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김치
열무김치를 담궜다.
"나는 아저씨 입맛이야!" 라며
열무를 잔뜩 넣고 고추장에 슥슥 비벼먹기 좋아하는 신이는
초여름에 담궈둔 열무김치를 야무지게 한 통 비워내었다.
계절이 바뀌는 냄새가 날 즈음이면 나는
이런저런 김치를 담그며 새로운 계절을 시작한다.
배추김치는 시어머니가 김장철에 잔뜩 해서 보내주시기에
봄에는 대파김치와 쪽파김치,
배추김치가 아슬아슬 남게되는 여름에는 열무김치, 고구마순김치, 그리고 얼갈이 김치,
가을에는 갓김치와 백김치, 겨울에는 깍두기나 석박지.
어느새 김치를 담그는 일은 나에게 계절숙제가 되었다.
나는 참, 계절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사계절의 모든 변화를 나만의 규칙으로 맞이하곤 했다.
일을 하다가도 창밖으로 봄이 느껴지는 날이면 나는
잠깐 일을 멈추고 하염없이 창 밖을 내다보고 나서야 마음이 진정되었다.
흐드러지는 벚꽃보다 내 마음이 더 흩날렸다. 떠오르는 추억마다 어울리는 노래를 들으며
노트를 뒤적여 글 하나를 써내려가거나, 회사 벤치에 나가 앉아 바람을 한참 맞고 나서야
그 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여름은 썬텐으로 맞이하곤 했다. 어디든 가서 가무잡잡하게 피부를 태워야
온 몸으로 여름을 환영할 수 있었다.
매년 휴가도 반납하고 일하던 시절이라, 어디를 딱히 돌아다니지는 못해도
옷을 입을 때마다 짙어진 어깨를 보는 것은 이 여름을 허투로 보내지 않았다는 만족감이 들곤 했다.
가을이면 예술의전당에서 막을 올리는 공연 하나쯤은 보고 지나가야 했다.
뮤지컬이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되었다.
서늘해진 바람 사이로 뉘엿해지는 해는 회색벽돌 사이로 도드라지게 예뻐서
공연장 앞 광장에서 한참을 앉아있게 만들었다.
겨울. 겨울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계절. 부츠가 좋았고 1년에 한 번 꺼내입는 아우터들이 설렜다.
한구석으로 밀려났던 부츠와 두꺼운 웃옷을 꺼내입고,
따뜻한 정종을 한 잔을 마시러 나서는 것으로 나의 겨울은 시작되곤 했다.
정종을 좋아하지는 않으나, 겨울의 문턱에서 한 잔 쯤은 꼭 챙겨 마셨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나른한 정신으로 잠이 들 때에
두툼한 이불을 코 아래까지 끌어올려
코 끝은 싸늘하고 몸은 푸근한 그 느낌을 물씬 만끽했다.
칼바람에도 안전한 나의 모든 세상들에 새삼스레 고마워져서 행복했다.
그 시절에는 정해지지 않은 내 인생이
그리도 버겁고 힘들었다.
하얗게 깨끗하지도, 그렇다고 멋드러지게 완성되지도 않은 어정쩡한 인생의 시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대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매 계절을 나만의 루틴으로 충실히 지내며 살고 있었다.
회사를 옮겨도, 남자친구와 헤어져도,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을 때에도,
계절마다 지키는 나의 규칙들은 나를 영영 내달리게 하지는 않게 했다.
그래도, 땅에 발을 딱 붙이고 한 해 한 해를 지나게 했고,
여름에는 가을을 그리며, 겨울에는 봄을 설레며
제법 행복한 법을 잊지 않고 살았었다는 것은
이제 와서야 돌아보며 깨닫게 된다.
아이를 낳고, 나의 계절은 새로운 규칙들로 바뀌었다.
봄에는 에버랜드, 여름에는 바닷가 여행, 가을에는 산, 겨울에는 스키장이나 눈썰매장.
아이들은 어느새 그 시절의 나처럼
여름해가 뜨거워지면 여행지를 물어왔고,
바람이 차가워지면 언제 눈썰매를 타러 가는지 손을 꼽아보곤 했다.
나의 계절맞이 행사들은 이제 아이들을 위한 시간으로 변했으나,
그래도 좋았다. 아이들의 즐거운 표정은
봄햇살보다 생그러웠고 겨울눈보다 폭신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랐고, 이제 그마저의 계절맞이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되도록이면
날이 좀 풀렸는데 에버랜드 갈래? 혹은
이번 연휴에 홍천 다녀올까? 하며 아이들에게 묻지만,
세 번에 한 번 꼴로 거절당하게 되는 아이들의 바쁜 스케쥴은
더 이상 내 고집만으로 이어갈 수는 없다.
창 밖의 벚꽃을 보며 그 기분에 맞는 노래에 흠뻑 취하는 시간은
이제 내 나이에는 좀 머쓱한 일이 되어버렸다.
내 감상을 아이들 챙기는 일보다 앞에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예술의전당 공연장 앞 광장에서 가을노을을 바라보던 시간은
어느새 아이들 저녁을 챙기고 설겆이를 하느라 가장 바쁜 시간이 되었으며,
긴 부츠보다는 편한 옷에 어울리는 어그슬리퍼를 끌고 나가는 것 일이
더 익숙한 삶을 살게 되었다.
