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 3분

수원 가는 길

by 강승숙

수원에서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다. 차를 가져가면 적게 걸리지만 전철을 타면 훨씬 오래가야 한다. 짐작한 대로 남편은 전철을 타자고 했다.


지하철앱을 열어 출발지에 남춘천, 도착지에 수원을 입력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긴 시간이 표시된다. 남편은 대만까지 갈 수 있는 시간이라며 웃었다.


우린 수원 가는 길을 긴 기차여행을 하는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소설을 한 권씩 골라 각자 배낭에 넣었다. 나는 민트색 손바닥 수첩과 펜을 챙겼다. 아껴두었던 캔 커피도 가방에 넣었다.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남춘천에서 전철을 탔다. 전철은 텅 비어있었다. 기차 한 칸을 전세 낸 기분이었다. 남편은 낭만에 젖은 듯 말없이 창 밖을 보기도 하고 챙겨간 소설, '봄날의 이야기'(오정희, 삼인)를 읽기도 했다. 나는 뉴스를 조금 보다가 민트색 수첩을 꺼냈다. 뭐라도 써 볼 작정이었다. 여행이 끝나면 어떤 이야기가 모여있을지 조금 설레기도 했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적어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어있던 전철 좌석이 하나 둘 채워졌다. 통로에 사람이 들어서면 그림 그리는 일이 어려워질 듯하여 그림부터 그리기로 했다.


여중생으로 보이는 청소년 셋이 눈에 들어왔다. 저마다 폰을 보면서도 뭔가 흥미로운 게 나온 듯 서로 보여준다. 같이 보며 웃는다. 맑다. 풋풋하다. 이들은 구리에서 내렸다.


남편 찍음


남편 찍음


어느덧 통로에도 사람들이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잠을 청하는 두셋 빼고는 거의가 묵묵히 스마트폰에 몰두한다.


게임을 하거나 숏츠 같은 영상을 본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거 같기도 하다. 부지런히 톡을 하는 이들도 있다. 모두 여기 있지만 다른 세계와 접속 중이다. 이 일사불란함이 외계에 온 듯 갑자기 낯설어진다.


남편은 어느덧 소설 읽기에 골몰하고 있다. 소설 표제작 '봄날 이야기'를 읽는 중이다. 귓속말로 말해준다. '오정희 선생님의 글이 더 좋아졌어. 사유가 깊어진 거 같아.' 남편은 한 페이지를 오래 읽었다. 느리게 페이지를 넘겼다. 궁금해서 살짝 들여다보기도 했다.


오정희 선생님,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작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남편과 나에게는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작가이다. 소실집 <봄날 이야기>는 최근에 나왔다. 젊은 날이 아닌, 나이가 들어 펴낸 작가의 소설, 그 무게와 깊이가 사뭇 궁금하다.

남편은 수시로 인상 깊은 장면을 짚어가며 보여주었다. 그러더니 '밤의 끝까지 걸어가면 아침이 되는 거야', 이 문장은 직접 읽어주기까지 했다.


갑자기 애가 닳았다. 남편이 손에 쥐고 있는 소설을 얼른 읽고 내게 넘겼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독서는 아주 느리기에 돌아올 때나 되어야 내 차례가 올 듯하다.



다시 민트색 수첩을 펼쳤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여자를 그리기로 했다. 여자는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다. 다른 이과 다를 바 없이 핸드폰을 보며 중요한 일이라도 하듯 뭔가를 쓰거나 터치를 했다.


남편 찍음


여자를 유심히 보게 된 것은 레트카펫 자리에 앉아서다. 한 번도 그 자리에 앉을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레드카펫의 주인이 아닌 이들이 앉아 있을 때마다 불편했다.


삐딱한 마음으로, 그러나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여지를 남겨두고 여자가 레드카펫에 앉은 까닭을 탐구해 보았다.


여자는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은 데다 흰 셔츠에 검정 정장을 하고 있었다. 차림으로 보면 뭔가 단정한 차림을 해야 하는 일터에서 일을 하거나 중요한 행사를 금방 마치고 온 것으로 보인다. 분위기로 봐서는 레드카펫에 쉽게 않을 사람 같지 않다. 그런데 천연덕스레 앉아있다. 그래서 더 묘하다.


임산부로 보이지는 않았다. 생리 중일까 생각도 해 보았다. 경로석에 쓰러져 쉬고 싶을 만큼 생리통을 겪은 나로서는 그 힘든 정도를 알기에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에는 피로나 통증의 기색이 비치지 않았다.


