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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을꾸다 Aug 06. 2022

쏟아진 우유는 닦으면 끝이지만.

마음의 얼룩은 어떻게 지울까.


원래 그렇다는 말 좀 그만해.

남편이 말했다. 저녁 식사 중 좋아하는 음식 취향을 말하고 있던 때였다. 그 순간 그렇게 말하는 남편이 너무 이해되지 않아 화가 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 말이 계속 생각났다.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자주 말했나 보다. 남편의 한 마디는 그동안 쌓여있던 감정이 불쑥 튀어나온 것일 테고. 겉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각자의 생각이나 느낌을 다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 가득 차 버린 속마음은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드러나기도 한다. 문제는 상대의 드러난 속마음을 받아줄 여유가 있느냐이다. 그동안 내 속마음이 차오르는 것만 보느라 상대의 마음은 어떠한지 헤아려주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다고만 느꼈고, 아주 소중한 가족인 남편과 아이에게도 여유를 나누지 못했다.




힘들다고 해서 그렇게 해도 되는 건 아니야.

화내는 내 모습을 누가 본다면 저 사람은 제정신이 아닐 거야라고 말할 것 같다. 이성이 끊어지고 오로지 원초적인 본능과 감정만 남은 사람처럼 길길이 날뛰고 소리를 질렀다. 아직 세상에 태어난 지 3년도 되지 않은 아이, 세상에서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안아주는 아이, 내 품에서 열 달을 품었던 아이에게. 아이가 아주 어리던 때부터 힘들고 지친다는 이유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 남편에게도 화를 참지 못했지만, 종일 나와 붙어있는 아이는 최대 피해자였다.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잔소리가 늘어가고, 아이라서 당연히 할 수 있는 행동과 실수에도 나는 가차 없이 화를 내었다. 아이는 엄마가 무섭다고 말하거나 내 눈치를 살피는 날이 늘어났다. 아이가 잠든 뒤 눈물과 한숨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음 날이면 다시 초기화되는 날들도 이어졌다. 그런 내게 남편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그런 언행은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했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말이기에 그 말이 마음에 박혔다.




후회하고 자책할 거면 그렇게 하지를 마.

아이에게 화내거나 남편과 다툰 뒤에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남편과는 대화해서 풀고 나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그나마 나아졌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엄마가 화내서 미안하다고 안아주며 토닥여주어도 아이의 마음이 어떠한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거나 엄마 내가 미안해요, 엄마 화났어요?, 엄마 이제 웃으면 안 돼요? 등 먼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애쓰는 아이의 모습에 내가 아이에게 준 상처가 눈에 보여서 마음이 더 무거웠다. 남편은 화내고 후회를 하지 말든지, 후회를 할 거면 화내지 말라며 답답함을 느꼈다. 다행히 아이에게 화내지 않기 위해,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고, 덕분에 조금씩 나아졌다.




쏟아진 우유는 닦으면 없어지지만, 아이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아이에게 가장 화를 자주 냈던 순간 중 하나는 우유나 주스를 쏟았을 때이다. 지금 미국에서 지내고 있는 집이 부엌과 화장실을 제외하면 모두 카펫이 깔려 있어서 늘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한동안 개미들이 출몰해서 바닥에 뭔가 흘리거나 쏟는 것이 정말 싫었다. 아이에게 과하게 잔소리와 당부를 하게 되고,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게 되고, 무엇보다도 어떤 이유로든 바닥에 음료가 쏟아지면 크게 화를 내게 됐다. 여느 날처럼 아이가 신나서 몸을 움직이다가 우유를 쏟았다. 그 순간 습관처럼 화가 올라왔다. 그러나 화내지 않았다. 요즘 아이가 내가 화내던 때의 표정, 말투, 목소리를 본인이 화날 때 하기 시작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바닥에 쏟아진 우유는 닦고 치우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내가 아이에게 보인 언행과 표정은 아이에게 남는 것이다. 


아이의 속마음에 차오르던 것이 겉으로 드러나면서 더는 상처를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화냈던 게 미안해서 더 안아주고 애정을 표현해줘도 결국 화냈던 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화내지 않고 우유를 치우는 동안에도 아이는 내가 화냈던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내 마음을 찌르는지 지나온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아이에게 우유가 쏟아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며 조금 더 조심해보자는 말을 건넸더니 알겠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지나갈 수 있는 일에 나는 왜 그토록 열을 내며 아이에게 상처를 줬던 걸까.



아이가 나의 지우고 싶은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나는 앞으로도 후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모습이 덮여서 떠오르지 않을 만큼 더는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안아주고 애정을 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미워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아하는 일을 해주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도 공감이 된다. 한번 혼내면 열 번 이상 칭찬하고 안아줘야 아이의 마음이 회복된다는 내용도 어느 연수에서 들었던 것 같다. 쏟아진 우유를 닦듯이 깨끗하게 아이 마음에 생긴 얼룩을 지우는 일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이유로, 힘들고 지친다는 이유로, 화내고 후회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이유로, 내 행동을 합리화하는 짓을 멈추는 것은 그 일보다는 쉬울 것이다. 자그마한 노력에도 큰 사랑을 주는 나의 아이에게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우유를 쏟았다고 화내는 엄마가 되지 말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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