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용두동
나는 9년간의 프랑스에서의 체류 후, 귀국하여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자리를 잡았다. 용두동은 다가구주택, 단독주택 등 저층 건물들이 바둑판 형태로 짜여진 동네다. 이런 식의 동네들이 60~80년대에 대량으로 생겨났는데 용두동도 그 중 하나이다. 벽돌로 이루어진 낮은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노년층, 널브러진 쓰레기봉투, 길고양이 등, 고즈넉한 서울의 풍경을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다가구주택건물에서 나와 청량리역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최근에 신축된 초고층 아파트 그라씨엘이 나타난다. 용두동과 그라씨엘 단지는 말 그대로 인위적으로 나뉘었다. 용두동의 마지막 블록을 넘는 순간 바닥의 재질이 바뀌고 고즈넉한 동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그라씨엘의 현대적 입면과 그 앞의 잘 관리된 조경, 그 사이를 오가는 세련된 옷차림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완전히 다른 두 풍경이 코를 맞대고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더 걸어서 대로변을 건너면 롯데캐슬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곧 삼각형의 공개공지가 나타난다. 이곳엔 아파트주민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본 도시공간 중에서 가장 사회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담벼락과 옹벽으로 막혀있는 예전의 나 홀로 아파트단지와 달랐다. 내가 떠나 있던 시간 동안 한국의 아파트건축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비둘기가 많다는 것만 빼면 확실히 머물기에 쾌적한 도시공간이다.
이곳을 지나 청량리역 쪽으로 더 걸어가면 청량리 롯데백화점이 나타난다. 이곳에선 내가 10년 전 겪었던 한국의 모습이 다시금 나타난다. 롯데마트 내부에 위치한 ABC마트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맸는데 마트 입구를 찾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했다. 헤매는 동안 홀로 선 백화점건물 주변을 맴돌았는데 을씨년스러움 그 자체였다. 겨우 입구를 찾아 백화점 내부에 들어섰다. 오렌지색 조명의 백화점 내부엔 매장들이 빽빽이 들어서있다. 손님은 적은 편이었다. 지나갈 때마다 호객행위를 하는 직원들은 예나 지금이나 부담스러웠다. 텅텅 빈 매장에 비해 푸드코트와 카페엔 사람들이 들어차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백화점 주변과 이러한 내부풍경의 대비는 10년 전과 똑같았다. 2000년대 초에 한창 유행이었던 쇼핑몰 건축의 현 모습인 것이다.
백화점을 나와 커피를 마실 요량으로 전에 점찍어뒀던 그라씨엘 1층상가의 투썸카페로 향했다. 탁 트인 공개공지 앞에 위치해서 눈에 띄었고 매장이 커서 자리 잡고 작업하기 좋겠다 생각했다. 들어갔지만 자리가 없었다. 노트북을 켜고 작업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 사람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한가 보다. 주변에는 투썸을 제외하고 전부 테이크아웃 위주의 카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카페자리가 없어서 돌아다니게 될 줄은 몰랐다. 노상카페의 천국인 파리가 그리워질 정도였다.
몇 분을 배회하다 결국 용두동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고층 아파트단지에서 다세대주택촌으로 들어서며 느낀 휴먼스케일 때문인지 곧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편해졌다. 근처 이디야로 향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었다. 용두동에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중년층 그룹은 대화를 하고 있고 사회초년생으로 보이는 몇몇 젊은 사람들은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길 건너엔 푸른 나무로 둘러싸인 용두공원이 있었고 그곳에서 운동하는 노년층이 보였다. 불과 10분 만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파리 전체를 치더라도 도시풍경은 네다섯 가지 타입으로 함축될 것인데, 나는 이곳에서 도보로 15분 내외가 걸리는 원 안에서 그 이상의 타입을 보았다. 고즈넉한 다가구•단독주택촌, 세련된 모습의 초고층아파트,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공개공지, 을씨년스러운 백화점 주변과 화사한 백화점 내부, 초록빛의 한가로운 공원. 신기하면서도 이게 서울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