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성수동
공업단지였던 동네가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바뀌었다는 성수동, 전부터 가고 싶었기에 시간을 내서 가게 되었다. 성수역 3번 출구에서 나와 메인거리로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인파와 마주했다.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걸어오고 있었고 유명한 팝업스토어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뭘 파는 가겐가 싶어 눈길을 돌렸지만 간판이 없는 경우도 있었고 있어도 뭔지 감이 안 갔다. 거리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건물 층수가 낮아 많은 인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탁 트인 느낌이었다. 여전히 적응 안 되는 8월 오후의 열기와 습도 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걷는 동안 주변에서 간간히 외국어가 들렸고, 혹 프랑스어가 들릴까 귀 기울여보기도 하고 한글로 쓴 프랑스어 간판을 찾아보기도 했다.
첫 번째 교차로에 다다르자 대림창고 건물이 나타났다. 대림창고는 상가로 리노베이션 되어 성수동을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이다. 옛 공장을 짐작케 하는 삼각박공지붕과 오래되어 때가 타고 마모된 붉은 벽돌 마감이 현대적이고 깔끔한 광고판과 어우러지며 색다른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비로 맞은편에는 삼각지붕의 단독주택을 연상케 하는 형태에 전체가 유리로 덮여 현대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는 카페시테 건물이 내 눈길을 끌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건축스타일이 대로를 끼고 미묘한 긴장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리노베이션 된 대림창고가 새로 들어온 경력사원이라면, 신축된 카페시테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신입사원이랄까.
좀 더 걷다 보니 흰색 벽돌로 마감된 3층짜리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시간이 지나 흰색이 노란빛을 띨 만큼 유지 보수가 잘되진 않았지만 꽤 특징 있는 입면을 가지고 있었다. 각 베이마다 미묘하게 굴곡지며 살짝 돌출된 연속된 볼륨들이 1930년대 파리의 보우윈도우 스타일을 떠올리게 했다. 또 각 보우윈도우의 하단에는 수직으로 쌓은 벽돌 디테일이 더해져 구조적으로 안정된 인상을 주었다. 언뜻 보기엔 무심코 지나칠 법한 평범한 건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꽤 강한 특징을 가진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으로 나의 눈길을 끈 건물은 어두운 색 마감의 4층짜리 건물이었다. 창들의 위치와 크기가 모두 제 각각이지만, 이러한 무질서 속에서 3층과 4층을 가로지르며 가장자리장식(Encadrement)을 가진 커다란 창문이 입면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 이는 나로 하여금 20세기 초중반에 파리에 성행했던, 큰 창으로 특징되는 아티스트 아틀리에(Ateliers d'artistes) 건축을 떠올리게 했다.
대로를 벗어나 골목길로 접어들지 대부분의 건물들이 벽돌마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빨간 벽돌로 마감된 3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각 베이가 움푹 들어가서, 사이사이에 기둥이 배치된 느낌을 들었다. 이는 고전, 근현대를 통틀어 서양건축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건축요소 중 하나인데 프랑스어로 필라스트르(Pilastre)라고 한다. 필사스트르는 구조적 기능을 하지 않는 장식 기둥을 일컫는다. 우리나라 근현대건축에서도 같은 원리가 쓰인 셈이다. 입면은 필라스트르 덕분에 강한 규칙성이 느껴졌다. 강한 규칙성 속에서도 레트로한 간판과 세월을 보여주는 얼룩, 때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며, 자유분방한 분위기 역시 느껴졌다.
이렇게 여러 건물들을 감상하고 동쪽 일대를 한 바퀴 돈뒤, 다시 대로로 돌아와 남쪽 방향으로 쭉 걸어봤다. 거리가 조금씩 한산해지기 시작하더니 탐앤탐스가 있는 교차로를 기점으로 거리가 텅텅 비기 시작했다. 행인이 전혀 없었고 가게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노년층만들만 보일 뿐이었다. 나름 먹자골목인데도 말이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다시 대로를 따라 성수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한 5분을 걸으니 서쪽, 그러니까 연무장길에서 엄청난 인파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곳은 일반적인 서울의 먹자골목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요깃거리를 찾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5분 전에 지나왔던 노년층만들만 있었던 동네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나는 연무장길에서 어느 골목길로 빠졌다. 그러자 일순간에 식당간판과 사람들이 사라지고 조용한 다세대주택촌 풍경이 나타났다. 붉은 벽돌로 마감된 낮은 건물들이, 뭔가 작당을 꾸미는 개구쟁이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건물들은 각각 다른 톤의 붉은색을 띠었고 특징적인 입면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건물은 돌출 벽돌 쌓기, 두 번째 건물은 거대한 보우윈도우, 세 번째 건물은 무표정한 측벽을 통해 각자의 개성을 뽐내고 있었고, 함께 공존하며 꽤 특징적인 동네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2번 출구 쪽으로 넘어갔다. 초입길에 3번 출구 쪽에서 봤던 화장품, 브랜드 등의 광고판이 그대로 있어서 같은 곳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광고판이 장소의 아이덴티티에 결정을 줄정도로 우리나라의 거리의 광고는 과다하다.
초입길을 지나자 거리가 훨씬 한산해졌다. 사실 이곳은 아직 영업 중인 공업사들이 꽤 있었고, 그로 인해 예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밖에도 거리에서 속속 보이는 폐지 리어카, 공업자재 등 여러 물건들이, 나들이나 데이트와는 거리가 먼, 삶의 현장을 느끼게 했다. 건물들은 3번 출구 쪽과 비슷한 스타일이었지만 리노베이션이 되지 않아 날것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역을 사이에 두고 2번 출구 일대와 3번 출구 일대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성수동은 둘 중 어디에 더 가까울까.
나는 성수동의 오래된 벽돌 건축에서 옛 서울의 고즈넉함을, 현대 건축에서는 한국의 세련된 미를 느꼈다. 이 두 건축은 이질적이지만 부드러운 대립을 통해 장소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점이 성수동을 유명한 장소로 만든 여러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지 않을까.
사실 나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입면디자인이 특징 없이 무표정하거나 촌스럽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곳 성수동에서 건물들이 각자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으며, 이는 장소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는 걸 몸소 느꼈다.
성수동 핫플과 그 주변 지역의 온도차 역시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성수동 핫플이 주변의 인파를 빨아들인 건지 원래 그런 건지는 알 수가 없지만, 탐앤탐스 교차로를 기점으로 완전히 끊기는 방문객의 발길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서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옛 성수동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2번 출구 일대와 핫플인 3번 출구 일대의 강한 대비도 인상 깊었다. 2번 출구일대에는 공업사, 폐지리어카 등과 함께 옛 시절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에 비해, 현대적인 광고판 및 간판, 다양한 상가, 신축건물들이 틈틈이 녹아있는 3번 출구일대는 2번 출구 일대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장소로 변화해 있었다. 건축 외의 여러 요소들 역시 장소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준다는 걸 알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