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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인연이 만들어 나가고 있는 20년 간의 인간 승리

희로애락의 비밀 - 1. 희

by 아비치크


1. 희


나의 인연 중 가장 독특한 사람을 꼽으라면,

이 아이가 먼저 떠오른다.


아득한 옛날, 대학교 1학년 여름.

어설프게 안착한 사회라는 곳에 적응하고자

처음 맞이한 기나긴 휴식, 첫 여름 방학을 학원 아르바이트로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교묘히 이용하던 선생님 밑에서

그 시간을 견디게 해준 건

함께 일하던 친구와, 그 친구를 좋아했던 웃긴 꼬맹이들,

특히 중학교 2학년의 그 제자였다.


수업이 끝난 뒤 퇴근하려던 우리에게,

마치 맡겨둔 것처럼 초코비를 사달라던,

건방지만 귀엽게 당당하던 그 아이는

사실 남들보다 조금 빠른 비행을 출항했었다.


내가 태어나서 본 적 없는 점수를 들고 오기도 했고,

학생 신분으로도 술을 마시다 곤경에 빠지기도 했던,

학창시절의 비행기를 알록달록 에피소드로 가득 채울 줄 아는 아이였다.


하지만 빠른 비행 덕분에 목적지를 찾은 것이었을까.

알게 모르게 그녀는 그 새하얗고 동그란 얼굴처럼

때 묻지 않고, 바르게 자라기 시작했다.

의외로 아주 놀라울 정도로.


(사실 놀라웠던 이유는 그녀를 둘러싼 다른 이 때문이었다.

그녀의 베프였던 한 친구의 이야기는 지금은 들리지 않지만,

수많은 문신과 피어싱, 그리고 걸어간 진로를 살펴보면

'틀리지 않지만' 너무나도 '다른' 길을 걸어갔으리라 짐작된다.)


더 흥미로웠던 건 그 다음이었다.

매년 스승의 날 자정이 되면 가장 먼저 카톡을 보내오던 아이.

대학교 진학, 첫 입사, 이직 때마다 뜬금 없이 연락해

"쌤,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던,

여전히 건방지고도 솔직한 아이.


그 맹랑함이 좋아서 매번 도왔고,

나를 여전히 '쌤'이라고 불러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래도 나라는 사람이 사회에 무엇인가를 남겼구나,

사람 하나를 구원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해주는 존재였다. 하하.


하지만 세월이 세월일까.
5월 15일이 언젠가부터 조용히 지나가고

이제는 옛 추억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어느 날,

다시 연락이 된 그녀와 식사를 하게 되었다.


방긋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쌤, 저 원하던 ###에 합격했어요. 다음 주면 현장 배치에요."


놀라웠다.

그녀의 이야기가, 그 존재 자체가.


그저 아이로만 보던 친구가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원하던 것을 이루어냈다.

지하철 조차 탈 줄 몰라서 약속 장소를 못 오기도 했고,

여전히 길가를 헤메는 초등학생 같은 친구지만,


그녀의 진로를 걱정했던 생각들을 비웃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최선의 결과를 이루었던 그 머나먼 옛 이야기처럼,

그녀는 또 한 번의 착륙을 성공해냈다.


예전의 일탈로 매번 놀리는 나에게

"그만 좀 놀려요."하면서도

"그때 실컷 놀았으니까 지금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해요."라고

말하는 그 웃음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나라는 사람이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지 모두가 알고 있을까.

자신의 잠재력을, 때로는 지금이 나의 전성기가 아님을 알고 있는 걸까.


인연이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 걸까.

10년 후의 우리는 어떠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그리고 그때에도 나는 '쌤'이라는 단어를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때마침 호프집의 배경으로 나오던 '인 타임'이란 영화의 주제는 '시간'이었다.

그녀가 걸어온 시간, 그리고 내가 걸어온 시간은 과연 같았을까.


어쩌면 그 많은 유혹과 어려움의 나날들을

당당히 거절하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앞으로 맞이할 그 수많은 전성기의 나날을 행복하게 보낼

그녀의 '희'에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1년 안에 할 수 있는 것은 과대평가하고,
10년 안에 할 수 있는 것은 과소평가한다.
-빌 게이츠


우리의 '희'는 무엇일까.

하늘에서 떨어진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긴 시간 끝에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였을까.


그 수많은 시간 속에서

내가 준비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

10년 전의 나를 떠올리며

지금의 나에게 소름이 돋는 순간이 찾아올 때.


나는 오늘도, 언젠가의 또 다른 '희'를 위해

이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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