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육볶음
아침상을 차려놓고, 첫째를 기다리며
잠깐, 브런치를 열었다.
캐리소님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소란해면서, 머릿속은 어젯밤을 거슬러 십여년 전으로 달려간다.
어젯밤, 둘째와 나는 부딪혔다.
아이가 숙제를 하다말고
내게 하소연을 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학원 선생님께 모르는 문제를 질문 했는데
다시 들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묻기에는
같이 수업듣는 친구들에게 미안해서 질문을 삼켰다고 했다.
그런 일은 종종 있어서
놓치고 지나가는 부분들이 있는듯 하여 걱정이 된다고도 했다.
나는 늘 그렇듯,
아이의 어려움 앞에
자세한 사항을 묻고 아이의 판단을 들으며, 머리의 온갖 회로를 바삐 돌렸다.
도움이 될만한 상황을 제시하고,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차안을 알려주며,
내가 생각하는 더 나은 방법을 덧붙이기도 했다.
아이는 보통
고개를 끄덕이거나, 다른 변수들을 질문하며
나와 솔루션을 찾아보곤 했지만,
요즘들어 둘째는
"알아서 할게." 라거나
내가 내어놓는 대안마다 고개를 내저으며 그럴 수 없는 이유를 들며 반박한다.
어제가 그랬다. 내 말마다 그건 그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못한다고 대꾸했다.
그냥 알아서 할테니 놔두라고 했다.
낯설지는 않다. 첫째도 이런 시기를 지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나는
둘째마저 그러는 것에 화가 났다. 그렇게 우리는 부딪혔던 것이다.
아이를 너무 사랑하기에 걱정이 되었고
아이의 어려움에 내가 더 속상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그 때의 내 마음 속 깊은 부분은 어떤 모양새였을까.
문제가 있다면서 해결방안을 함께 고민하려 들지 않는 아이가 갑갑하면서도,
이토록 애를 쓰는 나의 노력이 거절당하는 기분이었던건 아닐까.
그러면 어쩌자는건지, 불안함이 고개를 들었고
죄다 고개를 저을거면 왜 이런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았던 것일까, 싶어 어이없기도 했으며
더 나은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함에
아이보다 내 자신에게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나의 이런 감정은 아이에게
'너가 걱정되서' 라는 포장을 한 채, 날카롭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어젯밤의 우리의 갈등은
아무런 소득없이, 서로의 마음만 상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첫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버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이모님은 더할나위 없이 감사한 분이었고
남편은 어떻게든 육아를 분담하며 나의 어려움을 덜어주었으나,
예상치 못한 변수들 앞에서는
그것은 모두
오롯이 내 몫이었다.
갑작스레 이모님에게 사정이 생긴다거나
나와 남편이 동시에 주말출근으로 묶인다거나
해외출장 스케줄이 잡혀 방법이 필요해진다거나 하면
나의 머릿속은 대책을 강구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무엇보다 아이가 아프거나 다치면,
나는 또다시 회사에 아쉬운 소리를 하며 반차를 내거나
회의하다 말고, 집으로 차를 내달려야 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매일이 미안한 일 투성이고, 고개숙여 부탁하며 지내야 하는 날들이었다.
일하면서 아이를 키워본 나의 엄마는
딸의 이러한 사정을
안봐도 훤히 짐작간다 했다.
어떻게 지내고 있냐는 질문에
내가 힘없는 목소리를 내기만 해도 엄마는
매일 애가 닳아했다.
밤샘근무도 많고, 정시퇴근이란 없는 일인 것은
엄마도 일찌기 알았으므로
집과 회사, 양쪽에 한 발씩 걸쳐두고 다리가 찢어져라 동동댈 딸 생각은
하루가 멀다하고 엄마의 마음까지 천둥이 우르릉 치게 만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엄마는 내게 자주 전화했다.
오늘은 어땠는지, 별 일은 없는지,
이런건 이모님께 더 부탁을 해보아라.
저런건 회사에 사정을 전해봐라, 며
숨이 차도록 앞서 걱정을 했고, 쉴새없이 조언을 더했다.
그러나,
엄마의 맘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요즘의 이모님은 엄마가 겪어온 그 시절의 아줌마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번외의 일을 맡기거나, 사정을 얘기하며 출퇴근을 내 맘대로 조정할 수는 없었다.
또한 빡빡한 이 업계의 일은
엄마는 겪어본 적 없는 조직생활이었고, 복잡한 시스템이었다.
그러니 엄마의 전화는 내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안그래도 바쁜 와중에 일일히 대꾸하고 거절해야 하는 또다른 일꺼리로 다가왔다.
