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 되어 퇴직을 하고 처음 맞는 스승의 날이다. 6학년이 된 마지막 해 제자들이 3월부터 수차례 전화를 했다.
스승의 날 뵙고 싶어요, 학교로 오시면 안 돼요?
멀리 여행을 간다고 했다.
스승이라는 말을 들으면, 또 스승의 날이 가까이 오면, 묘한 감상에 젖곤 한다. 스승이라는 말이 살아있던 낭만의 시절을 지나와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일이다. 친구와 단둘이 역곡에서 부천으로 이어지는 경인철도 철길을 걷고 있었다. 아직 동네에 꽃집이 없고 학교 앞 문구점에도 카네이션을 팔지 않던 시절, 우린 부천 시장까지 가기로 했다. 기차가 올까 봐 종종 거리며, 두려운 듯 뒤를 보며, 우린 달렸다. 열 살짜리 꼬마들이 가기엔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어찌어찌 꽃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 아뿔싸, 한바탕 소낙비가 내렸다. 우산이 없는 우린 비를 쫄딱 맞았다. 애써보았지만 카네이션을 감싼 흰 창호지는 비에 젖어 찢어지고 하늘거렸다. 기억은 거기까지다. 스승의 날이 오면 불쑥 이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선생님에 대한 인상 깊은 장면들이 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일이다. 담임 선생님은 아기를 낳았고, 한 달 동안 임시 담임 선생님이 오셨다. 임시 담임은 키도 크고 서글서글한 분이었다. 한 달은 빠르게 지나갔다. 떠나는 날 선생님은 어린이 하나하나 손을 붙잡고 우셨다. 우리도 울었다. 그 눈물만으로 선생님이 우리를 몹시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스승이라는 말이 가슴에 아름답게 새겨진 건 이때부터인 거 같다.
기억을 더듬어 초등 2학년 때까지 거슬로 올라가 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다. 전근 간 선생님을 보러 한 시간 가까이 걸었다. 혼자 부천의 번화한 도시 학교로 찾아간 것이다. 선생님은 짜장면을 사주셨다. 기쁜 마음을 안고 한 번 더 찾아갔다. 복도에서 쭈뼛거리며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선생님은 나머지 공부하는 어린이 둘을 어깨동무를 하며 다정하게 가르치고 계셨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 이제는 나의 선생님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도저히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울면서 돌아왔다.
어린 시절을 지나 교대를 졸업하면서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사십여 년 어린이를 가르쳤다. 희미해질 때도 있었지만 퇴임에 가까운 나이에 이르면서 '스승'이라는 말을 하루하루 깊이 새기게 되었다. 스승이 사라지는 시대라 더 이 말을 간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초임 시절부터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거 같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리워지는, 어린이들에게 그런 선생님이요 스승이 되고 싶었다.
스승의 날이, 스승이라는 말이 얻어맞고 빛바래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스승의 날이면 편지를 들고 찾아오는 어린이들이 있었다. 분명 담임 선생님이 시간을 내줘서 편지를 썼을 것이다. 괜찮았다. 편지를 쓰는 시간만큼은 선생님을 떠올렸을 테니 그걸로 족했다.
편지 중에는 유난히 반가운 편지가 있었다. 구석에 혼자 있던 어린이, 좀처럼 친구를 사귀지 못해 외로웠던 제자의 편지들이 대게 그렇다. 정성 들인 글씨, 아이스크림과 숟가락까지 그린 그림들을 보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렇게 어린이들 편지로 명맥을 이어가던 스승의 날은 갈수록 아무것도 아닌 날이 되어 갔다. 스승에서 멀어진 교사도 늘었고, 교사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늘었다. 이제 스승이라는 말은, 스승의 날은, 적어도 어른들에게는 불편한 말이 되고 말았다.
좀처럼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어린이들에게 스승이고자 했다.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좋은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린이들에게 사탕이나 과자가 아닌, 게임이나 영화가 아닌, 정신을 높고 깊게 하는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그림책 <부엉이와 보름달 >의 아버지처럼, 어린이 마음을 설레게 하면서도 높고 깊은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부엉이와 보름달>의 그림책 속 아버지는 얼음 손이 등을 쓸어내리는 듯 한 겨울날, 자녀를 데리고 흑림과 같은 깊은 숲으로 갔다. 어린이는 말 없는 아버지 뒤를 따라 춥고 조용하고 무서운 산길을 걸어야 했다. 어린것은 끈기 있게 기다렸고 결국 부엉이와 마주치게 되었다. 어린이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스스로 얻은 용기에 자부심을 갖는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이제 말을 해도 된다고 했지만 어린이는 말없이 걸었다.
