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정의할 수 없는 영원한 어떤 것

by 채송화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이다.


행복은 엇비슷하고, 불행은 다르다지만.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불행도 엇비슷하다.

건강과 가난이라는 공통분모.


이 둘은 몸과 마음이, 표현이 다른 하나이듯 같은 쌍이다.

건강을 잃으면 가난해지고, 가난해지면 건강도 잃는다.

가난과 질병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얼굴이다.


<브레이킹 배드>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암에 걸린 고교 화학선생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통해,

사실은 미국 중산층이 질병으로 인한 가난 앞에서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미국 드라마다.


가난한 얘기 누가 좋아하겠나 싶지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과연 외면할 수 있을까?

굶주림에 지친 케이티가 푸드 뱅크에서 배급받은 캔 음식을 허겁지겁 입에 넣다가, 자신이 처한 처참한 현실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듯한 수치심에 북받쳐 오열하는 장면.

이 장면은 단순히 배고픔을 넘어, 복지 시스템의 실패가 개인의 삶과 존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케이티를 위로하며 인간적 연대를 보여준 사람은 다름 아닌 같은 처지의 다니엘이다.


이렇게 되면 질병과 가난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적인 고민은 공적인 문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개인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사회공동체의 문제다.

그렇다면 질병으로 인해 가난해진 부부는 어떻게 살아갈까?


남편이 치매라서 그런지 부쩍, 오랫동안 기억 속에 묵은 두 부부의 한 장면씩이 떠 오른다.

한 부부는 남편과 결혼하기도 전, 이십 대에 본 젊은 부부다.

또 한 부부는 남편이 치매가 될 기미도 눈치채지 못했던 시절에 본 부부다.


내 나이 스물아홉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다.

뇌수술 후 깨어나지 못했다.

그 일주일 중환자실에 엄마가 누워있을 때였다.

나는 엄마의 왼손 손톱을 다섯 개를 깎았다.

"요건 내일 할게."

엄마는 한쪽 손 손톱은 못 깎은 채 그냥 가셨다.


그 일주일. 같은 중환자실을 쓰는 사람들과 대기실을 같이 썼다.

6개월 이상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때 본 아주 짧은 한 장면이 평생 잊히지가 않는다.


젊은 신혼부부 같았다.

한 삼십대로 보였다.

남편은 중환자로 누워있다.

의식은 없다.

젊은 새댁은 아련하게 웃으며 남편을 닦아줬다.

그런가 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무심히 봤다.

그러다 그 장면에서 딱! 봐버렸다.


'새댁이 남편의 성기를 부드럽고 정성스레 닦아 주는 장면을!'


아...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뭐라 할 말이 없다.

그 진공상태와도 같은 정적을 깬 건 새댁의 시어머니. 그러니까 누워있는 남자의 엄마다.

묻지도 않았는데 중환자실 보호자 방에서 넋두린지 잔소린지 그 와중에 오지랖을 부렸다.

자기 아들 저렇게 된 지 여섯 달째, 며느리가 지극정성이라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그러면서 나한테 엄마가 못 깨어나서 그냥 돌아가시는 게 낫지 중풍 되고 반신불수되면 누가 돌볼 거야.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데 마치 혼잣말처럼 했다.

입을 찢어놓을 기운도 없었다.


그 새댁이 대단하다거나 존경스럽다거나 경이롭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마치 어떤 그림 한 점 보여주고 나머지는 보는 사람 몫! 그런 느낌이랄까.

그때 그 젊은 부부. 그 새댁의 희미한 입 매무새.

적나라하고 직설적인 그 장면.

지금도 뭐라고 어설프게 정의할 수 없다.


그리고 다른 한 장면은 결혼하고 마흔 중반쯤이었다.

산이 눈앞에 있는 이 아파트로 와서 남편과 늘 산에 다닐 때다.

어떤 중년부부다.

남자는 겉보기에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수술 후 회복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운동장애로 재활하는 것 같았다.

날마다 산에 와서 걷기 연습을 했다.


그 부인은 얼굴이 새까맣게 탔다.

웃음기도 없고 여유도 없어 보였다.

그냥 걍팍 하고 깡말랐다.

날카로운 인상으로 화가 온몸을 덮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남편을 앞세우고 코치처럼 뒤에서 몇 마디씩 일러 주었다. 혼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가라고!"

뭐 그런 식이었다.

울화통이 터지기 직전인 것 같았다.


이왕 하는 거 좀 다정하게 하지.

꼭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는 거처럼 왜 저래.

나는 남의 일이라고 쉽게 생각했었다.

세상에! 며느리 늙은 게 시어머니라더니. 내가 뭘 안다고 건방지게.

연탄재도 함부로 차지 말라는데. 아차 싶었다.


여자는 꾸준했다. 일 년을 넘게 봤다.

여자는 심지가 굳건한 사람이었다.

당해보기 전까지 누구도 함부로 남의 삶의 방식에 뭐라 하면 안 되는 거였다.