위로가 되거나 도움을 받기는 커녕,
전화를 끊고나면 매정한 딸이 된듯한 기분에
안그래도 무거운 마음이 더 밑으로 가라앉았다.
나도 모르게 푸념 끝이 길어진 날이면
엄마의 전화는 횟수가 더 늘어났고, 걱정과 조언은 더 길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말것을, 이라며 후회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이토록 나를 애닳아하고 염려하는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후회 끝에 죄책감을 매달고 사는 반복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바랐던 것은
이 상황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그저, 내가 겪고, 버티고, 이겨내야 하는 시기었다.
엄마에게 바란 것이 있다면
어느날 난감한 상황을 만났을 때에
손을 내밀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믿음이 되어주는 것,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성격상, 어떻게든 내 선에서 해결해보고자 할테지만
만에 하나, 그런 때에 기댈 구석이 내 마음엔 필요했다.
아직 너무 어린 아이와, 유독이나 빠른 속도의 회사 일은
수많은 변수를 동반하기에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봐 노심초사 하는 것에
나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가 열이 높다고 이모님께 전화를 받았던 날,
나는 이미 여러번의 연차를 끌어 쓴 중이었고,
남편은 꼼짝 못할 프로젝트에 붙잡혀 있었으며,
이모님은 이동할 차가 없는데다, 병원은 멀었다.
열이 나는 아이를
칼바람 속에 택시를 잡아 병원을 오가게 하는 것은
갓난아기에게도, 이모님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요즘처럼 택시를 쉽사리 예약하고 부를 수 있는 시스템이 없던 때였다.
엄마에게 조심스레 걸었던 전화.
혹시 병원 오가는 것을 도와줄 수 있냐는 나의 질문에
"아, 나 오늘 바쁜데, 시간이 되려나..."
라고 대답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당황스럽도록 차가웠다.
늘 바라지 않던 도움까지 주려던 엄마의 돌연한 반응에
나는 어이없고 야속해서
엄마가 스케줄을 확인하는 짧은 정적동안 전화를 끊어버리고만 싶었다.
"그래 알았다." 라고 짧게 마무리하는 통화 끝에 이어붙는 엄마의 한숨소리는
엄마에게 연락했던 나를 쥐어박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이 마음이 오래동안 거둬지지 않을 듯 하여 후회스러웠다.
아, 나는 왜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을까.
끊어버릴걸. 한숨까지는 듣지 말고 끊어버릴걸.
나는 유독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는 것에 서툰 사람인지라
망설이고 망설이다 한 전화였다.
그냥 하지 말것을.
이제야 시어머니와 딸들에게서 벗어나 엄마만의 자유를 오롯이 누리고 있음을 알기에
나 또한 엄마의 이 시기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그동안 무던히 애써왔다.
이번에도 나 혼자 어떻게든 해결해볼 것을.
차라리 도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엄마가 나의 사정을 함께 속상해만이라도 해줬더라면,
설사 거절을 하더라도
도와주지 못함에 엄마가 안타까워만이라도 해줬더라면,
서운하지도 야속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았을텐데,
안타깝게도 두어번에 걸쳐 비슷한 상황은 반복되었다.
어느 날은 한숨이었고, 한참이 지난 후의 또 다른 날은 엄마의 심난한 표정을 맞딱뜨렸다.
나는 더이상 엄마를 찾는 것에 머뭇대게 되었고,
전화기를 향하는 손가락은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도움이 간절한 상황이 생기면
엄마를 떠올리기도 전에,
엄마의 한숨소리가 먼저 내 귀를 잡아당겼고
엄마의 좋지 않던 표정이 눈을 질끈 감게 만들었다.
그 시기의 나에게 간절했던 기댈 구석.
되든 안되든, 일단 도움을 청해보라며 어딘가에 푸근히 있어주는 누군가.
나에게 그 '누군가'는 허락되지 않았었다.
어딘가에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엄마는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러니 나는 엄마에게 도움을 받은 주제에
고마워하기는 커녕, 마음을 뾰족하게 세우는 딸이 되어 있었다.
굳이 내 마음을 내비치지 않았기에 영문을 모르던 엄마는
여전히 하루가 멀다하고 안부전화를 하며 걱정을 했고,
나에게 딱히 필요하지 않은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더 이상 엄마의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 혹은 참견으로 여기며
엄마가 원하는 방식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에 미안함조차 걷어내버린 후였다.
그래서 엄마는 늘 서운해했다.
나의 서운함은 닿을 곳이 없어 다시 내 마음으로 불러들였으나
엄마의 서운함은 정확히 나에게 향했기에
나는 더 마음을 닫았다.
