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일상, 공부에서 핵심 찾기
스물셋, 때로는 스물여덟 명이 앉아 있다.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다. 진도에 허덕이기도 하지만 오랜 경력을 통해 어느 정도 완급을 조절할 수 있다.
가르칠 내용에 치이지 않고 어린이들이 제대로 배우고 있는지 보려고 애쓴다. 어린이가 수업을 듣는 태도, 발표하는 방식, 토의할 때 보이는 열정, 토의 결과를 표현하는 역량 하나하나를 살피면서 한 어린이의 성장을 가늠한다.
어린이의 성장을 가늠하는 기초가 되면서도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글 쓴 결과물이다. 아침에 등교하여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쓰는 두 문장이 있다면 교과 시간이나 국어과 문학수업을 할 때에는 범위가 주어진 가운데 쓰는 글이 있다.
그 걸 핵심어 쓰기라고 나는 부르고 있다. 독후감 쓰기에 질려 있는 어린이, 공부한 내용을 간추리는 게 막막한 어린이에게 핵심어 쓰기는 글을 쓰는 쉬운 출발이 된다.
핵심어 쓰기는 3월부터 시작하여 종업식 날까지 모든 활동과 교과, 독서에 고루 적용한다. 그림책 <당나귀 실베스터와 요술조약돌>를 읽은 뒤였다.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낱말을 찾아 써 보자. 그 낱말을 고른 까닭도 쓰렴.
당나귀 실베스터는 우연히 요술 조약돌을 얻지만 실수로 소원을 잘 못 비는 바람에 바위가 되고만다. 이는 주인공에게 잠깐 지나가는 고난이 아니다. 비극이라 부를만한 긴 고통의 시작이 된다.
주인공이 바위로 지내는 시간은 일 년 가까이 된다. 이 시간 동안 주인공은 깊은 슬픔에 빠지고 부모는 슬픔을 딛고 아가를 찾거나 좌절하거나 기다린다. 저학년 그림책으로 분류하지만 12살 어린이들도 충분히 공감을 얻는 이야기다.
▪<핵심어-가족> 뭐니 뭐니 해도 가족이 제일 소중하다. (김서*)
▪<핵심어-희망> 나에게 위험한 상황이 올 수 있지만 희망을 가져야겠다.(사도*)
어린이들은 핵심어로 가족, 희망을 많이 골랐다. 핵심어를 설명하는 한두 문장이 꽤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 정도만 써도 의미 있는 독후감이 될 수 있다.
<달려라 나의 고물 자전거>를 읽고 쓴 핵심어에서 제법 인상 깊은 내용이 보였다
▪<핵심어-소원> 사람들의 소원은 대부분은 흔하다. 보통 우리 가족 오래오래 살게 해 주세요, 코로나가 사라지게 해 주세요, 등 이런 것인데 고물자전거의 소원은 동우와 함께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보면 고작 자전거 타는 것, 이럴 수 있지만 고물 자전거에게는 그 소원이 엄청난 소원이며 행복일 것이다. 자전거가 자기를 두고 가라고 했는데 동우가 싫다고 한 장면이 인상 깊다. 싫어,라고 말하는 게 약간 무심한 듯한 데도 감동을 준다.(김서*)
이 어린이는 이야기의 핵심에 제대로 가 닿은 듯하다. '소원'이라는 낱말을 핵심어로 고른 뒤 책 속 주인공인 고물자전거의 소원과 보통 인물들의 소원을 견주어 가며 글을 썼다. 거창한 소원, 가능하지 않거나 뜬구름 같은 소원을 비판하는 마음도 엿보인다. 진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글이다.
이번에는 그림책 <터널>을 읽고 쓴 핵심어다. 날마다 싸우던 형제가 엄마한테 혼나고 쫓겨난다. 오빠는 동생과 놀거리를 찾지 못하고 지루해하다 우연히 발견한 터널로 들어간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빠가 오지 않자 무서운 마음을 누르며 오빠를 찾아 동생이 터널로 들어간다.
터널 속 세상은 으스스하다. 숲인 듯한데 나무들이 괴물로 보인다. 두려움에 미친 듯이 달리던 동생은 돌로 굳은 오빠를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껴안는다.
