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한번쯤, 동화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명자언니가 사라지고, 나는 집에 들어설 때마다 득달같이 준구아줌마에게 달려갔다.
"아줌마, 명자언니 왔대?"
준구아줌마는 내가 어떻게 아냐고 눈을 흘기거나
그 짓을 해놓고 어떻게 오겠냐고 퉁명스레 대답을 했지만,
나는 왠지 언니가 금세 올 것만 같았다.
늘 그랬듯 속없이 깔깔거리며, 지영이 아줌마한테 등짝을 여러대 맞아도 아랑곳 않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부엌에 들어가 행주를 삶고, 오뎅을 볶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며칠 지났을까, 부엌에서 명자언니 얘기가 나오는 듯 하길래
얼른 근처 소파로 달려가 귀를 쫑긋 열었다.
"세탁소 그 총각이요?" 준구아줌마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글쎄, 세탁소 사장이 바로 신고했대요. 걔가 잡히면 명자도 잡히겠지 뭐."
"아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게 거기가 어디라고 따라갔대요 따라가길."
"그러니까. 끽해야 고등학생이나 겨우 된 기집애가 어쩌자고 그랬는지...
그 세탁소 남자,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요?"
"어유, 나도 잘 몰라요. 뭐 옷이나 받고 돈이나 주지, 달리 말섞을 일이 있나.
숫기 없고 매가리 없고 그랬는데, 이런 일 생기고 나니 좀 이상했던 것도 같고..."
"여하튼 안 와도 걱정, 와도 걱정이야. 온다고 선뜻 받아줄 수 있겠어요. 겁이 나서..."
세탁소 아저씨였다.
너무 쪼그매서, 저러다 옷더미에 깔리는 거 아닌가 싶었던 그 아저씨였다.
세탁소 사장님과 달리
세탁 세탁, 하는 소리가 눈에 띄게 기운 없어서 안쓰럽기까지 하던 그 아저씨.
길지도 않은 복도를 아주 긴 터널처럼, 신발을 질질 끌며 걸었던 걸음걸이도 떠올랐다.
명자언니는 요즘 부쩍 그 아저씨 얘길 내게 했었다.
"나보고 귀엽게 생겼다 그러더라? 웃겨. 난 그 사람 별로더라."
"아니 자꾸 나보고 이상하게 웃어. 못 생긴 주제에. 기분 나빠 죽겠어."
"자꾸 말을 걸어. 난 싫거든? 난 쪼끄만 남자는 딱 질색이야."
명자언니는 그 아저씨 얘기를 하면서 늘 불쾌하다고 했다.
닥치는대로 이 사람 저 사람 흉을 보는 언니었기에
나는 이번엔 세탁소 아저씨가 맘에 안 드나보다, 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명자언니가 그 아저씨 흉을 볼 때면, 늘 깔깔대는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 흉을 볼 때와는 말투가 좀 달랐었다.
그래도 정말이지 나는
둘이 그렇게 엄청난 계획을 하고 있는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나는,
나도 모르게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도
공범일까.
난데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냥아줌마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지은 죄가 있는듯 하니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명자언니가 혹여라도 경찰에 잡혀서 "이정이는 알고 있었어요." 라고 말하면
나도 잡혀가는걸까.
알면서 봐준것 아닌데, 정말 눈치 못 챈 것 뿐인데,
명자언니가 나에게 '짜증나는 세탁소 남자와 도둑질을 해서 도망갈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아닌가. 했었나. 내가 대충 들어서 기억을 못하나. 그래도 나는 정말 몰랐다.
경찰 아저씨들은 내 말을 믿어줄까. 엄마와 지영이 아줌마는 나를 믿어줄까.
내 말을 믿어주더라도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혼이 나지는 않을까.
내가 미리 말만 해주었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거라고
모두가 나에게 호통을 치지 않을까.
뻑하면 그냥아줌마 욕을 그리 했으면서
명자언니는 왜 도둑질을 해가지고!
내가 그리 듣기싫은 내색을 했는데도
왜 나한테 쓸데없는 말들을 해가지고!
맘을 졸일대로 졸이다가 쭈뼛쭈뼛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명자언니 세탁소 아저씨랑 도망간거래?"
"넌 또 어디서 들었니!"
"엄마가 준구아줌마랑 얘기하는거 들었지."
