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로마
나는 프랑스에 9년간 머무는 동안 한국에 총 두 번 들어왔었는데 모두 8월이었다. 들어올 때마다 생지옥 더위를 겪고 돌아가곤 했다. 귀국 전 단단히 각오를 하고 돌아왔지만 한국의 더위는 역시 만만치가 않다.
한국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유럽에서 보냈던 여름들이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벌써 2년 전인 로마의 여름이 유독 생생하다. 말도 안 되게 강한 지중해 태양빛을 피하기 위해 그림자만 찾아 걸어 다녔었고, 파리의 에스프레소보다 훨씬 진한 이탈리안 에스프레소에 반해 하루에 몇 잔씩 마시다 그날 밤을 지새우기도 했었다. 분수대를 찾아 목을 축인 후, 그 물로 수채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각각 다른 성격과 분위기를 지닌 동네를 돌아다니며 느꼈던 생각과 감정들을 메모하던 순간들도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무더운 더위로 답사를 계속 미루고 있는 요즘, 그때의 메모와 그림을 꺼내 지난 기억을 곱씹어 보려 한다.
여행의 시작은 여행 그 자체만큼 뚜렷하다
새벽 3시 50분, 알람 소리에 깼다. 깼다기보다는 그냥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여행의 설렘에 들뜬 기분 때문인지, 아니면 전날 점심에 직장동료들과 마신 증류수로 인한 숙취 때문인지, 어쨌든 한숨도 못 자고 이불만 뒤척이다 침대에서 나왔다. 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누워 있는 내내 비가 온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나갈 때는 그치길 바랐다. 하지만 빗줄기는 새벽 동안 더 거세졌다.
택시를 타고 파리 외곽에 위치한 포르트 드 마이오로 향했다. 보배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는 곳이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정류장에서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내리고 말았다. 건물블록을 한 바퀴 돌면서 한 클럽 앞을 지나쳤는데 주말 파티를 즐기는 파리지앵들이 있었다. 모두 취해 있었고 빗속에서 큰 소리로 대화하며 밤샘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공항버스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그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했고 버스 앞에 줄을 섰다. 불안함이 사라지면서 집을 나설 때보다 좀 나은 기분이 들었다. 버스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피곤함에 시큰거리는 두 눈을 깜빡이며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초록과 갈색의 땅
비행기 창문 너머로 본 이탈리아 땅은 초록색과 옅은 갈색이 얼룩덜룩 섞인 추상화 같았다. 땅에 가까워지면서 나는 그 강렬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초록색은 내가 알고 있던 파릇파릇함이 아닌 거침이었으며, 갈색은 새싹이 돋는 부드러움보다는 불모의 땅을 느끼게 했다. 이곳은 강한 지중해 햇빛과 함께해 온 강인한 땅이었던 것이다. 확실히 프랑스와는 다른 결이었다.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민족이 살아왔고,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까. 땅을 밟기도 전에 머릿속이 다양한 상상으로 가득 찼다.
공항을 나오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8월의 강한 태양과 함께 나를 반겨주었다. 애초에 걱정했던 더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나는 트램을 타고 시내로 들어서며, 도시의 스케일을 느꼈다. 이곳의 건물들은 규모가 컸다. 각 층의 층고가 거의 3미터 이상은 되어 보였다. 대부분 건물의 파사드는 파리에 비해 꽤 심플한 편이었다. 장식 들어간 창틀, 보싱, 여닫이 셔터 등을 제외하면 장식은 거의 없었다. 대신 오렌지, 빨강 등의 색으로 칠해진 파사드는 지중해의 강한 햇빛을 반사하면서, 도시를 알록달록 물들였다.
광장의 도시
나는 역 광장을 벗어나 그늘진 골목길로 들어갔다. 로마의 건물들은 파리에 비해 높은 편이었지만, 길들은 골목길 수준으로 훨씬 좁았다. 이런 경우 거주자 입장에서 내부의 채광과 조망이 매우 나쁠 것이다. 대신 방문객 입장에선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걸으며 아기자기한 옛 도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일반적인 유럽 도시의 구시가지에서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거대한 빈 공간에 도착, 아니 빈 공간으로 빠져나오게 된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바뀌는 공간의 분위기에 자연스레 걸음을 멈추게 된다. 이 공간이 바로 ‘광장’이라 불리는 곳이다. 로마는 내가 지금까지 방문했던 유럽도시들 중에서 골목길에서 광장으로 진입하는 방식이 가장 극적인 도시였다. 장식 없이 소탈한 입면으로 이뤄진 건물들이 마주 보는 비좁은 골목길에서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 등의 건물들이 들어선 거대한 스케일의 광장으로 도착하던 순간들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로마에서 나의 첫 번째 광장은 산 이냐치오 광장이었다. 눈부시고 강한 햇빛, 시고 달달한 오렌지색, 매끈한 돌바닥. 이름 모를 골목길에서 이곳 산 이냐치오 광장으로 들어서며 받은 느낌이었다.
광장을 둘러싼 오렌지색 건물들은 강한 햇빛을 받으며 나로 하여금 시고 달달한 맛을 느끼게 했다. 오목한 형태의 건물들은 이제 막 껍질을 까서 떼어낸 귤 조각 같았다.
돌바닥의 짙은 회색은 파사드의 가벼운 오렌지색과 대비되어 무거움이 느껴졌다. 돌의 매끈함은 안방에 온 듯한 편안함을 주었고, 이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게 만들었다.
