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가는 길에 만난 여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듯 오늘도 묵묵히 공지천(춘천)을 따라 걸어 마트를 다녀온다. 지루한 날도 있는데 5월은 날마다 걸어도 좋다. 짝짓기를 하는 비둘기는 부리를 비벼대고 물오리들은 물을 튀기며 논다. 왜가리는 수묵병풍에서 나온 듯 연회색 날개를 펼치며 물가로 날아든다. 아카시꽃은 바람에 흔들흔들 그리운 향을 뿜어낸다. 어제 보지 못한 꽃이 오늘 고개를 내민다.
*나도냉이
식물에 좀처럼 관심이 없던 남편도 이제는 먼저 사진을 찍고 식물 이름을 알아본다. 엊그제는 나도냉이와 참새귀리 이름을 새로 알아내고는 그렇게 좋아한다. 늘 보는 풀인데 이름을 몰랐다며, 하루에 한 가지씩 이름을 알아야겠다고 다짐하듯 말한다.
*참새귀리
개천길에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봄기운이 사람들을 불러낸 것도 이유 중 하나인 듯 하지만 그보다는 이제 걸어야 산다는 게 암묵적으로 합의된 듯하다. 혼자, 부부, 연인이 걷고 젊은 친구들이 어울려 걷는다. 배가 나와 힘들게 걷는 사람도 있고 개를 안거나 데리고 가는 사람도 있다. 좋아하는 유행가를 시끄럽게 틀어놓고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뛰는 사람도 있다. 운동하는 모양도 갖가지다. 그렇게 걷거나 뛰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괜찮다.
마트를 갈 때는 중간에 쉬면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조금은 여유롭게 걷는다. 날마다 보는 이팝나무꽃을 보고 여전히 소리 지르며 감탄하기도 한다. 매눈을 하고는 천변에 미나리 나온 게 있나 살펴보기도 한다. 그렇게 소풍 가듯 걷는 길은 장을 보고 돌아올 때면 달라진다. 등에 맨 배낭 무게 때문에 남편이 속도를 낸다. 양배추 같은 무거운 채소나 우유를 산 날 남편은 말수가 줄어들면서 속도를 더 낸다. 오늘도 배낭이 무거운지 빨리 걷자고 한다.
한참 걷는데 어느새 어떤 여자분이 우리 옆에 와 있다. 머리부터 구두까지 갈색, 베이지톤으로 차림을 한 여자는 고급스러운 목걸이와 반지, 팔찌를 했다. 옷과 머리, 액세서리가 잘 어울려 멋스럽게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사는 걱정이 별로 없을 거 같았다. 여자는 우리 부부를 보며 말을 붙였다.
-저기 저 새들이 뭐 먹나 봐요
-물고기요
-여기 물고기 있어요?.
-아유 그럼요
그렇게 시작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원래 남편은 한쪽으로 가서 물건 하나를 내 배낭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자분 이야기를 듣느라 어쩌지 못하고 속도를 늦추며 걸었다. 여자는 공지천이 정말 아름답다고 했다. 와본지 너무 오래라 이렇게 변했는지 몰랐다고 들뜬 듯 말했다.
-그런데 나이는 있으신 거 같은데 젊어 보이세요
남편이 말하자 여자는 곧 80이라고 했다. 깜짝 놀랐다. 날씬한 데다 우아한 몸짓이 그렇게 들어 보이지 않아서다. 우리는 감탄하며 관리를 잘하셨다고 칭찬을 했고 여자는 뭔가 마음이 더 열렸는지 자식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대화라기보다는 여자 이야기를 주로 듣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여자 이야기는 지루하지 않았다. 솔직하고 시원스러운 화법과 고급스러운 차림에 이끌려 계속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다만 얘기를 듣는 내내 여자의 베이지색 뾰족구두가 마음에 걸렸다. 그걸 신고 개천 저 위쪽 동네에서 여기까지 왔다는데 발이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괜찮냐고 물어보았지만 젊어서부터 이런 구두를 신어서 괜찮다고 했다.
여자는 아들 셋이 있는데 다 장가를 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처음에 너무 잘해주면 안 된다고, 자기는 처음에 좋은 마음에 집도 사주고 며느리한테 차까지 사줬는데 고마운 줄 모르는 거 같다고 했다. 섭섭한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어버이날은 왔지요?
설마 하며 물었다. 여자는 말없이 얼굴을 저었다. 나는 위로하려고 요즘 젊은 부부들이 연휴 생기면 해외도 가고 그래서 미리 다녀가고 그런대요. 여자는 그렇게 말해도 별 반응이 없었다. 어버이날에 안 온 모양이다. 더 물어보지 못했다. 여자는 내게 딸이 있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니 안 됐다는 듯, 자기랑 비슷한 신세라는 듯한 얼굴을 했다.
여자는 화제를 바꾸어 자동차 판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에 오픈가와 비엠비를 당근에 내놨는데 금방 팔렸다고 했다. 오픈카를 운전하는 여자를 상상해 봤는데 잘 어울렸다. 문득 영화 '델마와 루이스' 수잔 서랜든 생각이 났다. 여자는 수잔 서랜든과 어딘가 닮았다.
여자는 이제 운전을 안 하기로 했는데 차를 팔고 나니 마트에서 무거운 물건 살 때 좀 불편하다고 했다. 모닝이라도 사서 타면 어떨까요 하니 끄덕였다. 차가 없어서 택시 탔던 얘기도 했다. 기사가 매타기를 켜지도 않고 운전을 이상하게 해서 중간에 내렸다고 했다. 다음에는 택시 탈 때 기사 얼굴을 꼭 보고 타야겠다고 했다.
남편이 잠시 쉬자고 했다. 우리는 초록 파라솔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여자는 공지천에 이런 것도 생겼냐며 좋아했다. 여자는 우리에게 한과를 건넸다. 여자는 어느덧 자신의 우울한 기분에 대해 이야기했다. 친한 친구가 돈을 떼어먹은 이야기며 코로나시기인 60 중반부터 잠도 안 오고 밥맛도 없어졌다는 우울의 내력을 꺼냈다.
여자는 카페에 자주, 아니 날마다 가는 듯했다. 여자는 카페에 나이 든 사람이 많은데 너무 큰소리로 떠들면서 말을 해서 한마디 해줄 때가 있다고 했다. 화장실에서도 화장지를 가져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도 보면 한마디 한다고 했다. 잘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어느덧 헤어질 때가 되었고 우리는 꽤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기에 헤어지는 게 뭔가 섭섭했다. 여자는 남부시장 쪽에서 약속이 있다며 징검다리 즈음에서 건너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여자가 건너는 것을 조심히 지켜보았다. 여자는 돌다리를 건너기 전에 늘 이 시간에 여기를 다니냐고 했다. 그렇다고 했다. 우리는 지나다 또 보자고 하며 헤어졌다.
여자가 가고 나서 남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자가 우울감이 깊은 거 같다고, 전화번호라도 물어볼 걸 그랬다고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여자와 헤어져 오기길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저렇게 외로움을 느끼는 시간은 다 오는 거 같다. 조금 일찍이 오는 사람도 있고 늦게 오는 사람도 있을 뿐......
마트 가는 길에 다시 그 여자를 본다면 커피라도 마시자고 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