도움을 청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을 택하고 말았다.
지금 겪는다면 좀 다를까.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그랬다.
너그럽기엔 마음이 너무 빼곡했다.
엄마는 아마도
취소하기 힘든 일정이 있었을 것이다.
갑작스런 내 부탁에 그저 당황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긴 한숨이나 심난한 표정은
어렵게 부탁하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난감해진 스케줄을 향한 것이었거나, 선뜻 나서주지 못하는 엄마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의 나는
몇 번의 기억을 마음에 단단히 새기고는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하는 생각을 모조리 거둬들였고,
아동바동 메꾸며 사느라 빠르게 지쳐갔다. 몸보다 마음이 더 버거웠다.
결국 일을 그만두기로 한 내게
너무 아깝지 않냐는 회사의 만류에 나는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기댈 곳이 있다는 믿음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내가 그리 사랑하던 이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드러내진 않았으나,
나는 나의 퇴직사유를 일정부분 엄마에게 돌리고 있었다.
워킹맘인 딸을 만나고 오는 길에 썼다는
캐리소님의 글을 읽으며
오만가지 기억들이 머릿속에 줄지어 늘어섰다.
그 줄을 잡고 더듬더듬 되짚어가며
오랜만에 그 때의 엄마에게 다시 서운했고,
그 시절의 내가 너무 뾰족했나 싶기도 했다가,
아... 나는 이내 깨달았다.
나 또한 엄마와 다르지 않았다.
어젯밤에도 나는
사소한 아이의 푸념에
아이가 청한 적 없는 방법들을 늘어놓으며
나의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갑갑해했다.
그것은 애정이 아니라 강요였다.
게다가 아이들이 나에게 종종 도움을 청할 때에
꼭 그래야겠냐고 아이에게 되물어봤던 적이 있는 것을 보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
나의 표정엔 어쩌면 피곤함이 드러났을 수도 있고
복잡해진 스케줄에 한숨을 쉬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방식과 타이밍 모두
나 또한 어긋나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 때의 엄마는 몰랐고, 지금의 나는 알았다.
그저
그 차이다.
생각을 정리하며, 첫째의 아침식사 곁에 앉았다.
"엄마, 나는 진짜 3차시험 보고 싶은데,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아서 불안해."
라며 첫째는 나즈막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망쳤다는 시험 결과는 아직 발표 전이다.
나도 안다. 3차시험 유형은 아이에게 꽤 자신있는 방식일테다.
아이만큼이나 나도
3차시험을 치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속이 상할 터였다.
아마 어제의 나였다면
푸념하는 둘째에게 했듯이
첫째의 힘든 마음 앞에 나홀로 전사가 되어 버티고 서서,
적진을 무찌를 계획을 늘어놓았으리라.
아이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2차시험 결과가 좋을 것이라는 근거를 들이밀며 애써 설득을 하거나,
아이의 속상함을 희석하기 위해, 혹시 떨어지더라도 만회할 수 있는 다른 작전을 조언했을 것이다.
그러나 습관처럼 들썩이는 마음을 누르며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도. 엄마도 너한테 기회조차 없으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
그렇게 되면 너랑 나랑 끌어안고 실컷 울자."
아이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나 안 울거야. 그냥 엽떡 3인분 시켜서 죄다 먹을거야."
"그래? 그러면 5인분 시키자. 엄마도 2인분은 옆에서 먹어줄게."
"엄마 요즘에 다이어트 한다고 뭐 잘 안 먹잖아."
"어유, 너가 속상하다는데 그깟 다이어트가 뭔 대수야."
"치, 엄마 떡볶이도 안 좋아하면서."
"그래도 속상한 사람끼리, 이욍이면 같은 걸로 풀면 서로 좀 위로가 되지 않겠어?"
첫째가 웃는다. 밥 한 공기를 싹 비웠다.
아이가 부담을 느낄까봐 애써 씩씩한 척을 하지도 않았고,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솔루션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웃었고, 기분이 나아졌고, 다정히 학원으로 함께 향했다.
아, 나는 이것을
이제야 알게 되는구나.
해결해주느라 나는 힘을 끌어모을 필요도 없었고
마음을 마음으로 되받은 아이는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아이가 원치 않는 것에 썼던 힘은 잘 모아서
아이보다 더 요동치는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사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첫째를 내려주고 돌아오며
이 뒤늦은 깨달음을 잘 지켜내야겠다 다짐해본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아이보다 반걸음 뒤쳐진 곳이어야 한다는 것.
