내가 한 때 캔디라 믿었던 명자언니가
수사반장에나 나올법한 악당이었다니!
가난하고 서러운 사람들은 누구나 선하다고 믿었는데
내가 믿던 진리가 거짓이었다니!
할머니는 망할년, 몹쓸년, 혼잣말을 하시다가
"젊은 것들이 사람 들이는걸 우습게 봐. 너나 지영이네나 큰 코 다칠 줄 알았지."
하며 엄마에게 갑작스레 화살을 날렸다.
아마도 그냥아줌마 얘길 하는 것이리라.
"얌전히 지내면 시집도 보내주고 살림도 내어주려고 돈도 모아주고 있었다던데
미련해도 이렇게 미련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하며 엄마는
할머니의 질책을 애써 피해갔다.
"머리 검은 짐승을 그리 쉽게 믿어? 젊은 것들이 겁도 없어. 쯧!"
할머니의 '머리 검은 짐승'은 처음 듣는 표현이었기에 나는
유달리 까맸던 명자언니의 검은머리를 떠올렸다.
더이상 명자언니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구나 싶었다.
무서운 일이었다.
가서 공부나 하라고 자꾸 나를 밀어내는 엄마 때문에
나중에서야 가영이언니를 통해 알게 된 사정은 이러했다.
지영이 아줌마가 외출을 하고 돌아와보니
빈 집에 명자언니는 없고, 언니 짐도 다 챙겨 없었다 했다.
지영이 아줌마 패물들이 모두 사라진 후였다 했다.
패물 뿐 아니라, 언니들 물건들도 없어지고, 아저씨 시계도 사라졌으며
심지어 된장통과 참기름 짜놓은 것도 챙겨서
아저씨의 커다란 여행가방으로 두개나 가득 훔쳐 달아났다고 했다.
가영이 언니는 옷도 없어지고 가방도 없어지고,
특히나 얼마전에 생일선물로 받은 공주잠옷도 없어졌다고 했다.
아까워서 아직 입어보지도 않았는데 그것까지 가져갔다고 길길이 뛰는 언니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사운드오브뮤직을 보던 밤,
알록달록 잠옷을 입은 우리들 곁에
런닝셔츠인지 뭔지 모를 잠옷을 입고 있던 명자언니가 떠올랐다.
나는 왠지모르게 자꾸만 내 잘못을 따져보게 되었다.
명자언니가 말을 걸었을 때, 더 다정히 들어줬다면 안 도망가지 않았을까.
유독 밝게 말을 걸었던 명자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무뚝뚝했던 나의 반응이 후회스러웠다.
자기 말들을 대충 듣고 도망가기 바빴던 내 모습에
이 곳에 오만정이 떨어져 떠나버린건 아니었을까 싶어
미안한 마음이 자꾸 솟았다.
그 후로도 며칠동안 나는
엄마와 할머니 말대로 명자언니 인생이 망하면
그 이유에 내 지분도 꽤 될 것 같은 생각에
밤마다 명자언니 꿈을 꾸어야 했다.
꿈 속에서 명자언니는
수사반장에 나오는 범인들처럼 밧줄에 묶여 있기도 했고
아파트 담장에서 야채를 파는 꼬부랑 할머니 옆에 앉아 울고 있기도 했다.
명자언니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꿈속의 언니는 나랑 눈이 마주치면 무섭게 노려보거나
몸둘바 모르게 엉엉대며 울었다.
내 일상에서 저만치 밀려갔던 명자언니는
그렇게 갑작스레
그간의 복수를 하듯 훅 들어와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건 약과였다.
이보다 더 큰 죄책감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