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기 싫어요
살면서 참 애절하다고 느낀 한 장면이 있다.
아주 흔한 장면인데 유독 그날 내 감정과 마주친 지점.
마주침의 클리나멘이라 하던가.
무심코 지나칠 뻔한 순간이 갑자기 의미를 띠고 다가왔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내 뒤에 앉은 할머니가 손녀와 통화를 끝내려던 참이다.
버스가 떠나니 전화를 끊어야 한다고 했다.
손녀딸은 할머니와 영영 이별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심정이었는지 끊지 말라고 매달렸다.
할머니 금방 갔다 올 거야. 잘 놀고 있어.
할머니는 전화를 탁 끊었다.
내가 남편한테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남편은 그때 그 아이처럼 매달렸다.
사생결단으로 매달리는 현장을 실제로 처음 봤다.
그 강력한 애절함.
아이가 이별을 받아들이는 건 극단적인 것 같다.
남편이야말로 아이가 되어 가는 중이다.
남편이 치매가 되고 나니 예전에 봤던 것이 새로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때는 좋았던 것이 지금은 싫어진다.
전영광의 시 <분갈이>도 그렇다.
"뿌리가 흙을 파고드는 속도로
내가 당신을 만진다면
흙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놀라지 않겠지
느리지만 한 번 움켜쥐면 죽어도 놓지 않는 사랑"
한 번 움켜쥐면 죽어도 놓지 않겠다니. 그게 어떻게 사랑일까.
나한테는 남편의 집착으로 다가왔다.
뿌리가 나를 칭칭 감아 숨이 막힐 것 같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물었던가?
예전에는 저 뿌리처럼 나를 놓지 말아 주길 바랐다면,
지금은 나를 놔주기를 바란다.
내가 놔 달라고 할 때마다 우리는 실랑이를 한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같이 살기로 했잖아. 어떻게 이혼을 하니."
"뿌리 타령 좀 하지 마!"
강원도 말로 '항글같이'라는 말이 있다. 표준어로 '한결같이'이지만 결이 좀 다르다.
한결 같이는 꾸준함이 내포된 긍정적인 말이라면, 항글같이는 주로 부정적으로 쓴다.
'항글같이 대든다' '항글같이 울어댄다' 상대를 해 넘기겠다는 집요한 각오의 표현으로 썼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항글같이 이혼을 회피하는 것에 질렸었다.
"당위로서의 결혼은 이혼은 절대 안 된다는 도덕적 오류를 낳는 거야!"
나도 '항글같이' 쏘아붙인다.
남편도 '한결같이' 고개를 떨군다.
나는 아내가 아니라 엄마가 된 지 아니 처음부터 엄마였나 싶을 정도로 우리 부부는 변용되었다.
남편의 감정이 먼저 아이가 됐다. 남편한테 이별은 영영 이별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들어 설자리는 없다.
남편은 러시아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주인공 같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우리는 서로 그랬다. 상대방한테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손뼉 쳐주며 보내주기로.
약속 한 건 아니지만 우리의 인격이 그렇다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랬던 그가 떼쟁이 아이만 남았다.
우주 발사체가 그렇다지?
다 떨어져 나가고 결국 진짜 알맹이만 작동한다지. 남편의 핵심은 아이였던 건가.
큐피트가 알고 보니 쌔근쌔근 자는 아기라더니.
이렇게 보니 인간은 뫼비우스의 띠가 아닐까 싶다.
처음도 끝도 아기로 왔다가 아기로 돌아가 아기로 만나는.
우리의 결혼은 흔들리는 필라멘트와 같다.
끊어지기 직전의 필라멘트가 위태롭게 떨면서도 간신히 불빛을 이어가듯이,
우리도 그렇게 항글같이 떨며 관계를 유지한다.
남편은 점점 나를 의지한다.
예닐곱 살 사내아이가 된 것 같다.
엄마를 뒤에 두고 의기양양 걸어가는 아이처럼.
남편이 의기양양 시를 외우며 걸어간다.
틀렸다 싶으면 돌아본다.
생각이 안 난다 싶어도 돌아본다.
다음 연을 까먹어도 돌아본다.
응석받이처럼 돌아본다.
엄마는 다 알고 있지? 그다음 뭐였지? 하듯이.
나는 송창식의 결혼 축가 노래를 흥얼거린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둘이 둘이 둘만이 둘만이
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살리라
그 놈의 파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