플랫폼에서 폰을 보다 전철 문이 열리는 바람에 무심코 들어와 생각 없이 레드카펫에 앉은 걸까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앉아서 발을 디딘 바닥이 진분홍이라 무심코가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영 까닭을 모르겠다. 어느덧 승객이 차면서 여자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여자에 대한 생각도 그대로 멈췄다.


드디어 수인 분당선으로 갈아탔다. 더 이상 갈아타지 않아도 된다. 종착지에 가까워지니 조금 들뜬 기분에 젖는다. 내가 선 자리에 나이 든 여자 셋이 앉아 있다. 맨 왼쪽 여자는 하늘하늘한 분홍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목둘레는 여러 겹의 레이스로 꾸밈을 했는데 상당히 여성스럽다.


언뜻 얼굴을 보았는데 미모도 있고 화장도 세련되게 했다. 여자를 그리려는데 아쉽게도 가운데 여자와 같이 일어선다.


남편 찍음


두 여자가 일어선 자리에 운 좋게 우리 부부가 앉혔다. 분홍 원피스 아주머니를 놓친 아쉬움이 있었지만 대신에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그리기로 했다.


일흔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운동을 꾸준히 했는지 군살이 없어 보였다. 녹색 계열 옷을 센스 있게 입었다. 눈치채지 않게 그리고 있는데 왼편에 앉은 아주머니가 내 그림을 힐끗 본다. 몇 번 그렇게 보더니 어쩌면 그렇게 닮게 그리냐며 칭찬을 한다. 그렇게 해서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다.


할머니는 수내역에 사는데 오리역에 송편을 사러 간다고 했다. 송편 생각에 행복해지는지 할머니는 송편 얘기를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손가락까지 펴가며 네 개에 3500원 하는데 정말 맛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금방 일어섰다. 둥글둥글 귀여운 분이셨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떡은 당이 많이 오르니까 조금씩 드시라고 했다.


잠시 가만히 있는데 여자 한 분이 담요를 걸치고 지나간다. 무릎 담요가 좀 두껍다는 생각은 했지만 전철 실내에 찬기가 돌고 있기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얼굴이나 머리가 언뜻 보아도 말끔한 편이라 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담요 두른 여자를 스치듯 보고 다시 글을 쓰는데 여자의 담요가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어느새 여자가 내 부근에 와있었다. 방금 전철에서 내린 뒤 내가 있는 쪽 문으로 다시 들어온 듯했다.


쓰기를 멈추고 이상한 기운에 눈여겨보았다. 여자는 수시로 움직였다. 앉을만한 자리를 찾는 거 같지는 않았다. 그냥 가만있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는 거 같았다.


여자는 결국 출입문 쪽으로 왔다. 이번에는 내리려는지 출입문에 가까이 섰다. 곧 내릴 사람이 이전까지 왜 그랬는지 더 아리송했다.


무심히 담요가 늘어진 쪽으로 눈을 주고 있었는데 여자의 해진 바지가 보였다. 멈칫했다. 처음에는 그저 모양을 내려고 바지를 뜯었나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속으로 허연 천이 드러나는데 마지 겨울 내복처럼 보였다.


점입가경이었다. 신발은 에나멜구두처럼 번쩍였는데 다름 아닌 비닐로 친친 감아놓은 것이었다. 비로소 이분이 노숙자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등이나 손에 짐 따위는 없었다. 고민하는 사이 전철이 멈췄고 여자는 내렸다.



여자가 내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긴 3시간 3분의 여행이 끝난 것이다.


여행은 지루하지 않았다. 도착 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는 아쉽기까지 했다. 그만큼 순조롭고 흥미로운 여정이었다.


3시간 3분을 여행이라고 설정하는 순간 이동의 질감이 달라졌다. 우리는 이 시간을 보낸 게 아니라 지낸 것이었다.


잠깐 스쳐간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을 통해 인생의 콜라주 같은 단면들 만난 듯했다.


풋풋한 웃음을 짓던 중학생, 떡의 유혹에 이끌려 떡집을 찾아가는 할머니, 안식을 찾지 못해 수 없어 허둥대던 담요 여자, 레드카펫에 앉았던 여자...... 3시간 3분은 단편 영화였다.


수원역에서 내렸다. 큰오빠가 양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남편과 끌어안는다. 이제 가족과 함께 하는 또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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