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다윈은 진화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다윈이 서양 사상을 송두리째 뒤 흔들었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환경에 더 적응하게 돕는 형질이 유전된다는 사실이, 어떻게 해서 서양의 철학을 통째로 뒤 흔들었을까?
다윈의 생각은 너무 단순하고 명료하다. 그의 진화론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1. 생물은 서로 다르고, 이러한 변이는 유전된다.
2. 생물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수보다 많은 자손을 낳는다.
3. 환경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변화한 자손은 살아남는다. 즉, 환경에 맞는 변이가 자연에 의해 선택(‘natural selection’) 되고, 축척된다.
환경이 변하는 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금이 빙하기와 같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생물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수 보다 많은 수의 자손을 낳는다는 걸 부인할 수도 없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생물도 남아있지 않을테니) 마지막으로, 환경에 맞는 생물이 살아남는 걸 부인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살아남은 생물은 환경이 요구하는 방향의 변이를 축적한, 자연에 의해 선택된 생물이라고 볼 수 있다.
환경이 변화하는데 있어 과연 방향이 있을까? 모든 생물이 인간처럼 ‘고등’하게 진화하려고 했지만 못했기 때문에 지구를 지배하지 못한 것일까? 스스로를 성찰하고 우주를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은 과연 누군가의 계획과 자비로 만물의 영장의 위치에 오른걸까? 다윈에 따르면 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다. 빛이 없는 동굴에서 눈을 퇴화시킨 박쥐는, 인간처럼 카메라 눈을 갖지 못했다고 해서 열등하지 않다. 그냥 어두운 자연이 선택한 박쥐들이 눈 대신 초음파를 썼을 뿐이다.
다윈의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 인간은 이성을 완성하는 목적을 갖고 태어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에 수천년 동안 젖어 있던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인간의 모습을 본 따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고 죄 많은 인간을 사하여 주려고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찬양하던 기독교도들은 얼마나 다윈이 괘씸했을까?
다윈의 진화에는 ‘정신’이 없다. 우연과 경쟁, 그리고 적자 생존의 반복에 인간 정신의 위대함이 끼어들어갈 틈은 없다. 인간 정신도 결국 물질이 만들어내는 상태라는 유물론적 세계관은 다윈의 거대한 도약을 반겼다. 영혼이 설계된 것이 아닌 진화의 산물이라면, 수 천 년간 우리를 지탱하고, 때로는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게 만들었던 ‘신’의 존재도 연기처럼 사라진다.
다윈은 말한다. 애초에 목적이나 방향이란 건 없다. 우주는 당신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고, 지금 이 글을 보는 당신이 세상에서 숨쉬고 있는 것은 우연의 누적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목적과 방향이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