그 순간 오빠는 사람으로 돌아온다. 어린이들은 많은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자신과 견주어 쓴 글이 많다.
▪<핵심어-비밀> 돌이 된 오빠를 동생이 와락 껴안고 울자 오빠가 점점 색이 돌아오며 따스해지기 시작하고 오빠로 돌아왔다. 둘은 터널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와 마주 보고 살며시 웃었다. 그러곤 터널을 들어갔던 둘만의 일을 비밀을 만들었다. 로즈와 오빠가 터널 안에서 생긴 일을 엄마에게 말하지 않고 둘만의 비밀로 간직했다.(문채*)
옛이야기 그림책 <손 없는 색시>를 읽고 쓴 핵심어다. 옛이야기에는 권선징악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어린이들은 그걸 인지하고 내적인 정의감과 따뜻한 마음을 맘껏 발휘한다.
이번에는 미덕 단어 중에서 골랐다. 인물을 잘 설명하는 미덕을 고르는 것이다.
▪<도령:사랑> 도령이 색시가 떠나도 색시를 사랑해서 벼슬길도 마다하고 색시를 찾으러 여러 해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한 걸 보니 사랑의 힘이 대단하다. (사도*)
▪<색시:품위>새엄마가 힘든 일을 시켜도 투덜대지 않고 예의 바르게 대하고 예의 있게 생활했다.(유*)
▪<도령:사려> 도령은 색시가 손이 없는 처지인 것을 알고 아무런 불평도 없이 밥도 나눠주고 재워주었다.(정해*)
픔위라든가 사려깊음, 희생을 감수하는 사랑이 시대에 뒤떨어진 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세태가 변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이들 낱말이 귀하다는걸 알아챈다.
동화 <해리엇>은 두 달간 길게 읽은 책이다. 읽을 때마다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매 차시마다 핵심어 고르기는 빼놓지 않았다. 그래야 중요한 맥락을 가지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해리엇> 5,6장을 읽고 쓴 핵심어다.
▪<이별의 연속>-원숭이 찰리는 야생의 방식을 버리고 사람과 타협하며 지냈다. 그런데 주인 테드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갑자기 집을 떠난다. 찰리는 계속 이별하고 있다. 엄마와 이별, 사람과 이별했다. 한 명 한 명 찰리 곁을 떠나니 얼마나 가슴 아플까(김지*)
▪<모자>-모자는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찰리를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을 거야 하는 느낌으로 찰리가 모자를 벗어버린 거 같다. (김태*)
핵심어를 고르는 과정에서 어린이들은 생각을 많이 한다. 핵심어 한 개만 고르라고 할 때에는 더 고민이 깊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낱말인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낱말을 고르면 이에 대한 까닭을 쓰는데 그러면서 어린이들은 생각이 깊어지고 진지해진다.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 아침이 되면 주말 생활에서 핵심어를 고른다. 어린이들이 일기를 써낼 때에는 주말에 무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일기가 사라진 자리에 핵심어 쓰기를 넣어보았다. 어린이들은 두 문장 쓰기 수첩이나 나눠준 포스트잇에 주말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 핵심어를 고르고 까닭을 쓴다.
▪<이사> 일요일에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쌌는데 힘들었다.(박순*)
▪<바느질> 새로 산 옷이 맞지 않아 바느질을 했다. 근데 다시 커졌다.(윤은*)
▪<독서모임> 나는 한 달에 한번 다른 친구랑 독서모임을 한다. 책 한 권을 골라 여러 명이 읽어서 조금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강도*)
▪<티브이> 하루 종일 티브이를 보았다. 엄마가 하루 종일 티브이만 본다고 화냈다.(이재*)
주말에 있었던 일은 평일에 쓰는 핵심어보다 더 흥미로울 때가 많다. 어린이들이 친구들과 가족과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있어서다. 어린이들의 남다른 개성도 볼 수도 있다. 주말 핵심어는 교사가 어린이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알 수 있고 어린이들은 자신의 주말을 돌아보게 된다.
