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pport, 그 아름다운 말

by 친절한 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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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의 합병증으로 망막이 전부 박리되어 내게 망막 수술을 받았던 62세 남자 환자 분. 최선을 다해서 수술했지만, 망막에 수술 후 나쁜 조직이 생기면서 망막이 다시 떨어지는 (증식성 유리체 망막병증)이 발생한 상황. 망막 수술을 하는 의사가 맞이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 이런 상황이 오면 의사의 마음 속엔 여러가지 마음들이 생겨난다. 눈을 잘 모르는 환자 앞에서 환자의 눈 상태를 핑계 대고 싶은 마음, 나보다 경험이 많은 의사에게 그 눈을 부탁하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 그리고 어떻게든 내가 이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은 공명심까지.


존경하는 은사님은 “수술 결과가 안 좋을수록, 보기 싫은 마음이 들수록, 환자를 보고 설명하고 또 보고 또 설명하고 해야지. 수술 결과가 안 좋은데 의사가 외면하면 그 사람은 어디에다 얘기하나?” 라고 하셨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안 좋은 수술 결과를 설명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특히 은사님이 계셨던 국내 최고의 대학 병원이 아닌, 동네 의원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사실을 어디까지 전달해야 하는지, 앞으로의 계획을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예후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그리고 같은 내용이라도 환자의 마음이 다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한 군데 버무려져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에 손 끝이 달달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나는 환자분과 그를 둘러싼 5명의 가족 분들 앞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다.


“최선을 다 했지만 망막이 다시 떨어졌습니다. 재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또 다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참 송구합니다. 제가 재수술을 해도 최선을 다 할 테지만, 제가 못 미더우시면 저보다 경험이 많은 분께 의뢰를 해드리겠습니다”


정말 긴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환자 분께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해 주이소.”


순간 또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나를 끝까지 믿어준 환자 분에 대한 감사함, 이번에야말로 잘 준비 해야겠다는 다짐, 나 말고 다른 의사에게 갔으면 했던 아쉬움, 망막이 또 떨어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등. 두 시간 반이 넘는 재수술 끝에 다행히 망막은 잘 붙었고, 세극등 너머로 본 환자 분의 눈에는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다. 누구보다 환자의 눈을 생각했던 간절한 내 마음도 환자의 깨끗한 망막에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의사는 환자와 함께 질병과 싸우는 사람이다. 어려운 고비를 함께 넘기면, 의사와 환자는 누구도 깰 수 없는 강력한 관계 (rapport)를 형성하게 된다. 이 관계는 함께 고생했던 의사와 환자 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며,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종착지이다. 그런데, 점점 이런 관계를 갖기가 어려워진다. 환자들은 조금만 결과가 안 좋으면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고, 책 잡히기 싫은 의사들은 최소한의 설명을 하면서 도망갈 궁리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비용이 지출되게 되고,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점점 멀어진다. 멀어진 관계는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크나큰 손해로 돌아온다.


안과야 최악의 결과는 수술한 눈의 실명이지만 (다행히도 눈알은 두 개다), 치료에 따라 환자의 생명이 오락가락 하는 내과/외과 선생님들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 운이 좋게도 책임이 눈알에 한정되는 안과를 한 나는, 필수 의료를 하시는 분들이 갖는 고민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안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rapport로 자부심에 차 있어야 할 그 분들이, 절망감에 일터를 떠나야 하는 이 현실이 참 서글프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언젠가 우리 나라의 모든 필수 의료 의사들이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환경이 되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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