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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구 아줌마 1

내가 아주 날 것이었을 때에

by 이정

어른들은 무심함으로 아이들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준다.

아이들의 마음은 아직 속살과 같아서

어른들의 골라지지 않은 언행은 종종 그 야들한 마음에

생각보다 깊은 생채기를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의 수위가 다르다는 이유로 상처를 주는건 어른만이 아니다. 아이들도 그렇다.

아이들은 무지함으로 어른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아직 모든 것에 서툰 아이들은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어떤 의미로 전달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본능적이고 직설적이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어른들이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쯤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어른도 상처받는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대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른들은 사실,

아이들의 말이 훨씬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가슴에 박힌다.


준구아줌마.

잠시 스쳐간 그냥아줌마를 제외하면

나의 유년시절을 함께 해준 첫 아줌마.


나는 어른들이 혀를 차는 '눈치가 배락같은' 아이었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많이들 그랬듯, 부모님은 내게 예의범절과 상하관계를 유독 강조했기에

다른 어른들에게 나는

공손하고, 순종적이며, 눈치껏 잘 행동하는 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으로 명자언니 등짝을 때리던 지영이 아줌마처럼,

내 친구들에게는 괜찮다 웃어줘놓고 나는 따끔히 혼을 내던 엄마처럼,

나도 그랬다.

집에서는, 가족에게는, 조심스럽지 않았다.


깐깐한 할머니와 엄한 부모님 틈바구니의 유일한 아이었던 나에게

어느날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준구아줌마는

분명 또다른 어른이었지만, 무섭지도, 혼내지도 않았다.

나의 눈치는 그 또한 배락같이 잡아내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준구아줌마를 누구보다도 날 것으로 대했다.

남이라기엔 너무 맞닿아있고, 가족 중에서도 아주 편한 사람.

혹자는 그것을 '만만해서' 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조심스레 변명을 하자면,

'만만해서' 라는 악의는 없었다. 아니, '만만하다'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그저,

엄마보다도 붙어있던 사람이었고, 어른이어서 상처입을 줄 몰랐고,

그러니 그래도 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커서야 깨닫고 이제와 고백하건대, 일정부분 나는

준구아줌마의 상처를 먹고 자랐다.

철이 드는 과정에 지불해야 할 값을

나 대신 준구아줌마가 아픔으로 치룬 일들이 꽤 되었다.

준구아줌마는 나에게

어른도 상처를 받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려준 이었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에서도 피해야 할 말과 하지말아야 할 행동이 있다는 것도

준구아줌마를 통해 알게 되었다.

준구아줌마는 그 시절의 나에게

그저 '아줌마'가 아니라

타인과 가족의 사이의 그 어느 지점에 있는 완충지대 같은 사람이었다.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으로 나가기 전, 연습구간 같은 존재였다.




그냥아줌마가 가고, 며칠이 지나

아빠는 퇴근 후에 나를 안방으로 불렀다.

자리를 잡고 앉은 아빠를 보니,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싶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눈치를 보며 그 앞에 앉은 나에게 아빠는

"내일 아줌마가 오실거야." 라고 하셨다.

아빠의 단호한 말투와 엄마가 열심히 보태는 끄덕거림 속에

나는 내일부터 지켜야 할 예의를 배우기 시작했다.


우선,

아줌마는 엄연한 어른이며, 우리집을 도와주시는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일 오실 아줌마에게 버르장머리 없이 굴면 안 된다고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아줌마를 통해, 아줌마라는 존재는 나쁜사람일 수도 있단 것을 배운 참이었다.

게다가, 어른들이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으나(어쩌면 했을수도 있다.)

명자언니를 '거둬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사람 정도로 여기고 있는건 나도 눈치채고 있었다.

아무도 명자언니를 '고마운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왜 우리집에 오는 식모아줌마는 고마운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고 하는걸까.

이해되지 않았으나, 언니가 아니라 어른이니 예의를 갖춰야 하는구나 넘겨짚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아빠의 요구는 계속 이어졌다.

우리집에 오는 아줌마든, 다른집의 언니든,

'식모'라는 말은 쓰지 말라고 했다.

(이 날 이후로, 나는 지금도 이 글을 위해 '식모'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맘이 편치 않다.)

나는 그 말이 쓰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몰랐다. 엄마, 선생님, 경비아저씨 같이

그저 명칭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식모는 부르면 안되는 말이지?

아빠의 그 날 당부는 내게 예의를 갖추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알지 않아도 될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식모'라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직업이구나 싶어졌기 때문이다.