나의 계절맞이가 이렇게 수그러 들었다는 것은
때로는 내 삶이 온통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계절숙제를 챙겨야 하는 것도 슬픈 일이었다.
하고픈 일보다 해야할 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내가 되어
계절맞이 대신 계절숙제를 채워가며
야채를 절이고, 양념을 버무려 김치를 만드는 것이 씁쓸하기도 했다.
유독 바쁜 사정이 생기거나, 몸이 천근만근 내려앉는 때에도
고구마순을 벗기고, 쪽파를 다듬어야 한다는 생각은
한숨 끝을 길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올 여름 초, 그 때가 그랬다.
영이 때문에 몸도 맘도 여유가 없던 때라
겨우 한 통 남은 배추김치를 모른척 하고만 싶었다.
봄에 담궈둔 쪽파김치는 비워진지 오래이고, 대파김치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정말 하기 싫은 숙제를 해치우듯
눈을 딱 감고 열무를 주문하고 홍고추를 시켰다.
도착한 재료들을 부엌 가득 펼쳐놓으면
나의 꾀도 더 이상 고집부리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리라 여겼다.
해 보면 사실, 큰 일도 아닌 것을.
주말 아침 휘리릭 담궈내어 하룻밤 새큼하게 집 안에서 익힌 후,
다음 날 저녁 식탁에 올린 열무김치는
신이를 환호하게 만들었다.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엄지 척을 연신 올렸다.
곁들여낸 국 대신 열무김치 국물을 사발째 들이마시는 신이의
꿀꺽꿀꺽 소리는 잠시 한숨이 길어졌던 나를 미안하게 만들었다.
올 여름은 유독이나 신이가 열무김치를 자주 찾아서
(어쩌면, 매년 하던 고구마순 김치를 건너뛰었기 때문일수도 있지만)
열무국수, 열무비빔밥, 열무냉면 등 신이가 좋아하는 메뉴를 잔뜩 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두고두고 내 마음이 기뻤다. 신나서 수북하게 먹는 신이를 볼 때마다
눈 딱 감고 열무를 주문했던 초여름의 나에게
늦게라도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열무김치가 벌써 동이 났다는 것을 아쉬워하는 신이를 위해
다시 열무를 주문하고, 배추와 생강과 오이등을 사며
나는 문득 알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매년 해오던 이 계절숙제는 사실
아이들의 부지런해진 젓가락질만으로도
나에게 그 어느 시기의 계절맞이보다 충만한 행복이라는 것을.
계절 빼곡히, 삼시 세끼 때마다
나에게 주는 선물같은 일이었다는 것을.
열무김치와 함께 건너뛰려던 얼갈이김치도 담궜다.
영이가 척척 올려먹으며 좋아하는 김치다.
신이처럼 표현이 맣은 아이는 아니지만,
밥술마다 김치를 얹어먹길래 "너가 좋아하는 김치지?" 하니
"응. 맛있네." 대답을 한다. 그것으로 되었다.
이제 가을.
영이가 유별나게 좋아하는 갓김치를 담글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쨍하게 새큼해진 갓김치는
올 여름의 열무김치처럼 이 가을을 꽉 채워 풍만하게 해 줄
계절맞이가 되어줄 것이다.
갓김치를 담근지 몇 해만에
조금 더 단단하고 여물어진 갓을 기다리는 내 마음이 설렘으로 바뀌었다.
아이가 없던 때에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를 지나,
내 인생은 아마도 새로운 시기가 되었나보다.
앞으로의 사계절마다
해치우는 숙제 대신, 맞이하는 기쁨을 만끽할 생각에
기분이 한껏 들뜬다. 나의 새로운 계절맞이가 시작되고 있다.
열무김치
여름이면 아삭하게 입맛을 돋구는 열무김치입니다. 열무김치 또한 재료손질에 손이 많이 가서 그렇지, 사실 그닥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어요.
큰 통으로 가득 담궈놓으면, 여름내내 비빔밥이나 국수등등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은 음식이 되어줄거에요.
열무이파리가 너무 많으면 보기에 깔끔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이파리 부분은 잘라내어 열무된장국이나 샐러드로 이용하고, 줄기 위주로 사용한답니다.
그리고, 시원한 맛을 위해 고춧가루는 넣지 않고 홍고추로만 만듭니다. 오이와 무우도 썰어넣구요.
1. 열무를 깨끗이 씻어서 새끼손가락 길이로 잘라주고, 오이, 무우, 배추도 비슷한 길이로 썰어서 다같이 소금이 절입니다. 열무는 연해서 3,40분 정도만 절이면 됩니다. (오이는 물러지기 때문에 4등분 정도로 큼직하게 넣습니다. 먹을 때에 세로로 4등분을 그때그때 합니다.)
2. 홍고추, 생강, 마늘, 무우, 양파, 새우젓, 그리고 식은밥을 넣고 믹서기에 돌립니다. 너무 빡빡할 경우 멸치액젓을 조금 부어서 갈아줍니다.
3. 절여둔 야채를 잘 씻어준 후, 김치가 잠길만큼 물을 부어준 후에 갈아둔 양념과 액젓, 그리고 매실액으로 마무리 간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