이제 어린이들에게 명절을 기다리는 간절함 같은 건 없다. 어린이날이 되어도, 갖고 싶은 간절한 무엇이 별로 없다. 그저 스마트폰 교체나 비싼 게임기 정도가 바람이다. 일상에서 부모와 이모, 고모,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수시로 선물을 건네서 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유년기와는 많이 다른 어린이들을 보면서 깊은 숲 부엉이를 보는 듯한, 그런 선물을 주려고 애썼다.
퇴임을 한 지금, 이제 교실도 어린이도 없는 스승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린이들에게 색종이 카네이션조차 받을 수 없는 낯선 지점에 도착한 것이다.
선생님을 찾던 소란했던 전화벨 소리는 막상 스승의 날이 되자 조용했다. 짐작은 했지만 쓸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이런저런 일을 더듬으며 추억을 되새기고 있는데 뜻밖의 방문객이 있었다. 그가 카네이션이 꽂힌 유리 꽃병을 들고 왔다. 퇴임지 학교에서 가까이 지내던 후배교사였다.
마흔이 조금 넘은 그녀는 2년간 동학년을 했던 사이다. 그녀는 날마다, 거의 거르지 않고 오후가 되면 교실로 찾아왔다. 우린 그날 수업 이야기며, 어린이들이 쓴 글이나 작품 이야기, 읽어줄 만한 그림책이나 동화 이야기를 끝도 없이 했다. 그녀는 칠판에 내걸었거나 교사용 책상에 쌓아놓은 어린이들 작품을 하나하나 살피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궁금한 것을 묻기도 했다. 바빠서 못 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출입문을 수시로 바라보며 그녀를 궁금해했다.
그녀는 나의 경험과 실천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출판했던 책을 밑줄까지 그어가며 탐독했고 그대로 실천을 했다. 그 결과도 말해주었다. 수업과 독서 지도, 학급운영, 그 모든 것을 물어왔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진심을 다해 답해주었다. 머리 희끗한 노교사를 아무도 찾지 않는 시대였으니 나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다른 학교로 떠났다. 서운함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더 이상 그런 시간을 나눌 수 없게 되어 아쉬웠다. 종종 전화하며 만나기도 했지만 이전 시간을 대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퇴임 이후 첫 스승의 날을 맞았다. 그날 교실이 아닌 아파트 거실 가득 벨이 울렸다.
'공동현관에서 호출신호가 왔습니다'
그녀가 찾아왔다. 손에 들려있던 꽃병을 창가 테이블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스승의 날! 왜 나를 기억했는지, 꽃을 들고 찾아올 생각을 했는지 묻지 못했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우리가 맺어온 유대관계는 매우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옆반 동료교사에게 업무연락을 할 때나 상담요청을 할 때에도 교실 문을 두드리는 일은 이제는 드물어졌다. 교내 공적인 톡망을 이용하거나 카톡, 드물게는 교실 유선전화로 해결을 한다. 긴급한 고민이 있을 때조차 교사들은 교사용 커뮤니티를 사용한다. 누군가 찾아오고 찾아가는 일이 낯선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태에 우리가 만나는 방식은 이제 새롭기까지 했다. 그녀는 고백했다.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리 연수를 받아도 독서교육을 시작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이 너무나 낯설었다고 했다. 그런데 오래도록 그런 일을 해온 노교사가 있으니 기쁜 마음으로 찾아오고 묻고 했던 것이다.
전근을 간 뒤 한동안 수시로 찾아와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그녀는 이제 본인 교실로 찾아오는 후배교사가 있다고 한다. 노교사에게 배운 많은 것들을 이제 후배교사에게 물려주고 있는 것이다. 난 나를 스승으로 대해주던 그녀가 어린 후배들의 스승이 되기를 바란다. 스승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시대에 묵묵히 스승의 길을 가주기 바란다.
그렇게 그녀가 돌아가고 하루쯤 지났다. 후배 둘이 연락을 해왔다. 교직 경력 5년쯤 되는 후배들이다. 이 후배들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애틋하다. 이들의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 후배는 교단 시작부터 광풍을 경험했다. 1,2등으로 공부만 하던 이들은 민원 전화 한 번에 호흡이 멎기도 하고 무릎이 꺾이기도 했다.