명자언니만 봐도 그닥 멋져보이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입에 올리면 안 될 만큼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 내게는 또 다른 혼란이 왔다.

드러내놓고 부르지도 못하는 일인데,

그 일을 해주니 고마워하라는 당부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혼란한 내가 별 대답을 못하자,

아빠는 내가 받아들였다 생각하고 다음 얘기로 넘어갔다.


마지막은, 아줌마에게 존댓말을 쓰라는 거였다.

얼렁뚱땅 두가지나 약속을 해버린 나는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싫다고 했다. 절대 존댓말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아줌마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냥아줌마는 물 건너 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명자언니처럼 우리집에 오는 식모, 아니 아줌마와 자매처럼,

그게 안된다면 가족처럼이라도 지내고 싶었다.

내가 존댓말을 써버리면 지영이 아줌마나 창호 아줌마와 별 다를 것 없는 남이 될 것 같았다.

어른이니까 예의를 갖추는건 오케이. 어차피 잘 쓰지도 않았던 '식모'라는 말을 안 쓰는 것도 상관 없었다.

그런데 존댓말이라니.

갑작스러운 딸의 반발에 아빠엄마는 허를 찔렸다.

할머니한테도 안 쓰는데 아줌마에게 존댓말을 쓸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내게

할머니는 가족이지만 아줌마는 가족이 아니라고 아빠는 말했다.

나는 아줌마도 가족처럼 생각할거라고 또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고집을 피우자

아빠엄마는 일단 후퇴를 했다. 하나 정도는 양보를 해주었다.


이것으로 아줌마가 오기 전, 나의 처신은 정해졌다.

예의를 갖추고(어른이니 받아들였다.) 고마운 맘을 가져야 하며(이해되진 않았다.)

식모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도 쓰지 않는 대신에 반말은 써도 된다.


다음날 아침, 조심스레 우리집에 들어선 준구아줌마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얘가 이정이에요." 하고 소개해주는 엄마 말에

나를 보며 수줍은 듯 웃어주는 표정을 보니 아주 좋은 사람 같았다. 그냥아줌마와는 정반대였다.

게다가, 준구아줌마는 오전내내 쉴새없이

엄마가 시킨 것도 하고, 안 시킨 것도 하고, 그러면서도

슬쩍 내가 다가가면 배고프니? 뭐 필요하니? 하며 조근조근 물어주기도 했다.

엄마도 아줌마가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고, 할머니도 쯧 소리를 내지 않는걸 보니,

역시 준구아줌마는 모두가 맘에 들어하는 좋은 사람이로구나 싶었다.

그냥아줌마 같은 사람이까봐 긴장하고 있던 내 맘은 아주 편안해졌다.


며칠의 탐색이 끝나고 나자, 나는 틈만 나면 준구아줌마 옆을 어슬렁 거렸다.

"아줌마는 왜 준구아줌마야?" 라던지, "아줌마는 왜 우리집에 안 살고 딴 데 살아?" 라던지

어찌나 질문이 많았는지. 조용한 아줌마에게 나는 버겁도록 맹랑한 아이었을 것이다.

준구아줌마는 대답을 해 주긴 했으나, 그렇다고 속시원해 대답 해주지는 않았다.

"아들 이름이 준구야." "나도 내 집이 있으니 거기서 살아야지." 등등

아들 애기도 좀 해줬으면 좋겠고, 아줌마집은 어디인지 어떤지도 좀 알려주면 좋으련만

늘 간단하고 부족하게 대답을 해주니

나는 애써 또다른 질문을 만들어내고 이어가야 그나마 아줌마와 말을 섞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궁금한게 떨어지면, 정히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지어내서라도 말을 걸었다.

그거는 왜 닦아? 이거는 왜 치워? 저거는 왜 섞어?

가끔씩 아줌마는 그런 나를 보고

"너같은 따발총은 보다보다 첨 본다." 라며 한숨을 쉬었다.

별로 질책하는 말투가 아니었기에 나는 헤헤 거리며

머릿속으로 또 얼른 질문을 지어냈다. "아줌마 이제 뭐할거야?"


그 날도 아줌마가 저녁준비를 하는 옆에 붙어서서

질문을 던져대고 있었다.

뭐 만들어? 어떻게 만들어? 왜 만들어?

의미없는 물음들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사실 내가 진짜 궁금한건 따로 있었다.

아줌마가 우리집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에 잡혔던 것.

아줌마의 엄지손톱.


