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성장의 비밀
해마다 3월이 되면 새로운 어린이들과 항해를 시작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지난해 실패와 성공을 거울삼아 어떻게든 더 잘해보려고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가슴 졸이며 다가올 어린이를 기다린다.
아동명부가 든 봉투는 대부분 학년 선생님들이 모여 뽑기로 결정한다. 어떤 봉투를 집는가에 따라 일 년이 결정된다. 그럭저럭 순한 어린이들을 만난 담임은 내내 무난하게 보낸다. 조금 거친 어린이를 만나거나 예민한 학부모를 만난 경우에는 수시로 만만치 않은 파고를 넘어야 한다.
처음 받아 든 학생 명부,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나이스에 들어가 지난해 성적이나 행동발달사항을 읽어봐도 마찬가지다. 무난하게 적어놓은 평가라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다. 어린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편견 없이 시작하는 게 좋다고도 한다. 하지만 무방비 상태가 난감한 상황을 만들 때도 있어서 간단치 않다.
나는 어린이들의 지난해 담임에게 정보를 얻는 쪽을 택한다. 이 어린이는 친구들을 잘 돌봐줘요, 이 친구는 리더십이 있고, 또 이 어린이는 선생님을 잘 도와요, 하는 말은 들을 때는 의지처가 생긴 듯하여 기운이 난다. 이 어린이는 아무것도 안 하려 해요. 아, 이 어린이는 좀 힘들 거예요. 친구들과 자주 부딪치거든요. 참, 이 어린이는...... 어린이는 별로 힘들지 않은데 어머니가 자주 전화를 하시고...... 쿵, 내려앉는다. 그래도 겨울 방학 사이 어린이들은 자란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여본다. 학부모는 더 정성껏 대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늘 얻은 정보보다 괜찮을 거라는 상상을 하며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다.
새 학기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흘렀다. 다행히 특별한 문제가 생기기 않았다. 이런 분위기라면 욕심을 더 내서 뭔가를 해 볼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한 해 무리 없을 거라고 판단하는 하는 순간 일은 시작된다. 긴장이 풀어진 어린이들, 담임에 대한 탐색이 끝난 어린이들은 서서히 정체를 드러낸다.
-선생님, 얘네들 싸워요!
쉬는 시간도 아니고 공부시간에 다툰다. 예전엔 거의 없던 일이 세태가 바뀌면서 일어난다. 상황을 알아보았다. 물건을 만지는 일로 남자 어린이 둘이 말싸움을 시작했다. 공부시간이라 어지간하면 넘어가는데 이 둘은 서로 만만치 않았다. 여전히 자신의 감정과 세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열한 살인데도 말이다.
어린이들에게 잠깐 과제를 주고 다투는 어린이들에게 다가갔다. 시간을 좀 들여 겨우 설득을 했다. 아니 설득한 줄 알았다. 앞자리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싸운 어린이 중 하나가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다. 거기서 팔에 얼굴을 묻고 운다.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운다. 가서 달래 봤지만 꼼짝을 않는다.
-선생님, 은수요, 한번 울면 오래 가요.
지난해 같은 반이었던 어린이가 중요한 정보라는 듯 알려준다. 그 말을 듣고 일단 수업을 이어갔다. 마음은, 눈길은 계속 은수한테 가 있었다. 은수는 20분이나 그렇게 울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은수를 보며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만만만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행인 것은 은수가 나를 괜찮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4학년이 된 기분을 쓴 날 은수가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선생님이 이야기를 하다가 책을 읽어주셨습니다. 나는 선생님과 내가 같은 취향인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은수)
글에만 이렇게 쓴 게 아니었다. 고백하듯 다가와 선생님은 자기 스타일이라는 말까지 들려주었다. 글 쓰는 것도 좋아하고 책 읽는 것도 좋아하니 나와 공통점이 있는 건 맞다.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것도 공통점이다. 은수는 혼자 하는 건 다 잘한다. 문제는 둘 이상 작업 할 때다. 짝이나 모둠과 같이 뭐만 하면 불협화음이 난다. 협동능력, 사회성이 또래 친구들보다 부족해 보였다. 그러다 보니 눈치도 없고 고집도 아주 셌다. 쉬는 시간이면 번번이 문제가 생겼다. 놀이하다 갈등이 폭발하는 것이다.
-선생님, 저 도저히 은수랑 못 놀겠어요. 선생님은 놀고 싶은 친구를 거절하지 말라고 하지만 쉬는 시간이 겨우 10분이잖아요. 그런데 은수가 끼면 자꾸 따지고 고집부려서 노는 시간이 다 가버려요.
내게 달려와 하소연하던 어린이는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익히 은수의 대응 방식을 봐왔기에 우는 어린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친구들이 거절하면 다른 데 가서 놀면 되는데 은수는 집요하게 그 팀에 들어가려고 한다. 친구들과 갈등이 생기면 혼자 놀 수도 있는데 은수는 끈질기게 같이 놀려고 한다. 종종 이런 일 때문에 난감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 어쩌면 은수 자신도 너무 힘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선생님, 저 위클레스 가서 상담받고 싶어요.
