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안과 4년차이던 2016년.
당시 구글의 알파고는 이세돌과 세기의 바둑 대결 중이었다. 바둑은 경우에 수가 너무 많아 절대 컴퓨터가 이길 수 없을 거라는 바둑 고수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자랐던 나에게, 인간 최강 바둑 기사 이세돌의 완패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언론 어느 곳에서도 알파고가 “어떻게” 바둑을 잘 두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직접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로 했다.
내가 했던 일은 구글 딥마인드 사에서 알파고를 만든 하사비스 씨의 논문 (알파고의 작동 원리를 담은)을 구해 읽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무슨 말인지 한 개도 이해할 수 없었다. CNN, hidden layer, back propagation… 내가 1년 차 때 안과에 와서 처음 펼쳐진 망막을 봤을 때의 느낌이었다. 그런데, 인공 지능에 대한 책들을 찾고, 하사비스 씨의 논문을 열 번 이상 읽고 또 읽어보니 먼가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논문의 내용이 이해가 되어 갈 때 즈음 내 심장은 쿵쾅쿵쾅 두근거렸다. 그 때 내 마음이 두근거렸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 인생에 안과 의사와는 전혀 다른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의학 연구의 방향마저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공 지능이 바둑에서 승기가 높은 수를 찾는데 인간보다 탁월하다면, 망막 사진에서 높은 확률의 치료를 찾는 데에서도 인간보다 탁월할 수 있다. 물론 인공 지능이 “왜” 그런 답을 찾았는지는 hidden layer에 숨어있기 때문에 절대로 알 수 없다. 기존 연구가 가설을 세우고 데이터로 입증을 했다면, 인공 지능을 이용한 연구는 인공 지능이 데이터를 보고 답을 주고, 인간이 거꾸로 왜 그게 답인지 가설을 세워야 하는 형태로 바뀔 수 있었다.
당시 우리병원 전공의는 1달에 한 번 최신 안과 저널을 발표해야 했다. 나는 지도 전문의 선생님의 허락을 얻고 하사비스 씨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향후 의학 연구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전공의 따위가 감히) 의견을 내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그 때 의국 분위기가 어땠을까? 다행히 혼나지는 않았지만 나는 말 안 통하는 혹성에 혼자 던져진 느낌이었다. 전문의 선생님들께서 별 다른 말씀은 없으셨지만, ‘저 녀석 4년차 되더니 요새 좀 한가한가? 알 수 없는 (혹은 쓸데 없는) 짓을 하네..’ 정도의 반응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만 33살의 나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기지 않아 기분 전환 겸 미국에 한 번 다녀오자는 이야기가 우리 부부 사이에 있기도 했고, 안과 수련 전에 군대도 다녀온 터라 반드시 전임의 (펠로우) 과정을 이어서 밟을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나는 미국 의사 자격증 (USMLE certificate)도 있었다. 전문의 시험이 끝나고 딱 하루, 만 24시간 동안 미국에서 인공 지능을 공부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MIT에서 인공 지능 공부를 하고, 실리콘 밸리에서 창업을 하고, 보스톤으로 돌아와 어느 멋진 집에서 아이들을 낳고 사는 일장 춘몽...
개꿈 꾸는 것은 정말 행복했지만 막상 실행을 하자니 너무 막막했다. 그리고 인턴 후 원하는 과에 낙방했던 나는 서해 바다에서 배를 타면서 남들보다 뒤처진 다는 공포에 쩔쩔매 보았다. 실패가 두려웠던 나는 결국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안전한 경로, 전임의를 해서 수술 기술을 배우는 길을 걸었다. 나는 선배들이 했던 길을 열심히 걸었고 그리고 그 결과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지도 전문의’ 중의 하나가 되어 여기에 있다.
그 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알파고가 나왔을 때는 분명 인공 지능의 태동기였다. 그리고 안과와 협업하는 회사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개꿈처럼 미국에서 성공했을까? 반대로 아무 준비 없는 도미 (미국으로 건너감)로 처절한 실패 뒤에 돌아와 늦은 나이에 전임의 과정을 다시 했을까? GPT 가 그림과 영상을 만들어주고, 모두가 인공 지능과 대화하는 지금을 보면서, 만약 내가 그 때 과감한 도전을 했다면 그래도 뭔가는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언젠가 새로운 기회가 내 인생에 한 번 더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