아줌마는 엄지손톱이 없었다. 나의 궁금함이 뻗치는데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냥아줌마도 손톱 하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아줌마에겐 선뜻 물어볼 기회가 없었기에 묻혀놓은 질문이었지만,

준구아줌마는 이제 낯선 이가 아니었고, 이만하면 물어봐도 될 사이가 아닌가 싶었다.

사실 나는 첫날부터 그것이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엄마에게 먼저 물어봤었는데

"글쎄? 다치셨나?" 하며 얼렁뚱땅 넘어간 참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다친거냐는 말에

내가 어찌 아냐고, 별게 다 궁금하다는 엄마의 반응에

입을 삐죽대며 겨우겨우 호기심을 숨겨놓은 중이었다.

별로 유쾌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좀 더 친해질 때까지 기다리느라 안달이 나 있었다.


그동안 언제 물어볼까 눈치를 보면서

혼자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그런 생각도 들었었다.

우리집에 있던 아줌마 둘 다 손톱이 없다는 건

일하는 아줌마들의 징표 같은걸까.

어른들 세상에선

손톱 없는 사람들은 남의 집 일밖에 할 수 없도록 규칙을 정해놓았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추측들이

그 당시엔 꽤나 그럴듯한 근거가 되어 내 머릿속에서 난무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곤 했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준구아줌마의 엄지손가락이

얼른 물어보라고 재촉하듯 내 눈 앞을 오락가락 했던 것이다.


야채를 다듬는 아줌마 옆에 붙어서서 잠시 망설이다가 기어이 물었다.

"아줌마, 아줌마는 왜 엄지손톱이 없어?"

아줌마는 순간, 멈칫 했던 것도 같다.

"다쳤어."

늘 그랬지만 이번 질문엔 더더욱 대답이 짧다.

그 정도는 나도 엄마에게 들어 알고 있다. 사실 엄마에게 듣지 않았더라도

그 쯤은 나도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궁금했던, 어디서 다쳤는지 어쩌다 그랬는지 등의 질문은 던져보지도 못한 채

다시 꾸역꾸역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줌마는 티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아줌마의 엄지손가락이 슬쩍 추스려지는걸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다할 답도 얻지 못하고, 황당한 추측만 거듭하느라

그 후로 오랫동안 손톱에 아주 예민해졌다.

손톱이 짧아지다 없어질까봐

아빠가 손톱을 깎아줄 때에는 바짝 깎지 말라고 성화를 부렸다.

손톱 주변이 조금이라도 다치면, 흐르도록 아까진끼를 발라대고 붕대를 둘둘 감았다.

어느 정도로 예민했냐 하면,

나는 꽤 오랫동안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으로 엄마에게 혼나는 일이 부지기수였는데

그래도 틈만 나면 손가락을 입으로 갖다대었었다.

그런데 하루는 엄마가 혼내는 와중에 "그러다가 손톱이 다 뜯겨서 없어질 것." 이라고 하는 순간,

그 말 한마디로 내 오랜 습관을 고쳤다.

손톱이 없어진다는 건, 야단을 맞고 쥐어박히는 것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남의 집 일은 할 자신이 없었다.


여전히 나는 준구아줌마의 엄지손톱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

지금도 아주 가끔, 없거나 망가진 손톱을 어디선가 만날 때마다

준구아줌마가 떠오르고, 슬쩍 추스리던 동작이 떠오르고, 그러면서

철없던 내 입이 미안해진다.

유달리 조용하고 부끄럼이 많던 준구아줌마는

말간 표정으로 묻는 일곱살 꼬맹이에게 부지불식간에 푹 찔렸을테니 말이다.


그 때의 나 또한

아줌마의 반응에

얼른 내 질문을 후회했다.

왜 배락같은 눈치는, 저질러놓고 발휘가 되는지

어차피 풀리지도 않을 궁금함인데, 그냥 묻지 말걸 싶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상황.

나는 그 후로 아줌마의 엄지손가락이 보이면

얼른 눈을 돌렸다.

보아주지 않는 것이 그나마, 아줌마를 위하는 일인듯 했다.

그것이

조용히 숨기던 아줌마의 엄지손가락에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사과였다.

나는 그 날을 내내 후회하며 다짐했다.

앞으로 아주 친해진 사람이 있더라도,

궁금하다고 다 물어보진 말아야지. 부끄러운 일 같으면

궁금해도 참아야지. 갑갑해도 넘어가야지.


나는 그렇게

준구아줌마 마음을 덥썩 깨물어 먹고

엄지 손톱만큼 조금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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