조금 놀랐다. 상담이 필요한 어린이들도 위클레스 가는 걸 부담스러워해서 조심히 의중을 떠보는 일이 많다. 그런데 은수는 스스로 상담을 요청한다. 은수는 다행히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은수는 자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해서 인기도 얻고 인싸가 되고 싶었다. 먼저 은수 어머니 뜻을 알기 위해 전화를 했다. 마침 정기 상담 주간이라 어머니와 대면 상담을 하기로 했다.
-선생님, 제가 너무 일찍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어요. 경험이 없다 보니 은수를 혼내고 너무 다잡았나 봐요. 그래서 은수 마음에 응어리가 많은 거 같아요. 선생님, 도와주세요.....
도리어 내가 더 고마웠다. 어머니는 은수가 선생님을 많이 좋아한다면서 전적으로 은수를 맡기겠다고 했다. 상담도 좋고 혼내도 좋으니 은수가 잘 자라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온전히 은수를 맡긴다고 하니 나도 할 수 있는 건 해 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위클레스 상담이 시작되었고 은수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주 1회 상담에 참여했다. 종종 위클레스 선생님은 상담 진행 상황을 알려왔는데 그 내용이 흥미로웠다. 상담 선생님은 은수와 상담하는 시간이 재미있다고 했다. 은수가 이야기를 잘해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르겠다고도 했다. 물론 은수도 상담에 만족했다.
상담이 잘 진행된다고 해서 은수가 쉽게 변하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자주 싸웠고 길게 울었다. 고집도 세게 부렸다. 하지만 때로는 은수의 고집이 나를 설득하기도 했다. 미술 수업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나는 어린이들 작품 하나하나에 조언을 하면서 작품의 질을 높이려고 애쓰곤 했다.
여러 재료를 가지고 조형 작품을 만드는 날이었다. 나는 의기야먕하여 무대책과 사각기둥으로 종이 접는 법을 어린이들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은수는 도화지를 니은자 모양으로 세워서 망가진 노트북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잘 세워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은수는 듣지 않았다. 혼자만 다른 방식으로 했다.
은근히 실패하고 후회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에 틀이 잡혀가고 모양이 났다. 결국 내 바람과 달리 은수는 멋지게 작품을 완성하였다. 은수는 다양한 재료로 질감을 표현했고 컴퓨터 자판, 앱, 도형, 글씨를 스프링처럼 튀어나오게 해서 입체감을 주었다. 제목도 ‘내 컴퓨터가 왜 이래?’하며 남다르게 지었다. 친구들 모두 순회를 하며 감상을 했는데 은수 작품이 인기였다.
은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주말신문에 은수 이야기를 썼다.
미술시간에 대해 은수가 쓴 글을 읽으면서 선생님은 은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무대 책과 사각기둥 모형 접기를 설명하느라 마음이 바빠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은수를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실망할 만도 한데 은수는 포기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컴퓨터 조형물을 만들었습니다. 티브이 화면으로 아이콘과 자판을 보여 달라고도 하면서 열심히 만들고 그렸습니다. 은수의 끈기와 노력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다음 호에 실린 답글에는 은수에 대한 칭찬이 꽤 있었다.
▪ 은수가 쓴 <칭찬받은 날>이 잘 된 거 같다. 왜냐하면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는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결국 만들어 낸 게 그렇다. 은수가 우리 반인 게 좋다.
▪은수는 느낌이나 생각을 잘 표현했다. 은수가 미술시간에 망가진 노트북을 표현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잘 표현했다. 아이디어가 참 좋은 거 같다. 은수는 미술도 잘하고 일기도 잘 쓰는 거 같다. 은수야, 잘했어!
친구들의 응원은 은수에게 힘을 주었다. 나아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희망, 의지를 준 게 분명했다. 놀이나 게임을 할 때에는 고집을 부려 친구들을 번번이 쓰러지게 하지만 이렇게 미술작품이나 글쓰기, 연극 같은 영역에서 은수는 친구들에게 신선한 자극과 기쁨을 주었다. 친구들의 칭찬과 인정이 쌓이면서 은수는 자신의 문제를 고치려고 더 애를 쓰는 듯했다.
