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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구 아줌마 2

일곱살의 도원결의

by 이정

그 무렵,

준구아줌마에게 날 것의 질문을 던져놓고 자꾸만 눈치가 보여서

다시 멀어진 것만 같았던 그 즈음,

TV를 틀면 부쩍 '티티파스'라는 크레파스 광고가 나왔다.

다른 부분은 잘 기억나지 않으나, 마지막에 '부러지지 않아요.' 라고 외치던 그 광고를 보며

신세계를 만나 기분이었다.

나의 크레파스 통에는 죄다 물러지고 부러진 것 투성인데...

아무리 조심해도 크레파스라는 것은 온전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나는 공을 들여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다. 티티파스를 손에 넣어야만 한다!


엄마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티티파스를 사들고 돌아오는 길,

크레파스를 끌어안고 집으로 종종 걸어가는 내 곁에서 엄마는

아직 남아있는 크레파스가 있는데 왜 새거를 사야 하느냐고 내내 잔소리를 했지만

들리지도 않았다. 티티파스가 내 품에 있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루에 스케치북을 펴놓고 티티파스를 써보기 시작했다.

살색(그 시절엔 살구색을 살색이라 했다.)을 들어, 꾹 눌러보았다. 부러지지 않았다.

더 세게 꾹 눌러보았다. 그래도 멀쩡했다.

이것까지 통과하면 정말이야! 힘을 주어 꾸우욱 눌렀다.

뚝.

아직도 그 느낌이 손 끝에서 생생하다.

이럴리가 없다. 분명히 부러지지 않는다고 TV에서 그랬는데.

"엄마 엄마, 이거 부러졌어!" 라며

숨이 넘어가도록 소리를 지르는 내게 엄마는

"그리 힘을 줘서 누르는데 어떻게 안 부러지니!" 라며 혼을 냈다.

새 것을 사줘봐야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다며,

요즘 애들은 물건 아까운줄을 모른다고 되려 잔소리를 했다.

나는 엄마가 내게 왜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한 건 TV였다. 광고였다. 분명히 부러지지 않는다고 외쳐댔었다.

당한 건 나다. TV가 나빴다. 그런데 나는 엄마에게도 혼나고, 새 크레파스도 망가져 버렸다.


기억에 생생할만큼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살색이 부러져 버렸으니, 나는 이제 사람을 그릴 때마다 마음이 아플 것이다. 쓰고싶지 않을 것이다.

이 크레파스는 소용없다. 더이상 티티파스가 아니다.

다시 사내라고, 어른들은 거짓말쟁이라고, 문방구 가서 바꿔내라고,

울며불며 난리를 치다가 엄마의 서슬에 쫓겨간 방 안에서

아무리 훌쩍이며 생각해봐도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부러지지 않는다기에 확인해본 것 뿐이다.

불량품이거나 거짓말에 속은 것이니

문방구에 가서 바꿔달라면 될 것 같은데 왜 엄마는 내게 화를 내는걸까.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 불러도 버티고 있었다.

사실 이제 눈물이 더 나오지 않지만, 나는 아주 화가 많이 났기 때문에

냉큼 밥을 먹으러 갈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한 티티파스도 나쁘지만,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엄마도 나빴다.

꼬르륵대는 배를 나는 참아낼 것이다. 절대 맥없이 식탁 앞에 앉지 않을 것이다.

결심에 결심을 거듭하는데 방문이 열렸다. 준구아줌마였다.


"크레파스가 부러져서 그래?"

준구아줌마는 늘 그렇듯 살금살금 내 앞에 앉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묵묵부답. 어른들은 다 나빠.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잘 안 부러진다는거지, 진짜 안 부러진다는건 아니었을거야."

내 눈치를 살피는 아줌마에게 나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진짜 안 부러진다고 그랬어!!"

"그래도 문방구에 가서, 너가 억지로 부러뜨리려고 했다 하면 안 바꿔줄걸?"

맞는 말이다. 안 부러지기에 기어이 기어이 부러질 때까지 힘을 주긴 했다.

"와서 밥 먹어. 새 크레파스가 부러졌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니. 크레파스도 부러져서 속상한데 배까지 고프면 너만 손해지."

등을 쓸어주는 손. 나만큼이나 속상해보이는 눈빛.

왠지 모르게 다시 눈물이 터져나온 내게 준구아줌마는 밥 먹으러 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한 명이라도 내 맘을 알아줬으니 덜 서럽다.

이 정도면 내 억울함도 충분히 엄마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준구아줌마가 와서 어쩔 수 없이 가는거지, 절대 내가 배고파서 가는게 아니다.

아줌마 손을 잡고,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일부러 세게 지으며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화난척을 계속 하기엔, 저녁이 너무 맛있었다.

깨작깨작대고 싶은데, 자꾸만 수북수북 먹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정말 먹기 싫었는데 준구아줌마가 기어이 나를 데리고 나온 거니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유치원이나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도

티티파스를 단호히 거부하고, 악착같이 피노키오 파스만 사용했는데

다른 친구들의 티티파스를 볼 때마다 늘 생각했다.

나의 피노키오보다, 아이들의 티티가 더 거짓말쟁이라고.

간혹 친구들의 부러진 티티파스를 볼 때마다 묘한 승리감도 느꼈다.

광고는 거짓말이었고 내 잘못은 없었던 게 맞다.

나는 그 거짓말을 애저녁에 알아챈 사람이다! 나는 이제 속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뵈지않던 티티파스 광고가 다시 TV에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이를 앙다물고 광고를 노려 봤었다.

침팬지가 나와서 가지고 노는 광고였는데

저런 거짓말쟁이 크레파스가 아이들을 속이려고

제법 재미난 광고로 유혹하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그 광고만 나오면 넋을 놓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

나는 동생에게 힘을 주어 단도리를 했다.

"저거 사지 마. 쟤네 다 거짓말이야. 절대 속으면 안돼."

언니의 서슬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던 동생의 모습으로 유추해보면

이미 나는 국민학교 고학년쯤 되었을법 한데,

그 때까지도 화가 나 있었던걸 보면

내게 그 기억은 두고두고 억울한 일이었다보다.

광고에 속아 억울했던건지, 아무도 내가 옳다 말해주지 않아서 속상했던건지는 모르겠으나

그 시절 그나마

속상했던 마음을 알아주었던 이는 준구아줌마 뿐이었다.

그게 왜 속상한 일이냐고 화를 내지 않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이제

나에겐

준구아줌마가 있다.


티티파스를 잃고 준구아줌마를 얻은 날,

그 날부터 나는

준구아줌마에 대한 나의 비장한 의리를 보여줄 기회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준구아줌마가 속상할 때면, 내가 아줌마 편이 되어줘야지.

아무도 아줌마를 이해해주지 않을 때,

나도 아줌마 손을 잡아줄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도 금세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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