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친구는 평생 간다
스물세 살 여름, 대학 동기 다섯 명과 제주도 여행을 갔다.
마지막 날 저녁, 우리는 해변에 앉아서 맹세했다. "우리 평생 친구하자. 결혼해도, 애 낳아도,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 만나자." 그때만 해도 정말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 다섯 명 중에서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거짓말 #016: "진짜 친구는 평생 간다"**
가장 아픈 거짓말이었다.
대학 4년 동안 정말 가까웠던 친구들이 있었다. 함께 작업실에서 밤을 새우고, 전시 준비를 하고, 공모전에 응모하고, 서로의 꿈을 응원해 주던 사이였다. 졸업할 때는 "우리 우정은 영원할 거야"라며 눈물까지 흘렸다.
하지만 졸업 후 1년이 지나자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화가와 소설가의 길을 고집하고 있었고, 친구들은 하나둘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취업을 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길을 응원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점점 대화할 거리가 줄어들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내가 MD로 전향했다고 했을 때였다. 한 친구는 "역시 현실을 택한 거네"라고 말했고, 다른 친구는 "진작 그럴 줄 알았어"라고 했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의 꿈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구나.
문제는 '평생'이라는 개념 자체였다. 사람은 변한다. 환경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관심사도 변한다. 20대의 나와 30대의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변화를 전제하지 않은 우정은 지속되기 어려웠다.
**거짓말 #017: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
대학교 새내기 때, 나는 정말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동아리도 세 개나 가입했고, 과 행사도 빠짐없이 참석했고, 누구든 연락하면 달려갔다.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는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맥이 곧 경쟁력"이라는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힘들 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화가와 소설가로 고군분투하던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500명의 '친구' 중에서 정작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5명도 되지 않았다.
MD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명확해졌다. 진짜 중요한 건 친구의 수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였다.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안부 정도 묻는 사이보다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훨씬 소중했다.
CEO가 된 지금은 더욱 그렇다. 비즈니스 네트워킹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정말 믿을 수 있는 멘토나 동료가 더 필요하다. 양보다는 질이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거짓말 #018: "진정한 친구라면 무조건 내 편이다"**
"친구는 내 편이어야 해"라는 말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대학 시절, 다른 과 학생과 갈등이 있었을 때 친구들에게 하소연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너도 잘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그때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진정한 친구라면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가 맞았다.
MD로 일할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상사와 갈등이 있어서 친구에게 푸념했는데, 친구는 "너도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해 보면 어때?"라고 조언했다. 그때는 서운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정말 도움이 되는 말이었다.
진정한 친구는 무조건 내 편을 드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틀렸을 때 솔직하게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내 기분을 맞춰주는 사람보다는,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진짜 친구였다.
CEO가 되어서는 이런 친구들이 더욱 소중하다. 내 주변에는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정작 필요한 건 "이 부분은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해주는 친구들이다.
**거짓말 #019: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다"**
"우리는 모든 걸 털어놓는 사이야"라고 믿었던 친구가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 정말 가까웠던 동기가 있었다. 서로의 연애사부터 가족사까지, 모든 걸 공유했다. 비밀 하나 없는 투명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졸업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그 친구는 대학 시절 내내 나에 대해 질투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 작품이 교수님께 칭찬받을 때, 내가 공모전에서 입상할 때마다 속으로는 불편해했다는 걸 나중에 다른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 역시 완전히 솔직하지는 않았다. 그 친구가 만든 작품을 별로라고 생각할 때도 "좋다"라고 말했고, 그 친구의 연인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좋은 사람인 것 같다"라고 했다.
결국 완전한 투명성은 불가능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영역이 있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모든 걸 털어놓지 않는다고 해서 가짜 친구는 아니었다.
**거짓말 #020: "친구는 이해 관계없는 순수한 관계다"**
"친구는 계산하지 않는 관계야"라고 배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친구 관계에도 이해관계가 섞여있었다. 그리고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었다.
MD로 일할 때, 대학 동기가 마케팅 관련 조언을 구하러 연락했다. 나는 기꺼이 도움을 줬고, 나중에 내가 독립할 때는 그 친구가 첫 고객을 연결해 줬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짜 우정은 아니었다.
CEO가 된 지금은 더욱 그렇다. 비즈니스 파트너이면서 동시에 친구인 사람들이 있다. 서로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고받지만, 그 안에는 진정한 신뢰와 애정도 있다.
순수한 우정과 이익이 섞인 우정을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건 서로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지였다.
**현실은 이랬다**
지금의 나는 우정에 대해 훨씬 현실적으로 생각한다.
평생 가는 친구는 없다. 하지만 각 시기마다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 어떤 친구는 학창 시절에만 가깝고, 어떤 친구는 직장생활 시기에만 가깝고, 어떤 친구는 지금까지도 가깝다. 모든 관계에는 적절한 시기와 거리가 있다.
친구는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니라, 깊을수록 좋다. 100명의 지인보다는 5명의 진짜 친구가 더 값지다.
진정한 친구는 무조건 내 편을 드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비밀을 모두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정에도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중요한 건 서로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있는지다.
화가와 소설가 시절의 친구들, MD 시절의 친구들, CEO가 된 지금의 친구들. 모두 다르지만 모두 소중하다. 각 시기의 나를 이해해 주고 함께 성장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정에 관한 거짓말들을 하나씩 벗겨내고 나니, 비로소 건강한 우정이 무엇인지 보였다. 그것은 동화 속 우정과는 달랐지만, 훨씬 더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것이었다.
때로는 멀어지는 것도 우정의 한 형태일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