여전히 협동 활동을 할 때에는 주장이 강했다. 물론 은수의 아이디어는 언제나 멋지고 남달랐다. 문제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과 함께 구현하는데 높은 수준의 실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은수의 고집에 못 이겨 따르기도 하지만 완성하지 못하거나 생각과 달리 멋진 작품이 나오지 못할 때가 번번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은수는 상상과 실현 가능성에 대해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미술시간에 피노키오를 만들려고 했다. 상자와 점토로 만들면 아주 멋진 입체 작품이 될 거라고 믿었다. 모둠 친구 중 서*이는 내 생각과 달랐다. 예쁜 그림을 원했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3대 0으로 완승! 우리 모둠은 내가 낸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점점 피노키오가 아닌 굵은 똥 모양이 되면서 불행이 다가왔다. 시간이 지나서야 친구들 의견이 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가 밀물처럼 다가왔다. 결국 서*의 대처로 우리 모둠은 가까스로 살았다. 의견을 낼 때는 내 의견만 고집하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친구 의견도 들어야겠다. (이은수)
의미 있는 발전이다. 이런 변화를 글로 쓰면서 은수는 달라지려는 의지를 더 갖게 되는 듯했다. 은수의 변화에는 친구들의 격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부모님의 도움이 컸다. 주말에 종종 과제를 내곤 하는데 주로 그 주간에 읽은 동화 이야기를 부모님께 설명하는 과제였다. 어린이들은 줄거리를 간추려 설명한 뒤 부모님 말을 듣고 글을 써왔다. 은수 부모님은 늘 은수 이야기를 듣고 진지하게 답을 해주셨다.
동화책 <화요일의 두꺼비> 내용을 식구들에게 말했다. 밥을 먹을 때 조심히 말하니 식구들이 잘 알아들은 거 같았다. 먼저 아빠는 지금 주변 친척을 잘 대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며 친척을 잘 대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아무리 어려워도 힘든 상황에서도 노력하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동생은 내 설명을 잘 못 들은 건지 느낀 게 없다고 했다. 그래도 줄거리를 설명하고 소감 나누는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은수)
은수는 학교에서 하는 정기 상담뿐 아니라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상담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은수는 주 2회씩 어른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대화는 은수 마음에 쌓인 무언가를 푸는데, 지금의 문제 상황을 설명하면서 자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교육청 상담 교사가 전화를 한 적이 있다. 은수와 상담시간이 너무 재미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은수가 선생님과 공부하는 게,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게 너무 좋다고 했다는 말도 했다.
그렇게 4학년 일 년을 마치고 5학년이 된 은수는 또다시 나의 제자가 되었다.
4학년을 마치고 5학년이 되었다, 그런데 나의 선생님이 계셨다. 꿈인가 했지만 진짜였다. 난 오랫동안 얻고 싶었던 걸 얻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진정하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선생님에게 이번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자고 다짐했다. 쉽지는 않았다. 장난하고 싶고 가만히 못 있겠고 아, 정말 힘들었다. 선생님은 옛날과 다르면서 같은 느낌으로 시작했다. 이거였다. 내가 가장 재미있어하는 수업을 하시는 우리 선생님, 정말 기뻤다. 선생님을 잘 만난 거 같다. (이은수)
4학년을 가르칠 때와 달리 5학년 담임이 된 후로는 이전보다 더 엄격하게 가르쳤다. 고학년을 가르쳐야 하기에 달라진 것이다. 은수는 지난 일 년동안 딱딱했던 많은 것들이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토록 갈망하던 1학기 반장선거에선 표하나 받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때 은수는 왜 아무도 나한테 표를 주지 않느냐며 통곡하듯 울었다.
2학기가 되었다. 나는 1학기 때 그 일이 떠올라 은수가 제발 반장 선거에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반장이 되기에는 역량을 더 쌓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1학기 때 반장을 했던 친구가 출마를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 친구는 친구들의 신망을 크게 얻고 있어서 나오기만 하면 반장이 될 수 있었다. 그 속 깊은 친구가 은수를 추천했다. 4학년 때부터 같은 반을 해 온 그 친구는 은수의 장단점을 알고 있었고 변화 과정도 모두 보았다.
-저는 은수를 추천합니다. 지금 보기에는 부족해 보일지라도 반장을 맡겨주면 책임감이 더 생겨서 훨씬 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친구의 말에 반 친구들은 감동을 받은 듯했다.
<노력>
회장, 부회장 선거를 했다. 회장 후보로 네 명이 나갔다. 이은수랑 최 00은 삐까삐까 하다가 은수가 한 표 차이로 회장이 되었다. 은수는 지금까지 4표 이상 받은 적이 없는데 노력해서 회장이 되었다. (노 00)
은수를 추천한 친구의 말처럼 반장이 된 은수는 노력했다. 친구들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눈물과 땀의 시간을 거쳐 은수는 5학년을 괜찮게 마무리했다.
다음 해였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스승의 날, 은수가 전화를 했다. 지금 교문 앞인데 교실에 계시냐고 물었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은수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얌전하게 꽃 화분과 손 편지를 내밀었다. 이 비에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교문 근처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은수는 어느덧 6학년을 졸업했고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생이 되었다. 한 번은 시장에서 스쳐 지나가는 은수를 보았다. 나를 봤지만 쑥스러워서 그냥 지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은수가 선생님, 하며 달려왔다. 그리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잘 크고 있는 듯하여 기뻤다. 곁에는 친구가 있었다. 다정하게 친구와 함께 있어서 더 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