여린 풀꽃 같은 후배교사를 동구에 있는 느티나무처럼 되도록 돕고 싶었다. 이들은 꽃을 들고 찾아온 그녀와는 사뭇 달랐다. 모든 일을 SNS나 통신망으로 해결하는데 익숙해진 세대의 젊은 교사였다. 이들은 방과 후 시간이면 교실에 혼자 있었다. 화장실 다녀오다 살짝 보면 혼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곤 했다. 능히 짐작할만한 일을 겪었을 텐데 하루 일을 어떻게 삭히며 앉아있는지 걱정도 되고 궁금도 했다. 용기가 필요했다. 먼저 교실을 찾아가 손을 붙잡고 내 교실로 데려왔다. 우리는 수업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레 시와 그림책 동화 이야기로 넘어갔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어린이와 학부모를 어떻게 이해하고 맞이할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시간이 흘러가는 듯했다. 후배 둘 가운데 한 분이 민원으로 깊은 상처를 받는 일이 생겼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좀 더 기운을 주고 싶었다. 조심스레 아침 독서모임을 제안했다. 그림책이나 동화 동시를 읽고 보며 서로의 생각을 나눠보자고 했다. 나와 후배 둘은 그렇게 일 년 넘게 월요일 아침 7시 무렵이면 무인카페에서 한 시간씩 '출근 전' 책모임을 했다.
물을 뚝뚝 흘리며 젖은 머리로 카페 문을 열던 후배, 어머니 차를 타고 허겁지겁 달려오던 후배는 차츰 시간에 맞게 도착했다. 월요일 아침이라는 힘겨운 시간에 어린 후배들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모였다.
우린 돌아가며 가져온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행하는 '다꾸 꾸미기'를 적용하여 스티커와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가며 이쁘게 독서록도 꾸몄다. 그냥 그대로 이 시간은 힐링이었다. 교직 3년 차 후배는 교직생활 내내 흥미도 없고 무기력했다며, 월요 책모임이 설렘과 열정을 갖게 만들었다며 웃었다.
퇴임하면서 모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후배 둘은 모임을 이어가겠다고 했고 지금까지 열심히 하고 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불현듯 찾아갔다. 참석하지 못한 날들은 밴드를 통해 후배들 모임을 보며 답글을 달곤 했다. 얼마 전에는 공개수업을 앞두고는 수업에 대한 고민을 나누었다고 했다. 내가 없으니 서로 더 의지하면서 연구를 하는 듯했다. 공부도 공부지만 맛난 아침 식사 같은 간식도 돋보였다.
꽃을 가져온 후배가 돌아간 뒤 전화했던 어린 후배 교사는 아담한 골목에 자리 잡은 음식점으로 나를 초대했다. 연남동이나 성수동 분위기를 닮은 브런치 식당이었다. 자리에 앉자 후배 둘은 뭔가를 꺼냈다. 책자 모양의 스승의 날 기념 카드였다.
-와, 어떻게 이렇게 했지!
-선생님한테 배운 대로 했어요.....
나는 자주 빈티지 다이어리를 쓰고 있었는데 그게 습관이 되어 꽃을 들고 온 그녀나 어린 후배교사들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에는 예쁜 카드를 만들어주곤 했다.
크라프트 종이에 흰 펜이나 검정펜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실로 꿰매거나 펀지로 구멍을 뚫기도 했다. 그걸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 것이었다. 생각지 않은 선물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편지는 따뜻함, 감사의 마음,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다짐이 들어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후배들에게 좋은 선배가 되겠다는 문장이 마음에 다가왔다. 젊은 후배들에게 주고 싶었던 마음이 뿌리를 내린 듯하여 행복했다.
우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준비한 그림책을 아침 모임 때처럼 읽어주기도 했다. 챗gpt와 같은 ai에 대한 고민도 나누었다. 후배들과의 시간은 나의 첫 교단을 생각나게 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함께 하는 기분이었다.
우린 오래오래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후배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마음이 아릿했다. 그들이 앞으로 살아가며 교단에서 겪을 일들이 스쳐가서였다. 단단하게 헤쳐나가도록 우리 신화에 나오는 '오늘이'를 돕는 '마고할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도 그녀들처럼 어느덧, 긴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