나도 우리 엄마를 두고 자기 혼자 지껄인 노인과 다를 바가 없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일 년이 지났다. 남자는 처음에 비해 꽤 잘 걸었다.

몸은 이럴 때 보면 희한하다.

정직하다고 해야 할까.

하는 만큼이라고 해야 할까.

일 년 전에 비해 걷는 것이 훨씬 수월해 보였다.

양쪽손에 여전히 스틱을 짚고 다니지만 눈에 띄게 좋아 보였다.


와 정말 인간승리구나 싶었다.

여자의 얼굴도 처음보다 걍팍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대단하고 훌륭하다. 응원하고 격려했다.


한 번도 말 한마디 안 해봤지만, 진심으로 잘 살기를 빌었다.

그 후 언제부터인가 산에서 안보였다.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제 우리 부부다.

이상하게 그 여자가 역할을 나한테 떠넘기고 갔나? 싶을 때가 있다.

나야말로 초반에 남편한테 그 여자처럼 굴었다.

다정함도 없이, 일촉즉발의 화산폭발을 앞둔 것처럼.

무질서한 감정의 울화통이 엔트로피를 일으키듯이.

남편한테 화를 냈었다.


스피노자의 결정론의 시간순서가 이해가 안 됐었는데, 지금은 저절로 이해가 됐다.

이해뿐 아니라, 아예 내가 시간을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한 것은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은 원인에서 비롯되며, 우리가 그것을 알든 모르든 우리는 이미 인과의 그물 안에 있다.

지금의 나도 그 결정 속에 있었던 것이다.


결혼 전에 본 젊은 부부.

남편을 훈련하던 여자.

모두 내 남편의 미래에 치매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던 때였다.

그런데 내 일로 닥치고 보니, 나야말로 전조가 있었구나 싶은 것이다.


윤정희 배우가 치매 초기 일 때 찍었다는 영화 『시』

남편이 보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울었던 영화『더 파더 (The Father, 2020)』

언어학자인데 아이러니하게 치매에 걸린다는 설정의 영화『스틸 앨리스 (Still Alice)』

예전에 내가 찍어 놓은 사진을 지금 상황에 적용하는 것들.

마치 지금의 내가 보고 온 것만 같다.

그래서 그렇게 그 장면들이 아리게 마음에 오래 남아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이제 나는 결혼제도가 달갑지 않다.

톨스토이는 『결혼』에서, 결혼 제도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 책을 읽으며 나야말로 강력히 동의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살다 보니 알게 됐다.

결혼은 물 위만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나는, 그 아래 거대한 얼음덩이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불나방이었다.


남편이 잘해주고 못해주고의 문제는 아니다. 남편은 늘 잘해줬다.

남편은 살림을 잘한다. 남편이 가끔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음식물쓰레기도 버려 본 적이 없다.

내 비위가 약하기도 하지만, 남편은 몸이 가볍다.

집 청소, 세탁, 설거지 보이는 대로 바로바로 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내 질서가 깨지는 것에 굉장히 예민한 성격이다.

그런데 나와 질서가 달랐다. 배치. 정리. 살림의 질서가 달랐다.

내 경우.

'좁은 집'에 '충돌하는 두 질서가 공존하는 룸메이트'가 있는 것이 싫다는 걸 깨달았다.


부부는 '로또'라는 말이 있다.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아서 그렇다고 한다.

나야말로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재밌게 본 시트콤 '웬만하면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부부 불일치 이야기였다. 박정수와 노주현이 동생부부와 여행을 갔다. 이홍렬 배종옥은 재혼해서 신혼이었다. 알콩달콩 잘 맞았다. 반면에 오래 산 형네 부부는 사사건건 안 맞았다. 널뛰기를 해도 박자가 안 맞았다. 그러다 과속하다가 경찰을 맞닥뜨리는, 급한 장면에서 딱 한 번 맞았다. 그러면 부부다. 한 번이라도 맞으면 살아가는 거라고 한다.


내 친구 부부는 평소에 손 한 번 안 잡는 부부라고 했다. 그런데 서울에 결혼식에 갈 때 딱 한 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잡았다고 했다. 좋아서가 아니고 남편 속주머니에 든 축의금 잃어버릴까 봐 둘이 딱 붙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웃음이 절로 나는 에피소드다. 부부는 그렇게 위기상황에서 한 팀이 된다. 그러면 부부다. 그 힘으로 남은 생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그런 에피소드가 없다.

딱 하나 맞는 다면 꼭 화장실을 같이 가려다 부딪힌다는 것이다.

화장실이 두 개라면 별 문제없을 일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결혼. 부부. 딜레마다. 그럼에도 어쩌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돌아가기에는 출발지가 너무 멀고, 그냥 가자니 도착점이 곧 올 것도 같은.

그런 나이가 됐다.


날은 저물고 남편은 아프고. 업어야 할지 버려야 할지.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어쩌면 그냥 내 삶의 관성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운동하는 존재다.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해서 운동하려고 한다.

삶은 가장 강력한 관성의 법칙이다.

자연법칙에 따라 우리 부부는 굴러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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