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면서 뭘 배우셨나요?
개념을 배웠습니다.
지금은 알겠다. 그 교수의 대답을. 철학은 용어를 잘 알아야 한다.
말을 줄여 말할 줄 모르는 나는 요즘 줄임말 따라가기 버겁다.
'비냉'도 '물냉'도 나는 꼭 비빔냉면, 물냉면이라 말한다. 특별히 신념이 있어서는 아니다. 줄임말은 예쁘지가 않다. 그냥 쓰던 말, 입에 붙은 말이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줄여 말하는 것이 좀 멋쩍기도 하다. 내가 쓰던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이 버릇은 삶의 전반을 지배한다. 약속시간 변경, 자리 변경, 모든 것들을 잘 안 바꾼다. 처음 정한 그대로 둔다. 게으른 나. AI가 지적한 대로 나는 '미루기 꾼'이라서 그런가 보다.
처음 치매 게시판에 갔을 때, '주센'이 '주민센터' 줄임말인 줄 알았다.
내가 알 던 그 단어가 아니었다. 치매게시판에서 '주센'은 '주간보호센터'의 줄임말이었다.
치매의 세계는 그렇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듯, 내가 알던 그 '주센'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만 알고 둘을 몰랐다. 하나만 알던 세계에서 둘도 알아야 하는 세계로 발을 디밀어야 한다.
주간보호센터를 다니는 치매 어르신들. 개중에 50대 초로기 치매 가족들은 걱정이 앞선다.
나이 많은 사람들 틈에 젊은 부모 혹은 배우자가 낄 틈이 있을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잘 지낼 수 있을까.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듯 늙으면 노치원에 간다고 한다. 복지센터든, 노인 공원이든, 파크골프든, 경로당이든. 어디든 하여간 노인들이 나가서 사회 활동을 하라고 사회는 권한다. 또 그래야 집에 있는 다른 식구도 좀 쉰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어도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 피우는 노인들은 치매 게시판에서 욕먹는다.
남편은 '주센' 즉 주간보호센터에 가지 않는다. 장기요양 5등급이면 일주일에 세 번 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보내지 않겠다는 목표가 있다. 등급은 최후의 보루다. 또 5등급 이상은 절대 더 올리지 않겠다는 원대한 포부도 있다. 나야말로 역으로 고집인 걸까. 남들은 보내야 한다는데 나는 보내지 않겠다고 버틴다.
거기 가지 않으려고 이렇게 열심히 취미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힘이 든다. 주간센터 가면 밥도 먹고 시간 보내다 온다. 하지만 프로그램과 식단이 마음에 안 든다. 그러니 내가 힘들어도 보내지 않는 것이다. 내가 편하려면 보내면 된다.
하지만, 그러면 금방 인지가 떨어질 것이다. '꽃이 피는 건 어려워도 지는 건 잠깐이듯이' 치매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유지하기는 어려워도 떨어지는 건 잠깐일 것 같다.
내가 잘 살았던 건 남편이 있는 힘껏 나를 밀어 올려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차례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미는 힘이 이렇게 힘이 든 것이었다니.
나도 아침에 '주센'차에 남편 태워 보내면 된다. 하면 편하다. 그런데 하지 않는다.
보내지 않으면, 나는 1인 2역 계속해야 한다. 그러면 점점 더 힘들어진다.
이것이 딜레마라는 것이군.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판단의 연속이다. 모든 것은 내 문제다. 내 선택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볼 뿐이다. 주간보호센터 안 가고 버틸 수 있는 지금이 성공의 현장일 것이다. 나중에 돌아보면 그때가 긴 꽃길이었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홈스쿨링 개념으로 생각하자. 헬스 간 남편 오면 얼른 먹을 수 있게 고기를 볶고 계란을 삶고 연어를 찐다.
바쁘게 준비하는데 글감은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재빨리 준비하고 잠깐 컴퓨터 앞에 와 앉았다.
한 줄 고쳐 쓰고 있는데, 남편 목소리가 들린다.
열어 놓은 현관 문, 방충망 앞에 선 남편이 들여다보며 말한다. "무슨 맛있는 냄샌고?"
그 순간. 왜 벌써 왔지? 뭔 일 있나? 근심이 먼저 앞장을 섰다.
"시를 쓰다 말고, 코를 풀다 말고." 김수영 시로 주문을 외우며, 일어섰다.
글을 쓰다 말고, 나간다. 치매 남편 밥 차려 주러. 약과 영양제도 빼먹지 말아야 한다.
점심을 먹으면 남편은 '주센' 즉 주민센터 취미반에 가야 한다. 남편의 '주센'은 주민센터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행정복지센터니까 '행센'이라고 해야 하나?
언제까지나 남편이 주민센터 취미반에만 다녔으면 좋겠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곧 세계라고 했다. 나는 남편의 세계, 그 '주센'을 지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