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샤워를 하면서도 회의 준비를 걱정하고, 저녁을 먹으면서도 내일 일정을 떠올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이 관계가 언제까지 갈까” 불안해한다.
우리는 늘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 있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불안 속에서, 혹은 “이게 맞나?”,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라는 끊임없는 판단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게 정작 **지금 이 순간**은 놓쳐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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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우리가 어떤 순간을 “살고 있을 때”와 그 순간을 “관찰하고 있을 때”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춤을 추다가 “내가 지금 춤을 추고 있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춤의 몰입은 깨진다. 대화에 빠져들다가 “내가 지금 잘 말하고 있나?“라고 의식하는 순간, 대화는 어색해진다.
**관찰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것으로부터 분리된다.**
이것이 현대인의 고통이다. 우리는 삶을 살지 못하고, 삶을 관찰하며, 평가하고,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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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보자.
나무는 봄에 꽃을 피울 때 “이게 정말 효율적인 에너지 사용일까?” 고민하지 않는다. 여름에 무성한 잎을 키울 때 “너무 과하게 자라는 건 아닐까?” 걱정하지 않는다. 가을에 낙엽을 떨굴 때 “여름의 영광이 그리울 텐데…” 슬퍼하지 않는다.
나무는 그냥 **지금 이 계절을 완전히 산다.**
사자도 마찬가지다. 토끼를 쫓을 때 “상대가 토끼니까 80%만 뛰자”고 하지 않는다. “내일을 위해 체력을 아껴두자”고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전력질주할 뿐이다.**
이것이 자연의 방식이다. 완전한 몰입. 분리감 없는 존재. 판단 없는 생명력.
그런데 인간만 다르다.
인간은 “나”라는 분리된 관찰자로 살아간다. 그래서 매 순간을 **살지 못하고 관찰**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외로움을 느끼고, 분리를 불안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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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매 순간을 전력으로 사는 것.**
설거지를 할 때는 온전히 설거지를 하고, 누군가와 대화할 때는 완전히 그 대화에 빠져들고, 일할 때는 그 일에 몰입하는 것. “이게 의미가 있나?”,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걸 하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같은 생각 없이.
이것을 **전심전력(全心全力)**이라고 부른다. 온 마음, 온 힘을 다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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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이게 어려운가?
우리 내면에는 수많은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건 해야 돼” vs “하기 싫어”
“이게 옳아” vs “저것도 필요해”
“성장해야 해” vs “쉬고 싶어”
이 목소리들이 서로 싸우며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킨다. 한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다른 목소리가 제동을 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분열된 상태**로 산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놀랍게도, 이 모든 목소리를 **싸우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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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을 억누르지 않는다. “그래, 지금 나는 비평하고 싶구나” 인정하고 함께한다.
신통력을 갈구하는 마음이 들 때, “이런 생각은 유치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래, 지금 나는 이런 걸 원하는구나” 이해하고 공감한다.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할까” 자책하지 않는다. “지금 내 몸이 쉬고 싶어 하는구나” 받아들이고 쉰다.
**“네가 그렇다면 나도”**
이것이 내적 평화의 비밀이다.
내 안의 어떤 에너지든 은근히 압력을 가하며 눈치주지 않고, 전폭적으로 인정하는 것. “그래도 이건 아니지” 하며 판단하지 않고, 그 순간의 에너지를 온전히 만끽하는 것.
우리는 늘 판단한다.
“이 감정은 좋고, 저 감정은 나쁘다.”
“이런 생각은 성숙하고, 저런 생각은 미성숙하다.”
“이건 생산적이고, 저건 시간 낭비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화창한 날씨만 좋은 날씨일까? 비 오는 날은 나쁜 날일까?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햇빛도 필요하고 비도 필요하다. 태풍도, 천둥도, 모두 생태계의 균형을 위해 필요한 현상이다.
우리 내면도 마찬가지다.
기쁨만 좋은 감정일까? 슬픔, 분노, 두려움은 나쁜 감정일까? 모든 감정은 우리에게 뭔가를 말해주려는 신호다. 무시하거나 억압할 것이 아니라, 들어주고 이해해야 할 메시지다.
옳고 그름의 잣대를 내려놓고, 매 순간의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내적 평화** 속에서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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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뿌리를 뻗고, 햇빛을 향해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맹렬하게 생명을 발휘한다.
그러면서도:
- “나는 다른 나무보다 못해” 비교하지 않고
-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두려워하지 않고
- “나는 혼자야” 외로워하지 않는다
자연의 모든 생명은 **맹렬하게 살되,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만 예외다. 우리는 “나”라는 분리된 개체로 살면서, 비교하고, 두려워하고, 외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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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나무처럼, 자연처럼 살 수 있을까?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놀이를 보면 답이 있다.
성경에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순진해지라”는 뜻이 아니다. **매 순간을 온전히 살라**는 뜻이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 때를 떠올려보자.
미끄럼틀을 탈 때, 아이는 “이게 내 인생에 도움이 될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걸 타면 칼로리를 얼마나 소비할까?” 계산하지 않는다. “내일도 또 타야 하는데 오늘은 적당히…”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온몸과 마음이 미끄럼틀이 된다.**
흙장난을 할 때, “이게 생산적인가?” 묻지 않는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까?” 고민하지 않는다. “이건 좀 유치한 거 아니야?” 판단하지 않는다. **그냥 흙의 촉감, 물의 느낌, 그 모든 것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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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해서 모래성을 정성들여 쌓다가도 엄마의 부르는 소리에 미련도 없이 달려가는 삶.**
이것이 생기공명의 정수다.
아이는 모래성을 쌓을 때, “어차피 파도가 올 텐데…” 하지 않는다. “이게 뭐가 되겠어…” 하지 않는다. “적당히 해도 되겠지…” 하지 않는다. **마치 평생 그것만 할 것처럼, 온 우주를 쏟아붓는다.**
이것이 사자가 토끼를 쫓는 전력질주이고, 나무가 봄에 꽃을 피우는 맹렬함이다.
그리고 엄마가 부르는 순간, “아, 내가 공들인 이 모래성이…” 하지 않는다. “조금만 더 완성하고…” 하지 않는다. “나중에 돌아와서 마저 해야지…” 하지 않는다. **그냥 일어나서 달려간다. 모래성은 이미 다른 세계의 일이다.**
정답: **정말로 완전히 몰입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모래성을 쌓으면서 “나”라는 관찰자가 없었다. 그냥 모래성 쌓기 그 자체였다. “내가 쌓은 모래성”이라는 소유의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놓아버릴 때도 놓아버릴 “나”가 없다. 집착할 “나의 작품”이 없다. 그냥 다음 순간의 생기로 이동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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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삶이란 “만 번 가고 만 번 오는” 순환이다.
- 갈 때는 **완전히 가고**
- 올 때는 **완전히 오는**
- 그 사이에 **집착 없이**
이것이:
-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방식이고
- 계절이 왔다 가는 방식이고
- 생명이 태어났다 죽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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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성을 쌓는 아이처럼.**
**나무가 계절을 맞이하듯.**
**사자가 토끼를 쫓듯.**
매 순간 전심전력으로 몰입하되,
매 순간 완전히 놓아버리며,
분리감 없이, 판단 없이, 집착 없이.
이것이 살아있다는 것의 본질이다.
몰입해서 모래성을 정성들여 쌓다가도,
엄마의 부르는 소리에 미련도 없이 달려가는 삶.
**그것이 온전히 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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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모래성을 쌓는 아이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