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맛을 보여줘!
시를 좋아하게 된 것은 순전히 어린이 덕분이다. 어린이 시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시를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근처 도서관에 가는데 그럴 때면 먼저 들르는 곳이 어린이 자료실이다. 한바탕 그림책 코너를 살피고 나면 동시 코너로 간다. 그리고는 동시집을 두어 권 골라 읽는다.
이따금씩 어른들이 쓴 시집도 꺼내보는데 끝까지 읽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래도 어린이 시를 읽다가 종종 용기를 내본다. 여전히 어른이 쓴 시는 해독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럴 때면 다시 동시와 어린이 시 읽기로 돌아온다.
봄이 되면 다른 계절보다 산책을 많이 나간다. 아침 시원한 시간에도 나가고 국어시간에도 나간다. 봄은 어린이들의 감각을 톡톡 건드린다. 자연의 변화가 남다른 때라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 반 나무가 된 목련 아래로 간다. 어느덧 목련은 아린에서 꽃몽오리가 나오고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한다.
목련 꽃봉오리
황윤*(5학년)
꽃몽오리를 만지니
보들보들 부드럽다.
몽오리 속으로 들어가면
새근새근 잠이 올 것 같다.
12살 어린이지만 이런 순간엔 더 어려지는 거 같다. 교실에서 벗어나 하늘도 보고 바람도 느끼면서 마음이 말랑해지는 것이다. 어느덧 눈부시게 피었던 목련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어린이들은 목련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하지만 목련을 관찰하면서 달리 보인다. 떨어지는 목련 꽃잎은 사춘기 소년의 상념을 건드린다.
떨어져 가는 목련
김승*(5학년)
떨어진 목련의 생각은 어떨까
내 생각은 슬프구나
목련은 내 마음을 잘 알까?
목련의 생각이 뭔지 궁금하구나
남부초 교정에는 백목련만 있고 자목련이 없다. 마침 출근길에 자목련이 있다. 꽃잎이 떨어지고 있을 때라 어린이들 수만큼 꽃잎을 줍는다. 언제부터인지 은행잎이나 등나무 꼬투리 같은 열매, 꽃잎, 나뭇잎이 떨어져 있으면 줍는다. 우리 반 어린이들 주려고 줍는다. 그렇게 주운 건 자연이 주는 선물이라고 하면서 어린이들에게 나눠준다.
자목련
강도*(5학년)
선생님이
주신 자목련 하나
꼭 맨들맨들
가지 같다
꼭 깨끗하게
씻은 내 얼굴 같다
닮은 것이
많은 자목련
'깨끗하게 씻은 내 얼굴 같다'는 표현이 좋다. 어린이들에게 자목련 잎 하나씩 주고 시를 써보라 하니 슥슥 쓴다. 늘 시감상을 하고 시를 외우다 보니 시가 몸에 스민 건지도 모른다. 어린이들과 달리 시를 가르치는 나는 정작 시를 쓰는 게 어렵다. 시어가 입안에서 맴돌기만 한다.
자목련
사도*(5학년)
물컹물컹 손으로 만졌다.
마치 살아있는 물고기 배 만지는 것처럼
눈으로 보았다
마치 홍합처럼 보이는 것 같다
향도 좋고 색도 예쁜 자목련
글쓰기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어린이들도 바깥으로 나가면 시를 쓴다. 분명 딴청 부리고 돌아다니고 한 거 같은데 어느새 시를 썼다고 공책을 내민다. 조금 시든 자목련을 만지면서 물고기 배를 떠올리고 홍합을 생각하는 어린이,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해서 그저 감탄한다. 어린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비유할 무언가를 찾아 시어로 삼는다. 이오덕 선생님이 말한 '어린이는 시인이다'는 말이 정말 맞는구나 생각한다.
자목련
우서*(5학년)
자목련은 보들보들해.
마치 아기 발처럼
중독성이 있어.
계속 만지게 돼
자목련이 좋아.
마치 어머니 아버지처럼.
자목련을 만지면서 아기 발을 생각하고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한다. 부드러운 감각을 부모님 손길로 연결하는 데서 따스한 정이 느껴진다.
학교를 옮기면 교정에 어떤 나무와 꽃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산책부터 시작한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학교 교정에는 유실수와 꽃나무가 많지 않다. 앵두나 살구 정도는 있으면 좋겠는데 없다.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가 없는 학교도 있다. 무궁화는 학교뿐 아니라 아파트나 관공서에도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보니 어린이들은 무궁화를 잘 모른다.