생활 속에서 마음에 남는 것, 의미 있는 것을 찾아 쓰는 일은 자신의 관심사와 고민을 아는 계기가 된다. 친구들과 핵심어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면서 나랑 달리 친구들은 어찌 지내는지도 알게 된다.
중요한 행사를 마치고 난 뒤에도 핵심어를 쓰고 짝토의를 한다. 특히 여러 날 준비하고 치른 행사는 어린이들이 그 일을 어떻게 준비하고 치렀는지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한다. 어린이날 공연 뒤 핵심어로 소감을 표현해 보았다.
어린이날 공연은 내게
▪웃음이었다. 친구들이 다 재미있게 공연을 했다. 편집, 춤, 마술 등 다 재미있었다.(김원*)
▪준비였다. 공연준비, 의상준비, 그리고 엄마는 간식까지 준비했다.(김지*)
▪미래였다. 내가 미래에 공연이나 발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김현*)
▪선물이었다. 어린이날에 선물을 못 받을 수도 있는데 친구들과 논 것도 선물이다.(박예*)
여름 방학을 마치고 나서는 네 개의 핵심어로 방학생활을 표현한다. 글과 그림을 넣으면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온다. 체험학습을 다녀온 뒤나 체육대회, 또는 학교에서 하는 공연을 본 뒤에도 핵심 어을 골라 감상을 쓴다. 이렇게 하면 개개인의 소중한 감상이 쌓이고 생각도 커진다.
학기말이 되었다. 한 학기 생활을 '1학기는 나에게 00이다'속에 표현하기로 했다.
▪1학기는 나에게 (새로움)이다. 꽃씨반에 와서 새롭게 시낭송이나 풍뎅이, 짝토의 등 새로운 것을 해봤고 새로운 친구와 담임선생님을 만나서다.(박순*)
▪1학기는 나에게 (시집)이다. 재미있고 유익한 시를 많이 배워서다.(오현*식)
▪1학기는 나에게 (고무줄)이다. 솔직히 힘든 일이 있을 때에도 다음날 학교에 와서 친구들과 선생님을 보면 괜찮아지기 때문이다.(최힘*)
실과 교과에 나오는 나의 성장 평가를 핵심어와 문장으로 표현해 보았다. 신체적 발달, 사회적 발달, 인지적 발달, 정서적 발달에 대해 썼다.
▪ <사회> 예전엔 피구나 체육시간 경기를 할 때 우리 편이 지면 급발진해서 아, 왜 이렇게 공을 못 잡아 ‘하고 말했다. 지금은 ‘얘들아, 괜찮아!’, 이렇게 말하려고 노력 중이다.(신주*)
▪ <인지> 원래 독서를 많이 안 하고 두꺼운 책을 읽지 않았는데 이제 두꺼운 책을 도전해서 책을 집중해서 읽는다. 근데 집중하다 보니 책이 재미있어진다. 매일 집중해서 책을 읽는다.(황윤*)
▪<사회>3월 보다 친구와 점심나들이 하는 실력이 늘은 것 같다. 3월 달에는 어색하고 막막했는데 요즘은 친구와 점심 나들이를 하면 궁금한 점이 막 생겨나고 재미있다. <인지>3월 달보다 스스로 30분 공부하는 능력이 늘은 것 같다. 3월 달의 글쓰기를 보면 뭔가 짧게만 쓴 것 같은데 요즘은 다르다. 또 집에서 스스로 30분 공부하는 게 재미있다.(이다*)
어린이들은 상당히 자신의 변화와 발전, 부족한 점을 객관적으로 썼다.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힘이 생긴 거 같다.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면 될 듯 하다. 부족한 것은 채우고 잘하고 있는 것은 더 발전시키는 것이다.
핵심어를 골라 글을 쓰면서 어린이들은 어떤 일의 핵심을 찾는 능력이 생기는 듯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문단 의식도 갖게 되는 거 같다. 어느 날 긴 글에 도전하자고 해보면 두 장, 석 장까지 써낸다. 생각하고 설명하는 힘이 커진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핵심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한다. 그 긴 여정을 지나며 어린이들은 성장한다. 11월 중순쯤 되면 와, 어린이들의 발전에 감탄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