오렌지색 건물 건너편에는 교회가 있었고, 그 입구의 계단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나 역시 계단에 앉아, 오렌지색 파사드를 배경으로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사진 찍는 여행객, 노점 상인, 행인 등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했다. 계단은 관람석이고, 광장은 무대 같았다.
실제로 로마에서 이 광장만큼 크기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은 없었다. 그만큼 로마에서 가장 아늑함과 편안함을 가진 장소가 바로 이 산 이냐치오 광장이었다.
나는 곧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작업 내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펜으로 스케치를 할 땐 로마 현지인 할아버지가 이탈리아어로 말을 걸었고, 물감을 칠할 때에는 뉴욕에서 여행 온 여자분이 나를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어봤다. 마무리할 때 즈음엔 이곳에서 30년째 머물며 현지 가이드를 하시는 한국인 여자분이 다가와 한국인이냐고 물었고, 꽤 오래 대화를 나눴다. 오자마자 단시간에 도시의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셈이다. 광장의 밝은 분위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열린 마음을 갖게 하는 것 같았다.
영화 속의 광장
다음 날 아침, 이름 모를 작은 광장에 위치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와 시실리엔 샐러드로 하루를 시작했다.
식사 후엔 스페인 광장으로 향했다. 유명한 명소인 것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꼭 가보고 싶었던 장소였다. 그 이유는 영화 '로마의 휴일'과 '리플리'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 이 광장은 그 어느 곳보다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특히 리플리에서 주인공이 계단 위에서 광장에 위치한 카페를 내려다보는 장면이 항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도착했을 때 광장은 영화 속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넓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카페 대신 옷가게가 있었다. 조금은 김이 빠졌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광장이라기보다는 넓은 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페가 있었을 땐 테라스와 함께 광장에 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을 텐데, 지금은 길을 따라 옷가게가 쭉 들어서 있어서 쇼핑거리 같았다. 어쨌든 내가 영화에서 느꼈던 분위기는 없었다.
계단은 하얀 석재로 되어 있었는데, 엄청 매끄러웠다. 원재료가 그런 건지, 무언가 덧칠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 매끄러움 덕분에 공간 전체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파리의 몽마르트 계단은 거친 돌바닥, 버스킹 하는 사람, 잡상인 등으로 복잡한 분위기인 반면, 이곳 스페인 계단은 깔끔함과 조용함이 느껴졌다. 계단에 앉아 쉬고 싶었지만 햇빛이 계단으로 그대로 내려 꽂히기 때문에 이곳에 앉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EBS 세계테마기행 이탈리아편에서 정태남 건축가는 스페인 계단은 관람석이 되고 도시는 무대가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 반대로 느껴졌다. 건물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 속에서 스페인 계단은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건물 숲의 한가운데를 가르는 듯한 느낌의 빈 공간이었고 그 자체로 눈길이 가는 무대였다.
웅장함의 광장
더위를 피하기 위해 근처 카페에서 잠시 쉰 후 다시 길을 걸었다. 걷다 보니 한 거대한 광장에 도착했다. 산 이냐치오 광장이 아기자기함, 스페인 광장이 깔끔함으로 특징지어진다면, 이곳 나보나 광장은 웅장함이었다. 바로크 양식의 돔 건축물이 광장의 그 웅장함을 더욱 강조했다.
나는 그늘을 찾아 건물 스케치를 시작했다. 어느 작은 교회 입구 계단에 자리를 잡고 시작했는데, 점점 다가오는 햇빛을 피해 무의식적으로 조금씩 자리를 옮겼고, 작업을 마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교회 입구 안에 들어와 있었다.
돔 전체가 도화지에 담기지 않은 것이 아쉬웠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그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린 덕에 돔이 더 커 보이고, 웅장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행 마지막 날, 나는 역 주변을 거닐었다. 걷다가 한 골목길의 웅장한 파사드에 반해 건너편에 자리 잡고 땀을 흘리며 스케치를 하고 물감을 칠했다. 어느 시대 건물인지 어떤 양식인지 모르지만 느낌 가는 대로 그렸고 이 그림이 로마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여행의 끝은 고요하다
파리로 돌아가기 위해 로마에서 기차를 타고 토리노에서 경유를 했다. 토리노에서 출발해 스위스령 알프스를 거쳐 프랑스의 론알프스 지방에 도착했다. 이곳은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자연경관을 가진 지방이다. 이곳에서 나의 첫 번째 프랑스 생활을 시작했기에 더 정감이 가는 곳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없는 뻥 뚫린 호수 위에서 적적히 떠다니는 작은 배 한 척을 보았다. 이 적막한 분위기에서 배를 타는 뱃사공의 기분이 궁금했다. 조금 더 지나자 호수 위에 나무가 울거진 숲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화 노트북의 첫 장면이 생각났다. 나는 사진을 찍는 것도 잊고 그 분위기에 빠졌다. 로마에서 며칠간 함께했던 뜨거운 지중해 더위는 온데간데없고 론알프스 지방의 조용하고 적막한 풍경과 분위기를 느끼니 기분이 묘했다. 그러면서 여행의 긴장감이 풀리면서 노곤노곤해졌고,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 평온한 낮잠을 즐겼다. 어떤 꿈을 꿨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오렌지색의 기분 좋은 시끌벅적한 꿈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