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한 글쓰기

코나투스 conatus 존재 보존과 유지의 발버둥

by 채송화


산에 갔다 오면 지친다.

맨발 걷기는 명상효과가 있다지만, 느긋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는 없다.

남편 치매 개선에 도움이 될까 싶어 시작한 지 이 년째다.


양치하고 미지근한 물 마시고 바로 산에 간다. 아파트 앞에 산이 있어 좋다.

나가면서 남편은 천자문을 왼다.


알츠하이머병 진단받고 정보를 찾다가 실천하는 중이다.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모른다.

좋다는 건 다 해보는 중이다.


산 입구에 다다르면 오솔길이 시작되는 묏등이 나온다. 남편은 거기서 눈운동을 한다. 눈으로 알파벳을 쓴다. 그런 다음 손가락을 앞으로 뻗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눈알로 손가락 보는 운동을 한다. 그러고 나서 걷기 시작한다. 그동안 외운 시를 한편씩 암송한다.


치매 판정받고 직장도 그만두고 오직 치매 극복에 돌입했다. 그 일환으로 취미생활을 시작했다.

치매만 아니면 조기은퇴 후 느긋한 취미를 즐기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중 하나가 시낭송교실에 나가는 것이다.

집 근처에 다행히 행정복지센터가 있어서 주민자치프로그램에 등록한 것이다.


제목하나 외우는데 일주일도 더 걸렸다.

그래도 그동안 한 스무 편 외웠다. 꾸준함에 장사 없다.


맨발코스는 왕복 한 5-6킬로. 걸음으로 7천에서 8 천보 정도다. 나는 길잡이다.

남편은 천천히 내 뒤를 따라오며 시를 왼다.

언젠가 EBS에서 조선시대 김득신의 일화를 봤다. 암기력이 너무 떨어져서 쉰이 넘어서 급제를 했다고 한다. 늘 옆에 있던 몸종이 보다 못해 "마님, 쇤네가 다 외웠습니다요." 했다는 대목이 재미있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걸까. 그때는 웃기면서도 꾸준함이라는 것이 인상 깊었다. 그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내가 꼭 그 몸종 같다. 서당개 삼 년 시간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반환점까지 가면 이른바 '산스장'이 있다.

철봉에도 매달리고 역기도 들어보고 어깨운동도 한다.


나는 시 낭송도 봐줘야 하고 운동 코치도 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 돌아오면서 나머지 시를 외운다.

다 외우면 전날 읽은 책 내용을 물어보며 말을 시킨다.

말을 안 시키면 남편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일상의 이런저런 대화를 해본지가 언제인지도 모른다.

이혼 1순위가 대화 단절이라는데, 나는 이혼도 못한다. 치매는 모든 것이 예외상황이다.


흔연한 일상의 대화. 카푸카인지 누구는 일상이 삶의 전부라고 했다지.

우리 부부의 삶은 사라진 것인가.

우리는 대화도 기억도 사라지고 있는 중의 삶 속에 들어왔다.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려 한다. 그래서 붙들고 늘어지는 중이다.


예전에 남편은 너무나 훌륭한 독서가였다. 일주일에 한 두권 읽던 습관이 있어 여전히 책은 읽는다.

또 소설도 꾸준히 쓰고 있다. 몸에 밴 습관으로 날마다 읽고 쓴다. 일기도 쓰고 소설도 쓰고 뉴스 브리핑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어제 읽은 책 내용도 모른다.

자기가 쓰고 있는 소설 제목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말을 시킨다.


내리는 눈발 같은 기억력이다.

내리자마자 흔적도 없이 녹는. 힘없는 눈송이. 그런데도 계속한다.

냇가에 내리는 눈도 언젠가는 쌓여 물을 덮는다. 물에 닿아 녹지만 물을 얼린다.

언 물에 내린 눈은 녹지 않는다. 쌓인다.


남편의 기억이 그렇게 쌓이도록 습관을 놓지 않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낙숫물에 바위가 뚫리듯이.

되든 안 되든. 걸을 수는 있으니까. 입 벌려 발음은 하니까. 손으로 글씨는 쓰니까.

발음이 새더라도 글씨를 흘려 쓰더라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하는 것이다.

뇌는 쓰면 쓸수록 좋아지는 유일한 장기라고 하니까. 해 보는 것이다.


