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이라는 오해, 그리고 나를 살아낸다는 것

by 하봉길

새벽 세 시. 또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어둠이 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나는 문득 예수를 떠올렸다. 겟세마네 동산의 그 밤을.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던 그 처절한 몸부림을.


죽기를 작정하고 만난 예수

한때 나는 미쳤었다. 예수를 만나겠다고.

성경을 백 번 읽고도 모자라, 금식 기도를 시작했다. 죽을 각오로. "제발 한 번만 나타나 달라"고 땡깡을 부리듯 매달렸다.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이 정말 알아준다면 내 앞에 모습을 보여달라고.

그때였다.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장면들. 갈릴리 바닷가의 아침 안개, 베드로의 거친 손,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 목소리가 내 영혼을 관통했다. 아, 예수는 희생하려고 십자가를 진 게 아니었구나.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냈을 뿐이었구나.


희생이라는 거래

우리는 '희생'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쓴다.

"내가 가족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회사를 위해 내 청춘을 다 바쳤어." "너를 위해 내가 포기한 게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런데 정작 희생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건 이미 희생이 아니다. 거래다. 대가를 바라는 투자다. 그리고 그 투자가 실패했을 때, 우리는 학대당했다고 느낀다.

진짜 희생한 사람들은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엄마가 새벽에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 거기에 희생이라는 의식이 있을까? 그저 아이가 배고파 우니까, 내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뿐이다. 그게 사랑이다.


나라는 원자핵 속의 양성자들

양자물리학에서 원자핵을 들여다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수소를 제외한 모든 원자들은 여러 개의 양성자를 가지고 있다. 같은 극끼리는 밀어내는데도, 어떻게 한 핵 안에 여러 양성자가 공존할까? 강력(强力)이라는 힘 때문이다.

우리 안에도 수많은 '나'들이 있다.

찌질한 나, 거만한 나, 두려운 나, 사랑스러운 나. 이 모든 양성자 같은 자아들이 서로 밀어내고 있다. 특히 그림자 같은 나들을. "너는 내가 아니야"라고 부정하면서.

그런데 이들을 다 끌어안아야 한다. 그것이 내 원자핵을 유지하는 강력이다. 모든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 때, 비로소 온전한 내가 된다.


공명이 일어나는 순간

"내가 왜 그래야 돼요?"

한 방송 PD가 지나가며 던진 이 말이 내게는 깨달음이었다.

처음엔 냉정하게 들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였다. 내가 아닌 일에, 내가 공명하지 않는 일에 나를 갈아 넣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기 학대다.

양자물리학적으로 보면, 공명은 주파수가 같을 때 일어난다. 내 파동과 상대의 파동이 만나 증폭될 때, 그때 우리는 기꺼이 움직인다. 희생이 아니라 기쁨으로.

그래서 나는 이제 안다. 희생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즉시 이렇게 바꿔야 한다고.

"아, 나는 지금 학대당하고 있구나."


예수가 보여준 것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은 게 아니다. 그저 끝까지 자신을 살아냈을 뿐이다.

두려워하면서도, 떨면서도, 그 순간 자신이 갈 수밖에 없는 길을 걸었다. 매 순간 자신의 심장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것이 십자가로 이어졌을 뿐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했던가.

그 기질, 그 본성, 그 떨림은 어디 가지 않는다. 상황이 바뀌어도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사건의 지평선에 새겨지는 것

내가 말하는 불멸자란, 죽지 않는 신이 아니다.

매 순간 맹렬히 자신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자신의 심장 박동을 온전히 느끼고, 그 떨림이 타인의 심장에 닿을 때까지 진동하는 사람이다.

그 순간의 공명은 우주의 사건의 지평선에 영원히 각인된다. 3초든 3년이든,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맹렬히 떨렸느냐가 중요하다.


희생이 아닌 확장

자기조직화라는 개념이 있다.

내가 확장될수록 신경 쓸 일이 많아진다. 혼자일 때는 나만 챙기면 되지만, 가족이 생기고 조직이 커질수록 내가 품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그런데 이것을 희생이라고 하면 안 된다.

JYP 박진영이 말했듯, 새벽에 전화가 오면 두렵다. 소속 연예인 중 누군가 사고를 쳤을 거라는 불안. 하지만 그것도 자신이 선택한 확장의 일부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지만, 그 모든 가지가 나다. 그것을 희생이라 하지 않고 나의 확장이라 할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진짜 희생은

어느 날 한 어머니가 말했다.

"아이가 아픈데 뭐가 힘들어."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진짜 희생은 본인이 희생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당신의 희생 덕분에"라고 말할 수 있다. 받는 사람이 느끼는 감사의 표현으로는 맞다. 하지만 주는 사람에게 그것은 희생이 아니다. 그저 사랑이다.


잠시만의 지혜

공명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만."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화장실 간다고, 전화 받는다고, 잠시만 자리를 비우면 에너지가 환기된다. 36계 줄행랑이라는 위대한 전법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이 방법이 더 잘 통한다. 왜? 화제가 무궁무진하니까. 잠시 끊었다가 돌아오면 이미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있다.


나를 살아낸다는 것

결국 희생이란 없다.

있다면 두 가지뿐이다. 내가 확장되어 더 많은 나를 품는 것. 아니면 내가 나를 학대하고 있는 것.

예수도, 부모도, 그 누구도 진정으로는 희생하지 않는다. 그저 매 순간 자신을 살아낼 뿐이다. 그것이 때로는 십자가가 되고, 때로는 새벽 수유가 되고, 때로는 묵묵한 기다림이 된다.

오늘도 나는 나를 살아낸다.

맹렬히, 온전히, 그리고 기꺼이.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랑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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