"아유, 또 언제 들었대! 그랬다더라. 넌 어른들 일에 신경 꺼."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끽해봤자 고등학생이라는 명자언니 일이니, 어른들 일도 아니거니와
나는 이미 신경을 끌 수 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공범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후로 엄마는 내게 숨기는 걸 포기했는지,
지영이 아줌마와 별스럽지 않게 내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둘이 함께 도망간 걸 어찌 알게 되었는지는 못 들었으나,
세탁소 총각도 세탁소 돈을 홀랑 가지고 사라졌다고 했다.
세탁소 아저씨는 내게만 아저씨일뿐, 아주 어른은 아니었나본데
집이 없어서 세탁소 한 켠에서 숙식을 하던 이였다 했다.
세탁소 사장님은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아마 잡기 힘들지 않겠냐고 어른들은 생각했다.
지영이 아줌마는
"지영이 아빠 시계랑 잠바까지 훔쳐갔길래 내가 이상하다 했어! 남자꺼가 왜 필요해 지가!"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나이에 둘이서 뭘 하겠냐고, 직싸게 고생해봐야 정신을 차릴거라고도 했다.
나는 미처 몰랐으나
어른들이 하는 말들을 들어보니
명자언니는 '모지란' 언니라고 했다. 그 세탁소 아저씨도 비슷한 형편이라고도 했다.
"모지란 것들끼리 뭐해먹고 살겠다고. 제 앞가림도 못 할 것들끼리, 으이구 정말."
하는 지영이 아줌마 말에
그래서 언니가 갑갑하고 철없고, 때로는 동생 같았구나 싶으면서 동시에
정말 언니도 그 아저씨도 '모지란' 사람들이라면 도대체 어쩔 셈인건지 걱정이 되었다.
언니가 돌아와서 좀 혼이 나더라도 지영이 아줌마의 보호를 받기를 바라야 하는건지,
아니면 나를 일러바치지 않도록 영영 오지 않길 바라야 하는건지,
하루에도 열두번씩 내 마음은 왔다갔다, 나야말로 안와도 걱정, 와도 걱정이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아니면 몇주가 흘렀을까.
명자언니가 잡힐까봐 겁이 나고, 명자언니가 안 돌아올까봐 걱정이 되던 날들에 지쳐
나는 결국 엄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밤늦도록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보다가
더는 못하겠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졌다. 혼자서 끙끙 앓는 것은 정말 못할 짓이었다.
한밤중에 안방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엄마를 부르는 순간,
말보다 눈물이 먼저 쏟아졌다.
그간의 맘고생에 눈물이 나고, 이토록 눈물을 쏟아야 하는 처지가 억울해서 더 눈물이 났다.
"엄마, 나 명자언니가 세탁소아저씨랑 도망갈거 알고 있었나봐."
오밤중에 자러 들어갔던 아이가 엉엉대며 달려오자, 엄마아빠는 꽤나 놀랐던 모양이다.
내 말을 곰곰히 듣더니,
"괜찮아. 그게 무슨 잘못이야. 그런 걸로 경찰이 안 잡아가.
걔가 나쁘지 너가 뭐가 나빠. 너가 그런 얘기만 듣고 어떻게 알아.
알았으면 또 어쩔거야. 너가 그러라고 시킨것도 아니고 도와준 것도 아닌데."
엄마아빠는 열심히 나를 안심시켜 주었는데,
나는 그래도 겁을 주워담지 못하고
정말 경찰한테 안 잡혀가는건지 거듭거듭 확인하고,
내가 잘못한게 없는건지 묻고 묻고 또 물은 후에야 울음을 멈추었다.
"그것 때문에 아직도 못 자고 있었어?"
유달리 다정한 엄마 목소리가 어찌나 포근하던지.
"오늘은 엄마 옆에서 잘래?" 하는 말에 그간의 내 모든 설움은 잦아들었다.
나는 '전설의 고향'을 본 날에도 늘 혼자 자던 참이었다. 엄마아빠는 동생만 끼고 잤다.
유독 무서운 생각이 들거나, 괜시리 서운한 맘이 드는 날이면 졸라보기도 했는데
"너는 방이 있으니 네 방에서 자야한다" 고 단호하던 엄마였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엄마아빠와 동생이 자기에도 안방은 꽉 차게 좁았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헤아릴리 없는 나는 마냥 서운하고 외로웠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엄마가 안방에서 자는 걸 허락하는걸 보니
엄마는 정말 내 말을 믿어주는구나 싶었다. 큰 잘못은 아니었구나 믿어졌다.
엄마 가슴에 코를 묻고 잠을 청하면서,
아 숨이 막히네, 싶은데도 기어이 코를 박고 그리 잠들었다.
엄마가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는데, 깜빡 잠드실때마다 박자를 중간중간 놓치셨다.
