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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야 할 때 사라지는 것 2

청국장 찌개

by 이정

"사라져야 할 때 사라지는 것이

꽃도 꽃이 되게 하고, 사람도 사람이 되게 한다.

이 글은 우리가 갈 성의 주인이었던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내,

타마코가 목숨을 끊으며 치맛폭에 써 내려갔던 글입니다."


구마모토 시내관광을 위해 탄 셔틀에서

가이드분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여쁜 외모의 타마코. 여러가지 설이 많지만,

남편과 살뜰히 사랑을 나누고, 남편을 위해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았다는 그녀는

사라져야 할 때 사라지는 것에 대한 예찬으로

인생을 마무리 했다고 한다.


셔틀을 오르는데,

맨 앞자리에 국장님이 남편과 함께 앉아있었다.

이틀 전, 반갑지만 다소 어색한 재회를 하고

아마도 오고가며 마주치게 되겠지- 라는 인사로 마무리 했었다.

역시, 숙소 내 레스토랑이나 수영장에서 우리는 마주쳤고,

때마다 반가이 인사하고, 서둘러 갈 길을 가곤 했다.

그녀와 인사하고 돌아서는 때마다 나는 서글펐다.

나보다 그녀가 더 허둥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 살갑던 우리가, 왜 이리 마주치는 것조차 반갑지만은 않아졌을까.


꽤 오랜시간 나는 마냥 사라져버리고만 싶었다.

내 인생에서 착실히 회사 사람들은 지워갔다.

정말 각별했던 서넛과 연락을 이어가는 것조차

때로는 씁쓸한 마음으로 통화종료를 누르게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SNS가 생겨날 때마다

누군가 신청을 해오면 나는 참 매몰차게도 거절, 거절을 누르곤 했었다.

처음에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자꾸 되돌아보게 되면

단호히 내렸던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한 날, 삼삼오오 점심시간을 즐기는 직장인들을 보거나,

TV에서 내가 하던 일과 관련된 소식들을 마주치게 되거나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아, 나는 이제 정말 해방이 되었네! 하고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속으로 되뇌이곤 했다.


회사시절 입던 몸에 꼭 끼는 정장들이

하릴없이 먼지가 쌓여 낡아가는 것을 볼 때에,

오늘 하루 가장 골몰했던 일이

뽀로로를 그리고 오려서 가면을 만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밤에,

화장을 하지 않는 날들이 늘어나고, 생활비 통장을 뒤적이는 일이 잦아질 때마다

나는 어느것도 자연스레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덜컥, 그만둔 탓을 하곤 했다.

이러한 못난 마음을 어떻게든 지워보려

나는 정말이지 그 시절의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만 싶었다.

그 시절은 없었던 듯 살기 위해,

모두가 나를 잊어주기만을 바랐다.


꽤 오랜 기간에 걸쳐

회사동료라기보다는 친구가 되어버린 몇몇을 제외하고는

나는 아주 성공적으로 사라졌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지런히 지금의 나에게 익숙해졌다.

이제는 회사를 다녔던 기간과, 아이를 챙기며 지내온 시간이

얼추 비슷해졌다.

하루에도 열두번 나를 찾던 아이들이 이제 알아서 하겠다며 나를 밀쳐낼 때마다

예전의 그 시간들이 아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꽤나 괜찮아졌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이힐 대신 쓰레빠를 끌고

회의자료나 노트북 대신 아이들 손을 잡은 채 그녀를 마주친 순간,

아, 완전히 괜찮아지지는 않았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반가우면서도 마냥 반갑지 않은 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밝게 웃으면서도 굳이 내 눈과 맞추지 않던 그녀의 눈동자와

누구보다 환했던 웃음 끝이 조금 뭉개져서 마무리되는 그녀의 표정에

나는 하필 이 때, 그리고 이 곳에 있는 것이 미안해졌다.

지금이 아마도 그녀에게는

가장 사라지고 싶은 시기이구나, 지나온 내가 떠올랐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는

업계에서 가장 바쁜 시기 중 하나였다.

하반기를 준비하고 계획을 세워야 하는,

그래서 늘 여름휴가는 가을께로 미루곤 했었는데,

한여름 낯선 곳에서

한껏 여유로운 여행복장으로 내 앞에 서야 했던 그녀.

그녀의 이야기를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에 나는 굳이 묻지 않았으나

"나 은퇴했어!" 라며 유쾌함을 도드라지게 강조하는 그녀에게

나는 별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만하면 많이 하셨죠!" 하고 하하 웃었을 뿐이었다.


한 때, 집과 회사를 오가며 누구보다 바쁘고 치열했던 우리는

가장 정신없어야 할 시기에 이국땅의 평화로운 관광코스를 돌았다.

그녀는 제일 앞자리에, 나는 버스의 제일 뒷자리에 앉아서

거슬릴만큼 카랑대는 목소리의 가이드로부터

사라져야 하는 때에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무리었는지

가이드의 호들갑스러운 감탄을 들으며

기어이 사라지지 못한 우리 둘을 생각했다.