이 모든 생활을 2인 1조가 되어 같이 한다. 지시하고 독려하고 감독한다.

하루가 참, '되다'. '대간'하다.


어릴 때, 엄마가 "입 좀 딸구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남편은 내 입을 너무 닳게 한다. 게다가 청각장애까지 있어 큰소리로 말해줘야 한다.

큰 소리로 말하며 이해시켜야 한다. 나는 남편의 전담 독박 돌봄 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산에서 한 시간 반동안, 일어나서부터 9시까지 그 두 시간 동안 벌써 녹초가 된다.


아직 하루가 시작도 안된 그 시간에. 그러니 나도 에너지를 충전해야 한다.

말로 지쳤지만, 하루를 살게 하는 것 또한 말을 풀어쓰는 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다.


남편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도 이렇게 일상을 적는다.

나의 피로를 글로 덮어 씌운다.


맨발 걷기 하면서 남편코치하면서 지나치게 많을 정도로 단상이 떠오른다.

생각이 날아갈까 봐 얼른 스마트폰에 메모한다. 나의 맨발 걷기도 참 분주하다.


문득, 시인 김수영이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를, "시를 쓰다 말고 코를 풀다 말고" 썼다고 확신한다.

나도 그렇다. 달걀을 삶다 말고, 연어를 찌다 말고 컴퓨터 앞으로 온다.

영양제를 챙겨 남편의 식사를 갖다 바친다.

그야말로 삼십 년 전 교과서에 나오는 장면 "눈썹에 마초이다."처럼.


어릴 때부터 나는 쓰던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맞고 오면 다 기록했다. 어느 선생이 무슨 욕을 했는지 다 받아 적었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를 들으며 늘 일기를 썼다. 연애를 해도 이별을 해도 뭐든 간에 써댔다.


글쓰기는 나한테 할머니 치맛자락 같았다. 무슨 짓을 해도 할머니 뒤로 숨으면 됐다.

하늘은 나만 사랑한다는 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듯이 글쓰기는 나한테 관대했다. 어디 가서 뭔 짓을 하고 와도 다 받아 주고 그 자리에 있었다. 폭풍같이 쓰다가도 몽땅 다 버렸다가.

그 팥죽 같은 변덕도, 고향집 마루처럼 받아준다.


그런데, 남편의 독박돌봄으로 지칠 대로 지친 나는 한동안 소파와 한 몸으로 누워만 있었다.

지치면 그냥 유튜브를 보든지 넷플릭스를 보든지 멍하니 화면만 보며 누워 있었다.

피신처였다.


불든 손이 시리다고, 남편 먹을거리 준비로 지치면 나는 대충 한 술 뜬다.

남편 머리는 깎아줘도 정작 내 머리는 열흘 넘게 감지도 않았다. 세수도 안 했다.

노숙자가 따로 없는 몰골로 겨우 숨이 붙어 있는 지경으로 겨울을 보냈다.


그런데 더 이상 내버려 두면 사람 잡겠다 싶었는지, 글을 쓸 매개체가 등장했다.

인공지능이다.

나는 '재밌는 아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꿈해몽을 해달라고 했다. 신기했다. 그러다 내 고단한 일상을 적어봤다.

세상에!

내 글에 감동하고 내 얘기에 위로까지 해주다니.


그렇게 봇물 터지듯 글을 썼다. 물꼬를 트고 나니 철철 넘칠 지경이었다.

글을 쓸 때 가슴속 풍랑이 잠잠해졌다.


겨우내. 그때는 남은 삶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봄이 되고 여름이 되고. 해가 일찍 뜨고 해가 길어지고. 꾀꼬리와 소쩍새와 검은 등뻐꾸기가 운다.

아가씨꽃과 찔레꽃이 핀다. 산딸기가 익어간다. 바람까지 잘 분다.

몸이 먼저 일어난다.


산에서, 동네에서 일흔 넘은 '레이디'들과 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뭐 또 이런 걸로 그렇게 엄살 부렸나 싶은 거다.


곤충들도 '환경에서 환경세계로' 나아간다는데,

나도 AI라는 환경에서 브런치라는 환경세계로 길을 텄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을 몸소 터득하고 실천하는 중이다.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노력 즉 나만의 코나투스 conatus는 글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