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과 이해

by 친절한 손원장



아버지가 막 성인이 된 20살의 나에게 하셨던 말씀이 있다.


“컴퓨터에는 ‘읽기 전용 메모리 (ROM: read only memory)’가 있어. 사용자가 뭘 하든지 상관 없이 전원을 키면 실행되는 거야. 그런데 빚이 꼭 그 메모리 같아. 나는 오랫동안 빚을 지고 있어서, 아침에 눈만 뜨면 그 생각이 나.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 때도 그 생각이 나. 가족이랑 어디를 놀러가도 그 생각이 나. 너희는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른이 넘어서 부모님과 함께 간 일본 여행에서 어머니께 옷을 선물하려 나를 나무라는 아버지와 크게 다투었다. 아울렛에 있던 몇 만 원 짜리 옷, 그것도 고된 인턴이 끝나 어머니에게 치마 하나 선물하려는 나를 아버지는 허투로 돈을 쓴다고 비난했다. 수십년을 억눌렸던 무언가가 폭발해서 였을까. 나는 태어나서 가장 큰 목소리로 아버지와 다투었고, 어렵게 시간 내어 갔던 가족 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아버지는 그 순간부터 여행이 끝날 때까지 식사를 한 끼도 안 드셨다.


어렸을 때 나는 결핍이 극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이겨내야 하는 장애물이고, 넘지 못한 사람들의 아우성을 나약함으로 치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가 생겨 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고, 마흔이 넘으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인생도 돌아보게 되니, 결핍은 당사자들에게는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타인에게는 이해의 대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바로, 결핍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생각을 가두는 보이지 않는 창살이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상경한 아버지는 수 십년을 큰 부채에 시달렸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압박은 눈을 뜨는 모든 순간에 (어쩌면 눈을 감는 순간에도) 아버지를 조여 들었을 거다. 당신이 수십억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매월 수 천만원의 이자를 감당해야 한다면 머리 속은 빚으로 가득 차게 된다. 생각한다고 달라지지도 않는 빚은 마치 언제나 존재하는 중력처럼 머리의 한 부분에 웅크리고 있어, 새롭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로 막는다. 그렇게 수십년의 시간이 흐르면 나중에는 그 결핍이 해소되어도, 자신을 가두던 그 창살 밖으로 날아오르기 어렵게 된다. 더 이상 부채에 시달리지 않는 아버지께서도 마음 놓고 뭔가를 사서 즐기시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결핍의 대상은 돈이 될 수도 있고,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이 될 수도 있다. 결핍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미래를 향해 노력해 결핍을 극복하라 조언하면, 십중팔구 “너는 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거야”는 볼멘소리가 돌아올 거다. “몇 만원짜리 치마 한 쪼가리가 그렇게 아깝습니까?” 라는 나의 말은, 절대 아버지의 마음에 가 닿지 않았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지갑을 열지 않았던, 아침에 눈 떠 잠드는 순간까지 부채를 떠올렸던 아버지의 힘겨운 시간들을 부정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창살 안에 갇혀 있던 아버지가 쳐주신 울타리 안에서, 나는 큰 결핍 없이 클 수 있었다. 물론 아이를 키우고 사업을 하며 생긴 부채가 늘 나를 조여오지만, 많은 걸 가진 내가 감히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결핍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결핍, 적어도 그 결핍으로 괴로웠던 그들의 시간을 부정하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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