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은 노루처럼

단독자로 살기

by 채송화

내 시간을, 내 스케줄을 남이 쥐고 있는 것. 제일 싫다.

어릴 때도 그런 적이 있다. 언니가 돈가스 사준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언니가 안 온다.

마루 끝에 앉아 울었다. 엄마는 곧 올 테니 걱정 말라했다. 지치고 서럽고 화가 나고 이제 줘도 안 먹는다는 결심까지 치달을 때, 언니가 왔다. 감정은 다 상하고. 어린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돈가스가 아니다. 좋아하는 언니와 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것. 그 기다림의 시간, 감정은 중노동을 했던 것이다.


남편의 일정을 알려주는 단체카톡을 기다릴 때도 그렇다. 나는 고슴도치처럼 아니, 그보다 더 지독하게 온몸에 독가시를 바짝 세우고 폰을 노려본다. 지친다. 팽개친다. 한참있다가 톡이 온다. 엉뚱한 소리를 한다. 앞 뒤 다 잘린 암호 같다. 해석을 잘해야 한다. 그 와중에 전화가 온다. 얼른 남편을 바꿔준다. 옆에서 들어본다.


자유시는 자유시대로 하고, 같이 듀엣으로 지정시를 낭송하자는 요지다. 나는 그제야 돋친 가시를 내린다.

내가 손으로 OK표시를 한다. 남편도 오케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더 잘됐네. 원플러스원이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그렇지. 남편을 빼고 그러지는 않겠지. 그럼에도 남의 손에 달려 있는 남편의 일정. 간당간당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임박해 오고 있음이 느껴진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다시 설명해 준다. 여차저차. 다음 주에 자유시를 하나 낭송하고, 지정시는 총무와 둘이 한 장씩 읽는다. 남편도 알았다고 한다. 늘 같이 다니는 총무와 총무보조 남편. 시낭송 단짝. 차도 얻어 타는 사이. 사춘기만 또래친구가 중요한 건 아니다. 중년 이후 같은 취미를 갖고 있는 또래 친구들 역시 중요하다. 그 무리에서 벗어난다는 건... 아직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벌어질 현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예감은 언제나 다가올 현실보다 앞서는 법.


도전하겠다며 한 달을 외운 시, <채송화> 낭송하는 날. 송찬호 시인한테 사인받겠다며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까지 챙겨간 남편. 택시를 태워 보냈다. 너무 일찍 갔다고 나한테 전화한다. 내가 뭘 해 줄 것도 없다. 시 외우면서 기다리라 말할 뿐. 잠시 후 남편한테 카톡이 왔다. 회장과 현수막도 달고 잡일을 한 것 같다.

남편이 바쁘면 나도 바쁘다. 남편 일정에 맞춰 중간중간 위치추적을 했다. 저녁을 먹는지 다른 동네에 가 있다. 1시에 나간 남편은 8시 넘어서 집에 왔다. 지쳐 보인다. 잘하고 왔냐고 물었다. 잘하고 왔다고 말한다.

남편 휴대폰을 살펴봤다. 카톡이며 통화목록을 확인했다.


올 것이 오고 있구나 싶었다. 행사 끝나고 회원들은 저마다 회식자리로 간 모양이다. 남편 혼자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행사 후 미처 챙기지 못한 짐까지 남편이 챙겨 택시 타고 뒤따라 간 흔적이, 통화기록으로 남아있다. 행사 치른 짐이 남아 있다고 남편이 말하자 회장은 답답해한다. 총무는 왜 남편을 안 데려갔는지, 왜 남편은 혼자 떨궈졌는지, 행사 후 남은 짐은 왜 거기 그대로 있는지. 회장도 나처럼 답답해하다가 목청도 높였다가 한다. 회식 장소도 몰라 몇 번이나 회장과 통화한다. 회장이 택시기사를 바꿔달라 한다. 기사가 주소를 입력한다. 통화를 듣는 내가 다 힘겹다. 행사 끝나고 남겨진 짐과 남편이 마치 버려진 한 쌍 같다.


8시 넘어 집에 온 남편은 일기도 쓰고, 생활글도 썼다. 10시 취침시간 엄수. 십분 일찍 잠자리에 든 남편.

고단했는지 코를 골며 잔다. 10시 반에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베란다에 나가 본다.(치매에 전자파가 안좋다해서 저녁에는 기기들을 베란다에 둔다) 회장이다. 이 시간에 왜 전화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전화 못 받았다고 카톡을 보낸다. 어제 수고했다고 회장한테 답장이 왔다. 남편은 전화를 해 본다. 회장이 받는다. 어제 수고했다고 서로 인사하고 끝는다. 어젯밤 전화는 별 일 아니었나 보다.


단체카톡이 싫어서 읽지 않을 때가 좋았다. 자격지심. 치매의 자격지심이 널을 뛴다.

끌려다니지 않고 혼자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카톡 한 번의 소리에 가슴 졸인다. 카톡이 오기를 기다리게 된다. 이제 카톡 소리는 무리와 연결해 주는 신호음이다. 더 이상 이전의 귀찮았던 소리가 아니다.


치매게시판에 일자리를 놓고 싶지 않은 사연이 올라왔다. 초로기치매 진단받은 지 석 달도 안 됐다한다. 아직은 계속하라는 의견이 많다. 사회 활동이 곧 인지활동이라는 것을 모두 다 안다. 그러나 민폐라고, 이기적인 것이라고, 당장 그만두라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마치 치매환자가 인간 무리에 섞인 좀비라도 되는냥 치를 떠는 것 같았다. 치매 진단받았다고 칼로 무 자르듯 당장 하루아침에 사람이 좀비로 변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워킹데드>에서 좀비로 변한 엄마가 그리워 오열하는 어린아이에 공감하는 것이다.


독일은 '구호 불이행죄?'라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돌봐주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도 있다던데. 우리는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숙청하는 문화가 강한 건가? 예전에 동네에 바보니 미친놈이니 있었다지만 지금은 없다지. 휴지 하나 없는 깨끗한 거리. 프랑스는 거리에 개똥도 많고 쓰레기도 많다던데. 내가 이 처지가 되고 보니 깨끗한 거리가 섬뜩할 때가 있다. 긴병에 효자 없다더니, 프랑스 시위가 긴 복지 때문인지 한국서 '나라미' 타먹는 내 눈치가 천리만리다. 미셸 푸코의 정상과 비정상, 소외와 차별, 감시와 처벌의 담론은 나를 두고 나온 철학인가 싶을 정도다.


오래전에 본 다큐에서 노루가 헤어지는 장면을 봤다. 어미와 서로 등을 돌린 채 각자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건 그런 걸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미를 등지고 지는 노을 속으로 걸어가는 그 순간부터 어린 노루는 더 이상 '어린네'가 아니다.

어른이 되었다지만 어린 노루만도 못할 때가 많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고 언제까지 애를 써야 할까. 언제까지 애를 쓸 수 있을까.


젊을 때 그렇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처럼 살고자 했었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도시에 미련을 떨게 될 줄 정말 몰랐다. 가난할수록 서울서 살아야 한다는 말에 심하게 꽂힌다.


어젯밤에 순록이 내 손가락을 깨물며 나를 덮치는 꿈을 꿨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남편 일정에 깊게 이입했다가 악몽까지 꾸다니. 나도 어지간히 고단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