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도 미니멀하게 남겨보기
내 인생의 첫 기록물은 ‘일기’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던 일기장은 졸업할 무렵 제법 쌓였다. 오래오래 소중하게 간직해야지 생각했는데 이사를 하면서 짐 정리하던 중 아버지가 버리는 짐인 줄 알고 버리셨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보관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 컸기에 너무 속상하고 아쉬웠다. 그 뒤로도 일기를 종종 쓰긴 했지만, 일기장 하나를 제대로 다 채워본 적이 없었다. 쓰다만 일기장만 늘어갔다. 찔끔찔끔 기록이 남겨져 있다는 이유로 미련이 가득 묻어서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록’을 남기는 공간은 아날로그로 플래너나 다이어리를 쓰기도 하고, 온라인으로 블로그, SNS 등으로 다양해졌다. 생생한 기록을 하기 위해 사진과 영상도 많이 찍고, 팸플릿이나 영수증 등 증거가 될 만한 흔적도 모았다. 문제는 찍고 모으기만 할 뿐 그것을 활용한 기록을 꾸준히 해내진 못했다. 기록을 정리해야겠다는 마음만 짐으로 늘어갔다. ‘나중에’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이라는 시간은 오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기록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남겨둬야겠다고만 생각했다. 어디에 기록해야 하고, 어떻게 기록해야 하고,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지 기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은 부끄러우면서도 공감을 받고 싶었다. 공개적으로 남길 것인지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남길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어려웠다. 기록을 남기려고만 했던 나의 일상에서 기록을 남기는 이유와 기록 관리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첫째, 나를 알아가기 위해서이다. 하루하루 비슷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면 습관, 패턴, 취향 등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 음식, 날씨 등이 담겨있는 일상 기록들. 둘째,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나의 소중한 경험을 기록으로 공유하면서 누가 나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줄 때 보람과 성취감을 느꼈다. 셋째, 성장하기 위해서이다. 기록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독서, 운동, 명상 등 나의 일상을 채워가는 기록이 나를 키워가는 기록이 되도록 노력하게 됐다.
기록 관리의 방법도 나름대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먼저, 쉽게 버리지 못하던 팸플릿, 티켓, 영수증 등 늘어만 가던 흔적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기로 했다. 여전히 쉽지 않은 일 중 하나이지만, 그 흔적들을 사진 또는 기록으로 남겨두고 비우는 연습 중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흔적들의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와 경험이기에. 다음으로, 수기로 남겨두는 기록보다는 온라인에 남겨두는 기록을 좀 더 활용하기로 했다. 손글씨로 남겨둔 기록이 가진 매력과 손으로 끄적이는 재미를 포기할 수는 없기에 일기장이나 노트도 쓴다. 그러나 주요 기록은 블로그, 브런치, 한글파일 등 전자기기에 쓴다. 물론 온라인은 서비스가 중단될 수도 있고, 파일이 손상될 수도 있다. 위험 부담이 있긴 하지만, 현재까지는 만족 중이다.
나의 흔적을 미니멀하게 남기기 위한 노력과 고민을 하면서 내가 남긴 기록에 대한 미련과 욕심도 내려놓기 시작했다. 기록을 통해 나를 알아가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성장한다면, 그 기록의 역할은 다했기에 비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록과 흔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남기는 나와 내 일상이므로. 곳곳에 쌓여있는 흔적을 비워나가는 것을 기록하는 요즘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