다행히 우리 학교에 무궁화가 여러 그루 있다. 산책하면서 무궁화를 가리키면서 어린이들에게 이름을 알려주었다. 여러 어린이가 무궁화가 학교에 있는지 몰랐다고 한다. 무궁화는 봄이 지나 초여름에 핀다. 그래서 누가 먼저 꽃 피는 걸 발견하는지 내기해 보자고 한다. 하지만 운동장 저만큼 있는 무궁화는 곧 잊힌다. 어느 날 보면 떡 하니 꽃이 피어 있다. 무궁화 핀 날은 관찰일기나 시를 쓰러 나간다.
무궁화
김원*(5학년)
우리나라 꽃
무궁화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 숨기다가
용기 내서 보여주네.
아이들이 너도나도
몰려와 예쁘다고
칭찬해 주네.
시를 쓴 어린이는 무궁화꽃이 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 숨기다가 용기 내서 보여준다고 썼다. 모두 무궁화를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어린이는 무궁화 꽃이 피었는지 종종 찾아간 모양이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꽃은 피어있다. 그걸 본 기쁨을 잘 표현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조하*(5학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길을 가던 개미와 벌이 움직여서
활짝 핀 무궁화에게 갑니다.
아이들도 한 명씩 갑니다.
모두 모두 무궁화 꽃으로 갑니다.
모두 다 무궁화 술래에게 잡혀갑니다.
이 어린이는 우리 반 친구들이 무궁화 꽃 관찰하러 가는 모습을 잘 포착했다. 재미있는 건 친구들뿐 아니라 개미와 벌도 무궁화를 보러 간다. 무궁화 관찰하는 동안 개미와 벌이 드나들곤 했는데 이들도 놀이의 일원으로 넣어주었다. 그래서 시가 더 재미있어졌다. 같은 자리에서 무궁화를 보고 쓰는데 이렇게 다른 시가 나온다. 내용도 시의 리듬도 저마다 다르다. 흥미롭다
남춘천 초등학교에는 본관 화단이 온통 철쭉이었다. 다른 식물이 없어 아쉬웠지만 봄에는 장관이다. 어린이들과 한바탕 꽃구경 하러 나간다. 그런데 하필 그날 꽃바람이 세게 불었다.
산들바람
이현*(5학년)
산들바람은 장난을 친다.
우리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종이를 날리고
나뭇잎도 나무에서 떨어지게 하고
철쭉을 흩날리게 한다.
산들바람은 우리와 놀고 싶나 보다.
마지막 행에 밑줄을 긋고 싶다. 이래서 어린이 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 같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날리면 성가실 텐데 현우는 산들바람이 장난을 친다고 썼다. 놀이 능력이 좋은 현우는 누구 하고도 잘 논다. 그런데 이제 보니 바람 하고도 잘 논다. 마음이 시원해지는 시다.
철쭉 옆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었다. 품위가 느껴지는 멋진 나무였다. 이야깃거리가 많을 거 같아 하루는 소나무 앞에서 시 쓰는 시간을 가졌다.
개미
고현*
하루도 빠짐없이 개미는 모험한다.
소나무 위에도 올라가고
내 바지에도 들어간다.
우리 엄마가 보면
“싸돌아 댕기네.” 하겠지?
소나무를 보고 묘사시를 쓰기 바랐는데 어린이는 소나무에 기어올라가는 개미가 눈에 들어왔나 보다. 어린이는 다 잊고 개미탐구에 몰두한다. 개미는 소나무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아니다. 어린이 옷 속까지 기어들어간다. 어린이를 그 개미를 어느덧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러면서 엄마의 잔소리를 떠올린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시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일짝 스마트폰을 갖게 된 요즘 어린이들은 아무래도 자연과 어울릴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교실을 벗어나 산책하고 글쓰는 시간을 자주 갖는다. 말놀이 시도 종종 쓴다. '만약 00이라면’으로 시를 썼다. 어린이들은 이런 형식의 시를 즐긴다. 뜻밖의 상상력을 발휘한다.
내가 거미라면
최은*
내가 거미가 되면 좋겠다.
거미가 되면
거미줄로 만들고 싶은 집을 지을 수 있겠지?
거미가 되면
벽을 올라가는 느낌을 알 수 있겠지?
거미가 되면......
거미줄도 뽑고
벽에도 올라갈 수 있지만
무엇보다 외로울 거야.
나 혼자서 사는 것은
외로울 거야.
그냥 이대로 살래.
