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에서 열매를 따먹으며 생존하던 우리 조상은, 지상으로 내려와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집단 생활을 해야 했다. 사자 같이 강력한 이빨과 발톱도 없고, 독수리처럼 날개도 없기 때문에, 인간은 집단을 이루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집단 생활을 하려면 서로가 서로의 의도를 파악해야 했다.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남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게 되고, 본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추어’ 남의 마음을 추론해야 한다. 이렇게 1500만 년 전에 등장한 영장류는 무리지어 살면서 자신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분리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두뇌 피질에 granular prefrontal cortex(gPFC)라는 곳이 발달한다. 이 곳은 포유류의 피질에는 없는 영장류에서만 나타난 부위인데, 남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떠올릴 때 활성화 되는 곳이다. 타인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생각하는 부위가 같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집단은 나와 타인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집단을 뭉뚱그려 생각하지 않고 타인과 나로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타인이 어떤 마음일지 상상하기 위해서는, 그 상황에서 ‘나는 어떤 마음일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해부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타인과 자신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는 부위가 같다는 것은 타당하다.
그런데, 남의 마음과 나의 마음을 생각할 때 사용되는 뇌 부위가 같다는 것은 큰 함의를 갖는다. 어쩌면 남의 인생을 사는 것과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 병립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을 수 있다. 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민하는 동안에는,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민할 수 없다. 다른 사람 생각에 뇌가 점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진짜 내가 멀 원하는지 고민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큰 관심이 없다. 스스로의 마음에 뇌 피질이 점유되어 있으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민할 수 없다. 다른 사람 생각에 쓸 뉴런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해부학적으로도!) 남의 인생을 사는 것과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동시에 할 수가 없다.
모두가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지만, 자신의 마음을 알아내는 길은 매우 고되고 외롭다. 생존을 위해 타인의 마음을 우선 읽어야 했던 1500만년의 진화를 역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나 밖에 없기 때문에, 나를 향한 여행은 이정표도 없고 지도도 없다. 함께 가는 이도 없다. 왜 가야 하는지도 본인이 찾아야 하고, 가다가 주저 앉는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누군가는 조롱한다. 쓸 데 없는 고민하지 말고 현실을 살라고. 지금 당장 즐겁고 행복하면 되었지, 왜 혼자 심각하고 멋있는 척 하냐고.
그래도 우리 모두는 반드시 자신 만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여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모두의 영혼은 예외 없이 허무의 벽에 부딪혀 산산히 부서진다. 단 한 번 밖에 없는 소중한 삶의 시간을,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고민하는데 쓰는 것은 너무 아깝다. 찰나만 존재하는 우리 영혼이, 다른 영혼을 기웃거리다 꺼져버리는 건 슬픈 일이다.
스스로 사는 삶은 매 순간이 설렌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내 안에서 무엇이 흘러나오는지, 그것을 어떻게 펼쳐 보일건지 고민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큰 하얀 도화지가 매일 눈 앞에 펼쳐지는 셈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유’라는 말의 뜻도 결국, “스스로 말미암다”라는 뜻이다.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 무언가 대로 시간을 쓰다 가는 것이 바로 자유다.
“데미안(헤르만 헤세)”의 서문에 이런 말이 쓰여있다.
Ich wollte versuchen, das zu leben, was aus mir heraus wollte. Warum war ich denn überhaupt da, wenn ich es nicht versuchen sollte?
(나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아보려고 했다. 내가 그것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