잠이 들려다가도 박자가 틀어지면 나는 홀랑 잠이 깨었다. 그래도 그게 너무 좋았다.
고집스레 엄마 품에 코를 박고, 박자가 어긋나는 토닥임을 세어가며
나는 간만에 두렵지 않은 아침을 맞이했다.
복도에서 만난 지영이 아줌마가
"이정아, 너 명자 때문에 울었다며?" 하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나무라는 것은 분명 아닌데, 이상하게 나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네 잘못 아니야. 명자가 나쁜거지 너가 무슨 잘못이야. 이제 걱정하지 마." 하며
웃어주었다. 왜 요즘엔 뜸하게 놀러오냐며 언니들 보러 놀러오라고도 하셨다.
그나마 남아있던 두려움도 녹아들었다. 경찰아저씨가 뭐라 하더라도 이제 괜찮다.
지영이 아줌마랑 엄마가 막아줄 것이다.
내가 말하면 안 믿더라도, 어른들이 설명을 해주면 경찰아저씨들도 분명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명자언니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저지른 일이 너무 커서 나라도 나타날 수 없을듯 했다.
세탁소 사장님의 신고에도 그 둘은 어디로 꽁꽁 숨었는지 경찰도 찾을 수 없었나보다.
내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을 이별선물로 주고 떠난 언니가
한동안은 밉고 화나고 싫었다. 만나면 머리 끄댕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난, 다른 이들에 비해 친절했는데. 언니 편도 많이 들어줬는데.
왜 명자언니는 내게 이렇게 몹쓸짓을 하고 떠난건지
어린 마음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가난한 어린 부부를 보거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잊고 살다가도 명자언니를 종종 떠올렸다.
나는 여전히 명자언니가
어디에서 어떻게 지영이 아줌마네로 오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지영이 아줌마네서의 생활이 언니에게
그나마의 축복이었는지, 아니면 되려 불행이었는지도 난 알 수 없다.
그저, 지영이 아줌마네에 또래의 여자애들이 없었다면
명자언니 마음은 덜 속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같은 또래 언니들이 예쁜 옷을 입고, 엄마아빠와 놀러도 가고, 학교를 다니는 것을 보며
명자언니는 얼마나 부럽고 서러웠을까 헤아려 본다.
살갑게 굴어주는 옆집 꼬맹이가 때로는 고맙고 편했겠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에 나 또한
철없는 상처들을 언니에게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야기 상대가 유일하게 그 꼬맹이어서
새초롬한 반응에도 붙잡고 이런얘기 저런얘기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언니의 외로운 처지를
이제야 좀 아프게 이해해보기도 한다.
언니가 모두를 삐딱하게 보고 흉을 보았던 것은 언니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언니에게는 사는 내내
세상살이가 뭐 하나 다정치 않았을 것이다.
평생을 받아온 설움들에도 매사
밝고, 긍정적이고, 너그럽기를 바라는건
그 작은 소녀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명자언니는 세탁소 아저씨와 어디에 자리를 잡고 살아갔을까.
그 당시 어른들 말로는 '택도 없을' 그들의 행복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믿어보고 싶다.
명자언니는 나에게
현실과 동화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 이였지만,
언니의 인생은 결국, 돌고돌아 동화 같아졌기를 바래보기도 한다.
부족하고 어려운 두 남녀가 만나
그후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뻔하고도 뻔한 클리셰대로
한번쯤은 어딘가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이야기라면
그 주인공은 명자언니었으면 싶다.
명자언니는 내게 너무 또렷해서
길거리에서 만나도 나는 알아볼 듯 하다. 언니가 훌쩍 늙었더라도 그렇다.
혹시나 만나는 날이 있거든
"언니, 옆집 꼬맹이 기억나?"
하며 얼른 달려가고 싶다.
그리고 꼭 물어보고 싶다.
지금은, 그 때보다 행복하냐고.
살면서 언니 생각이 날 때마다,
언니가 그 때보다는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바랐었다고.
그런 날이 혹시라도 오면
나는 이제 언니의 알 수 없던 사정과 마음들을
조금 더 찬찬히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어렸을때마냥 시큰둥하게 듣는 것이 아니라
언니의 말들 속에 숨어있는 설움이나 외로움을
조금은 헤아려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그런 날이 허락되지 않더라도
지금 어디선가의 명자언니 곁에
그런 이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세탁소 아저씨든, 또다른 이웃이든,
말하기 좋아하는 명자언니의 얘기를
다정히 귀기울여주는 사람 하나만 있다면
언니의 지금은 그 때보다 행복할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