서둘러 나서서 도움을 주는 것을 멈추고,
아이가 손을 뻗으면 쉽사리 닿을만한 반걸음 뒤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고 따라가줘야 한다는 것.
아이보다 앞서 가느라 쓰던 힘은
걱정이 되어도 보폭을 맞추고, 내가 필요하다 할 때에
기꺼이 나서는 것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
기억하자. 기억하자. 되뇌어 보았다.
둘째의 아침을 차려주며
아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제 엄마한테 도와달라고 말했던 것은 아니지?"
"응. 그냥 그렇다는 말이었어."
"그런데 엄마가 막 이래라 저래라 하니 짜증이 났던거지?"
"응."
"그랬겠다. 엄마가 헷갈려서 그랬어.
너가 도와달라고 싸인을 보내는건데, 엄마가 놓치고 넘어갈까봐
괜히 쓸데없이 걱정을 했나봐."
"괜찮아. 그럴수도 있지 뭐."
"엄마 도움이 필요할 땐 도와달라고 말해줘.
그러면 그 때, 엄마가 어떻게든 도와줄게."
"응...
그런데 있잖아 엄마. 어제 내가."
조금 서먹한 표정으로 식탁에 앉았던 둘째는 나의 몇마디에 다시 수다쟁이가 되었다.
나는 밥을 먹는건지, 수다를 떠는건지 모르게 이야기가 늘어지는 둘째를 보며 생각하였다.
나는 앞으로도 종종 헷갈릴 것이다.
도와달라는건지, 그저 들어달라고 하는건지,
아이의 어려움 앞에서는 여전히 판단을 세우느라 마음이 우왕좌왕 시끄러울 것이다.
기억을 하고 노력을 하더라도
낯선 방식의 엄마 노릇은
실수가 따라붙고, 막막해질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꾸자꾸 연습을 해야겠다.
아이들은 점점 내 손을 떠나고 있고,
혼자 맞서는 법을 익히고 있다.
더 이상 나의 아이들은
일일히 가르치고 앞에서 이끌어줘야 하는 나이가 아니기에
나는 아이의 앞에서 물러나, 조금씩 뒤로 속도를 늦추는 것에
지금에라도 열심을 내보아야겠다.
딱 반걸음 뒤에서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때에, 기다려온 만큼 기꺼운 마음으로
덥썩 잡아주어야 겠다.
넘어져도 엄마가 뒤에서 받아줄 것임을 믿고
아이들이 뚜벅뚜벅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잠잠히 뒤에서 지켜봐주어야 겠다.
이 아침,
예기치 못하게 나는
오랜동안 묻어왔던 마음이 조금 개운해졌다.
엄마도 그저
이제까지의 나와 다를 바 없는 마음이었음을 깨달으며
그 시절의 엄마에게 화해를 청해본다.
무엇보다 다행한 일은
아이들이 클수록 어렵게 느껴졌던 엄마의 역할이
어슴푸레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으나,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꽤 편히 놓여진다.
캐리소 님,
참
고맙습니다.
제육볶음
며칠 전, 그 날의 아침메뉴였죠.
아이들이 밥 한 공기를 뚝딱해준 이유는
엄마의 달라진 마음 때문일 수도 있지만,
평소 좋아하던 제육볶음도 한 몫을 했을거에요.
보통은 돼지고기 전지로 만들지만, 가끔은 남은 삼겹살로 요리하기도 합니다.
저는 기름진 삼겹살 제육볶음을 좋아하지만, 아이들은 담백한 전지를 더 좋아하더라구요.
저희집 제육볶음의 킥은 카레가루와 고추기름입니다. 가끔 신김치를 같이 넣어 색다른 맛을 즐기기도 한답니다.
1. 고추장, 고춧가루, 다진마늘, 간장, 설탕, 생강가루, 매실청, 그리고 카레가루로 양념장을 만듭니다.
(이 양념장은 닭갈비나 오징어볶음에도 안성맞춤이랍니다.)
2. 돼지고기에 양념을 버무려 30분 이상 재워둡니다. (저는 보통 전 날 밤에 재워두고 아침에 볶아냅니다.)
3. 달궈진 팬에 기름을 두르고, 양배추, 파, 양파를 넣습니다.
4. 야채를 볶으며 고춧가루를 넣어서 고추기름을 내고, 야채에도 맛이 배도록 설탕과 간장을 조금 추가합니다.
5. 야채의 숨이 살짝 죽으면 고기를 넣어 함께 볶습니다.
6. 마지막으로 깻잎채(이번에는 깻잎이 너무 시들해서 아쉽지만 패스)와 참기름을 두르고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