그리고

하필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가이드의 목소리가 더 뾰족하게 귀에 꽂힐 그녀가

마음이 쓰였다.

그래도 꽤 긴 시간을 사라져있던 나보다

짧은 시간도 허락받지 못한 그녀가 안쓰러워

의도치 않았던 나의 등장이 다시 한 번 미안해졌다.


말했듯, 그녀는 나의 내일이었다.

그 시절엔 당연히, 나 또한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녀처럼

쌓여가는 커리어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쉼없이 다음으로 뛰어가며 살 줄 알았다.

아 부디,

"국장님은 나의 내일이에요." 라고 했던 내 말을

그녀가 잊었기를. 나를 만난 것이 그녀를 서글프게 만들지 않았기를.

가이드의 저 이야기가 얼른 끝나기를 바라고 바랐다.


사라져야 할 때 사라졌던

타마코의 구마모토 성은

견딜 수 없이 더웠고, 숨이 막혔다.

나는 그 높은 계단을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기에

가까운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와서 셔틀에 올라탔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그녀는 가이드북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너무 더워서 안 나갔어. 굳이 이 더위를 뚫고 봐야겠니?"

하며 웃었다.

나는 그녀 옆,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 말해주고 싶었다.

국장님은 다시 나의 내일이 되었다고.

나도 언젠가는 아이들을 다 키워내고

언제든 어디든 오붓하게 여행을 가는 꿈을 종종 꾼다고.

다시 나의 내일이 되어 나타나줘서 고맙다고.


그러나 나는

버스 제일 앞자리의 그녀를 지나쳐 제일 뒷자리로 와서 앉았다.

사라져야 할 때, 사라져야 할 때, 가 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고

얼른 그녀 앞에서 사라져줘야 할 것 같았다.

텅 빈 버스 안, 에어컨 바람에 살갗이 서늘한데 왠지

구마모토성의 계단높이만큼 숨이 막혔다.

저만치서 그녀의 가이드북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물고있던 아이스크림을 더 조심스레 훑었다.


그녀는 나의 새로운 내일이 되어 나타났고,

나 또한 그녀의 내일이 되어 있었다.

마냥 사라지고만 싶던 나는 이제

꽤 아무렇지 않다. 순간순간 밀려오는 감정이야

별스런 것들도 많으니 무시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렵지 않다.

그녀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럴 것이다.

호기롭던 꿈과, 이루지 못한 지금의 사이에서

수많은 회한에 밤잠을 설치겠지만,

어느날 제법 아무렇지 않아질 것이다. 늘 씩씩했던 그녀였다.


체크아웃을 하던 날,

우리는 로비에서 또 마주쳤다.

다시 어색한 인사를 나누려다 나는

그녀를 얼른 안아버렸다.

"국장님, 여전히 너무 멋있으세요."

사실이었다.

그녀는 또래의 여자들에 비해

아주 젊어보이고, 전처럼 우아하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이루고 있던 그 찬란한 날들이 여전히 보인다.

조금은 살이 올랐고, 눈가의 주름도 전보다 짙어졌지만

그래서 더 멋있다. 그녀의 치열했던 과거가 고스란히 그녀에게 새겨져 있다.

"다음에 기회 되면 한국에서 보자.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어."


그렇다.

그래도 반가웠다.

우리는 서로 사라져야할 때를 지키지 못하고

기어이 만나버렸지만,

부디 서로 만나야할 때가 오거든

지금의 난감한 뒤끝은 티끌조차 없기를.

그 때에 우리 꼭 다시 만나게 되기를.


그녀의 새로운 시작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누구보다 멋지게 시간을 꾸려가며

언제나 나의 내일로 살아가줄 것을

나는 믿는다.

어깨를 마주하며 꾸었던 꿈은

우리 둘 다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 둘,

아주 멋졌던 때가 있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벅찬 인생이다.



청국장 찌개


국장님과 자주 가던 클라이언트 회사 옆에는 아주 맛있는 청국장집이 있었습니다.

회의 후, 클라이언트가 점심이나 하자고 하면 우리는 둘 다 청국장찌개를 외쳤었죠.

특이한 여자들이네! 하고 웃었던 클라이언트 앞에서 밥 한 공기를 싹 비워내며 끈끈한 동료애를 과시했던 기억은 여전히 유쾌하고 배부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집의 청국장찌개에는 고기가 들어가진 않았었지만, 저는 김치와 함께 소고기를 꼭 넣어 끓입니다.

고기에 스며든 청국장의 구수하고 짭짤한 맛은

아무리 건져 먹어도 물리지 않는 맛이죠.

이제는 둘째도 청국장 고기를 골라 먹어서, 더더욱 빼놓지 않고 넣게 되는 재료랍니다.


1. 김치를 송송 썰어넣은 물에 소고기를 넣고 끓입니다.

2. 고기가 얼추 익어가면, 두부와 파 마늘, 이번엔 느타리버섯도 함께 넣었어요.

3. 청국장을 듬뿍 넣어 끓이면서, 간은 된장으로 맞춰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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