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만의 무대를 갖고 있나요
올해는 나의 낭만을 찾겠다는 다짐을 했던 최근의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야구를 보기 위해 KTX표를 끊은 것이었다.
나에게 야구는 인생에서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꿈이자, 일이었고, 스트레스다.
야구를 좋아하다 보니 흘러 흘러 야구를 중계하는 일까지 했었다.
덕업일치의 삶은 너무나도 즐거웠지만, 때로는 버겁기도 했다.
열정이 불타오르다가 때로는 불살라지는 아픔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던 중 회사의 이유로 인해 다른 업무로 옮겨지게 되었고,
지금은 그 시절을 막연히 그리워만 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잊고 있던 낭만을 찾던 내가 야구 전 구장 투어를 하기로 결심한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처음 방문한 창원은 맑고 쾌청했다.
몇 달 전 구장에서 있었던 슬픈 소식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산타의 선물보다 더 소중한 부모님과의 추억을 쌓으려는 아이들이 구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경기는 뜨겁고 즐거웠다.
응원하는 팀이 모처럼 대승을 거뒀고, 내 성대와 손의 아픔을 희열과 맞바꿨다.
세상의 모든 에너지와 엔돌핀이 얽히고 섥히며 서로를 비난하고 재촉하기도 했지만, 승리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알고 있기에 이해하며 함께 웃었다.
그렇게 마주한 경기의 끝, 나는 이상할 만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남들처럼 끝나고 나오는 선수를 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한때는 나만 즐기고 있다 여겼던 야구장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살다보면 남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들이 있다.
야구장에선 경기를 뛰는 선수들, 그리고 어쩌면 주인공보다 더 많은 카메라와 함께 하는 치어리더들이 그렇다.
사실 스포츠던 회사던 어쩌면 당연하게도 전면에 나서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 선수를 보좌하는 스태프, 현장 매니저,
치어리더를 관리하는 구단 관계자, 방송을 찍는 방송사 직원 등 더 많은 이들이
각자 다양한 이유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한 그들이,
경기가 끝난 그라운드를 메워간다.
그라운드를 불태웠던 이들이 사라지고, 그들을 보았던 이들이 보이는 시간.
내일을 위해 마운드에 묻은 흙을 정비하고 안전 펜스를 옮기고 카메라를 치운다.
아무도 없는 그라운드에서 선수 입장 소개를 연습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구장을 메우기도 한다.
각자의 사명과 각자의 낭만이 경기 이후에도 꺼지지 않고, 아니 불이 꺼져가는 그라운드를 다시 밝힌다.
재밌는 일이다.
매일 저녁 6시 반, 야구장의 무대는 사실
모두에게 허락되지는 않는다.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수많은 아이들이 게임기보다 무거운 야구 배트와 글러브를 들었고,
그 옆에서 부모의 청춘도 녹아내렸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어느새 그 무대에 오르는 것만이 의미 있는 삶이라 믿고,
보여지고, 주목받는 자리에 서기 위해
서로를 재촉하며 달려온 건 아닐까.
하지만 어쩌면 그 그라운드를 오르는 건,
다들 몰라줘도 나만의 묵묵한 싸움을 하고 있는,
몇 만 명의 에너지가 없이도 혼자서 스스로 빛나는 낭만이 가득한,
소중한 일터를 자신만의 무대로 여기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다.
어쩌면 진짜 무대는,
수많은 경쟁 끝에 얻는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누구도 보지 않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 걸음 속에 있는 건 아닐까.
몇 년 전의 나는 왜 그리 저 무대에 오르고만 싶었을까?
그리고 무대를 떠나버린 지금의 나는, 그 무대에 다시 오르고 싶은 걸까?
나는 꼭 배트를 쥐어야만 무대에 다시 오를 수 있을까?
낭만을 찾으려 떠난 여행,
창원에서 잊고 있던 나의 낭만이 조용히 인사를 한다.
그리고,
그때의 그리운 내가
지금의 나를 살포시 위로해주고 있다.
우리의 낭만은 오늘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스스로의 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