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적 공허
01. 현실에 발 딛지 못하는 영혼
평상시에 나는 나이를 되새겨볼 일이 없어서 그냥 잊고 지내는데 이렇게 뭔가 시작하는 글을 쓸 때면 나이를 얼마나 먹었나를 짚어보게 된다.
올해 나는 한국 전통식 나이로는 48살 바뀌는 나이 계산법으로는 47살, 많다면 많고 또 누군가의 기준에는 아직 젊을 수도 하지만 오늘 나에게는 딱 알 맞은 나이라고 해두자.
이 시간 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현재 나에게 집중한 시간이 얼마나 되려나?
어릴 때부터 나의 담임 선생님들이 생활기록부 작성에 공통적으로 시작하는 첫 문구가 “주의가 산만하여~”였다. 나의 주의 산만함은 내면의 불안으로 기인한 것이었고 그 불안은 나의 성장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내 불안의 근원이 영혼에 난 구멍 때문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심리학에서 클라인 학파에서는 좋은 유방과 나쁜 유방의 경험으로 인해 현실 부모와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전에 이상화된 부모상이 만들어지는 경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러한 경우를 '실존적 공허'라고 하며 일명 '영혼에 하자'가 생긴다고 한다.
이러한 나쁜 유방의 체험은 학대나 방치로 느끼게 되는데 학대는 자신을 하찮은 존재라는 셀프이미지를 갖게 하고 방치는 자신을 위험에 노출된 취약한 존재라는 셀프이미지를 갖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낸 이상화된 부모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에 늘 실존적 공허를 느끼고 영적 추구를 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상당히 깊은 수준의 결핍을 구성하기에 현실적인 만족들로는 채워지지가 않고 그렇기에 치유가 쉽지 않고 오래 걸리며 가족의 사랑이 거의 유일한 답이라고 하는 전문가도 있다.
사실 나는 내가 나쁜 유방의 체험이 있었는지 어땠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느꼈던 공허함과 영적인 것에 빠져서 20대 초중반 남들 돈 벌고 연애하고 현실적인 삶을 사는 시간에 영성 추구 선도수련 단체에 들어가서 열정페이로(기초수급대상자들보다 적은 수입이었음) 8여 년을 지내고 나왔다.
지난 행보를 되짚어 보면 실존적 공허를 체험하는 사람들의 증상과 비슷하다. 아니 비슷했었다. 이제는 과거형이 되었으므로.
최근에 나는 나의 사고가 깨쳐지는 글을 발견하였다.
문제는 어린 시절의 마음의 상처 따위가 아닙니다. 문제는 어린 시절에 경험한 마음의 상처를 수십 년간 곱씹고 있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학대와 방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유는 모든 사람들의 부모가 '인간'이지 '부모 AI'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어릴 때 내 부모님의 나이가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이었을 것입니다.
이 나이대를 뭐라고 하는지 아나요? "철딱서니 없는 질풍노도의 시절"이라고 합니다. 그런 시절에 아이를 키운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학대와 방치 속에서 어린 시절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의 경우 세상에 대한 자신의 '태도'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비록 "철딱서니 없는 질풍노도 시절"에 나를 기른 부모님이 잘못을 했지만 그건 그분들의 한계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은 죄가 없고, 이 세상은 선하다는 태도를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찌감치 심정적으로 부모에서 벗어나 세상과 춤을 추게 됩니다. 과거 일은 바꿀 수 없기에 고민해야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미래에 내가 성취하고 나눌 수 있는 공로는 선택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인 것이지요.
출처: 네이버 카페 유교제가 「문제는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 따위가 아닙니다.」
위 글의 원글쓴이는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니체의 "아모르파티"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실존적 공허함에 대해서는 아들러의 '권력'과 '자기 효능감'을 제시하고 있다.
니체와 아들러에 의하면 인생의 최고의 가치와 목표는 "권력"이라고 했으며 권력은 유대감과 연대감을 느끼는 공동체에 공헌을 함으로써 얻는 힘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기 효능감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효능감이란 내가 능력이 있다는 느낌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며 이때 필요하다는 것은 감정적 필요가 아닌 나의 기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 자기 효능감이 충만할 때 사람은 영성이나 형이상학에 관심을 두지 않고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영성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기에 매 순간의 삶이 모여서 영성이라는 것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 수행이나 비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훈련해서 아픈 마음을 가지고 늠연하게 담담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라는데 나는 나의 삶을 보살피면서 삶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깨어서 그를 알아차리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서 나아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