은*이가 이런 시를 쓸 줄 몰랐다. 조용하고 움직임도 드문 어린이인데 내가 00이라면에 거미를 등장시켰다. 은*이는 거미의 생태를 그리면서 그런 거미의 속마음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나중에는 외로울까 봐 거미가 되는 걸 포기한다. 친구들하고 어울리기도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은*다. 친구와 더 많이 어울리고 싶은 속마음이 느껴진다.
내가 닌자라면
최민*
내가 닌자라면
늦잠을 자 가지고 학교에 늦을 때
건물을 뛰어넘어서 학교 창문에 내려
빨리 책을 펴면 끝이다.
달리기 대회를 할 때
준비 땅! 심판이 외치면
검은 연막을 깔아서 시야를 가리고
나는 몰래 앞 쪽으로 먼저 가서
선수를 치면 1등이다.
또 집에 가는 길에 깡패가 있으면
두목으로 변신해서
누가 누구인지 모를 틈을 타서 도망친다.
집에 도착하면 분신술을 부려
숙제를 대신해 줄 내가 나타나
일찍 잘 수 있다.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시에 간절함이 묻어있다. 이 어린이는 닌자를 좋아한다. 그림도 자주 그린다. 관련 책이나 영상도 즐긴다. 그러면서 이런 상상을 자주 한 듯하다. 장면 하나하나가, 표현들이 생생하다. 어린이들은 잠 때문에 아침에 힘든 경우가 많다. 그런데 닌자처럼 휙휙 건물을 뛰어넘고 교실창으로 들어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빨리 책을 펴면 끝이다, 에서 시를 쓰는 어린이의 마음과 몸이 하나로 움직인 듯 느껴진다. 학교도 늦지 않고 못된 깡패도 피할 수 있고 숙제까지 해주는 닌자, 멋진 상상이다.
어린이들이 집에서 시를 써오는 날도 있다. 시 쓰기 숙제를 낸 날이다. 집에서 쓴 시엔 어린이들의 또 다른 일상이 드러난다. 그 남다른 서사가 흥미롭다.
우리 부모님
최힘*
아빠는 일 다녀와
밥 먹고 주무신다.
나를 부른다
파스 좀 붙여줘
엄마는 나한테 택배 가져와
그래도 산책 가서
동생 ‘하루’ 보며 싱글벙글
어린이들은 심부름 때문에 애를 먹는 일이 많다. 엄마도 아빠도 이런저런 일로 부르고 심부름을 시킨다. 이 어린이는 시에 힘들다는 말을 쓰지 않고도 자신의 상황을 잘 표현했다. 무엇보다 동생하고 놀면서 기분을 푸는 장면이 좋다.
우리 식구
윤은*
우리 식구는요
엄마는 힘든 데도 집안일을 하고
오빠와 나를 챙겨요
나에게 그늘이 되어주죠.
우리 아빠는 성실하면서도
고집이 세고 둔해요
까다로운 아빠죠.
우리 오빠는 나의 아지트예요
싸우지만 가끔은 서로 필요하죠
낡았지만 철거할 수 없는 집 같아요
별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식구들의 특징을 드러냈다. 종종 싸우는 오빠를 '낡았지만 철거할 수 없는 집'이라고 표현했다. 평소에 어른스러운 생각이나 표현을 많이 하는데 그런 성숙함이 시에 드러난다.
콜라캔
이재*
콜라캔을 따면
이브가
참치캔을 따는 줄
알고 뛰어오네
어쩔 수 없이
참치캔 따주네
*이브:고양이
고양이를 몹시 사랑하는 어린이다. 교실에서는 짖꿎은 장난기가 발동하기도 하지만 집에서 고양이 이브한테는 더없이 다정하고 마음 약하다. 콜라캔을 따는데 고양이 이브가 달려오다니! 고양이가 주인님, 콜라 혼자 먹지 말고 저도 먹을 거 주세요 하고 말하는 거 같다. 영리한 고양이와 못 이기는 척 속아주는 어린이 모두가 귀엽다.
눈 내리는 날
김서*
오늘 아침 창밖을 보니
하얀 눈밭이고
학교에 오니
사람들이 시끌벅적 눈놀이 하고
교실에 오니
선생님께서
눈놀이 하고 오라 하시네
아!
진짜 겨울이구나!
봄부터 시를 쓰다 보니 겨울이 되었다. 어린이들과 시를 쓰면서 산문에서는 발견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의 개성이나 매력을 알게 된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어린이들만의 감각과 심성도 느끼게 된다. 어린이들과 시 쓰는 시간, 어린이들이 쓴 시를 읽는 시간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