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테의 강과 에우노에의 강
법률은 문장으로 표현되고 국가 기관에 의해 승인되고 실행되지만, 종교는 모든 걸 양심으로 한다. 양심으로 신을 믿고, 양심으로, 신앙 고백을 하며, 양심으로 신앙 행위를 한다. 양심과 신앙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 헌법은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마음을 밭으로 비유하면, 선한 양심은 좋은 밭이라 할 수 있으며 신앙생활의 바탕이 된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여러 번 선한 양심, 깨끗한 양심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가톨릭 교회 제이 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의 한 문서는 양심을 "하느님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놓은 한 법"으로 규정하면서 “양심의 소리는 선을 사랑하고 행하며, 악을 피할 것을 말해 준다”라고 설명한다. 덧붙여, 이 문서는 “사람의 존엄은 양심법에 순종하는 데 달려 있고, 이에 따라 재판을 받게 된다”라고 강조한다.
사람이 양심법을 어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양심법을 어기면, 본인은 양심에 찔림을 느낀다. 그리고, 죄의 결과로 사회에 영적, 물질적 손해를 끼친다. 그래서, 하느님에게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죄를 용서받는(사죄) 과정에서, 회심(回心), 회개(悔改), 참회(懺悔), 고백(告白), 통회(痛悔), 보속(補贖)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기독교 종파에 따라, 사죄에 관련된 용어와 용법이 다르다.
사죄 과정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생기는 혼돈이나 오해가 있다. 누구에게, 어떻게 사죄받아야 할지를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 글에서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하는 한국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주요한 사죄 용어의 뜻을 알아보고 몇 가지 연관된 질문에 답해보려고 한다.
회심이란 종교를 바꾸거나 종교적 신념을 바꾸는 일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은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던 삶의 방식을 그치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시작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래서, 회심이란 말은 회심 이전의 옛 삶의 방식과 새 삶의 방식이 대비된다. 어거스틴의 경우, 그는 이단 사상을 쫓던 삶의 방식을 그치고 기독교로 회심한다. 바울의 경우,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철저한 유대교 신봉자에서 기독교로 회심한다.
신약성서에서 나타나는 "회개(repentance)"는 그리스어 μετάνοια (metanoia)이며, "마음 또는 정신의 변화"를 뜻한다. 이와 함께, 회개는 앞으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회개는 더욱 구체적인 죄의 내용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성서는 음행, 살인, 복술, 도둑질과 같은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한다(계 9: 21, 마 3:8). 회개는 구체적의 죄의 내용, 고백, 의지적인 결단이 요구된다. 가톨릭교회 교리 사전은 회개(悔改, conversion)를 “죄스런 생활 태도에서 탈피하여 하느님께 귀의하는 일”로 설명한다. 이와 함께, 천주교회는 인간은 죄인이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하고 일생 회개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천주교회에서 사용하는 "회개"는 "회심"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임을 알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개신교회에서 사용하지 않는 참회(懺悔, repentance)란 말을 교리에서 사용한다. 참회란 과거의 범죄사실을 기억하고 현재 죄의 상태에 있음을 느끼는 인식적 요소와 죄를 지었음을 슬퍼하고 죄가 사(赦)해지기를 원하면서 죄를 혐오하는 의지적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이다(가톨릭 교리 사전). 참회란 말은 천주교회에서 세례 후에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고해성사와 연관하여 사용한다. 참회는 회개처럼 구체적인 죄의 내용, 고백, 의지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주의해야 할 점은, 한국 천주교회는 "회개(悔改)"를 "conversion(회심)"에 상당한 말로 사용하며, "참회(懺悔)"를 "repentance(회개)"에 상당한 말로 사용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 개신교회는 "참회(懺悔)"란 말을 쓰지 않는다. 공동 번역에서 참회란 말이 3번 나오지만 다른 성서 번역본들에서 찾을 수 없는 단어이다.
고백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비밀이나 범죄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천주교회에서 참회자가 고해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자신의 죄를 고해 신부 앞에 솔직히 말하는 일이다. 고해성사에서 고백의 대상이 되는 죄는 용서받은 적이 없는 죽을 죄(死罪)이며 참회자는 이를 기억나는 대로 고백해야 한다.
자신이 범한 죄를 뉘우치고, 슬퍼함과 동시에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행위이다. 죄를 뉘우치는 행위란 죄를 싫어하고 미워했다면 범하지 않았을 죄를 대상으로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포함한다. 죄로 인해 깨어진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겸손의 자세이다.
보속의 일반적인 의미는 끼친 손해에 대한 배상(compensation) 및 보환(restitution)을 뜻한다. 보속은 내면에서 일어난 회개를 밖으로 증명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보속은 천주교회의 성사인 고해성사의 한 요건이며, 동방 정교회, 루터교, 성공회 등에서도 보속개념을 받아들인다. 전통적으로, 자선, 금식, 기도는 보속행위의 세 가지 유형이다. 천주교회는 보속 행위들에 의하여 사람의 신체와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깨끗해진다고 믿는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작성된 소요리 문답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은 한국 개신교회의 신앙고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음은 회개에 관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다.
문: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무엇입니까?
답: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죄인이 자기의 죄를 참되게 느낍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긍휼 하심을 깨달아 자기 죄를 슬퍼하고 미워합니다. 그리고 죄에서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서며 새롭게 순종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지속적으로 힘써 순종하는 것입니다.
소요리 문답에서 말하는 회개는 죄에서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회심의 개념, 자기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는 통회의 개념, 그리고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참회의 개념까지 포함하고 있다. 개신교회에서 사용하는 “회개(悔改)"란 두리뭉실하고 포괄적인 용어이다.
과연, “사람이 회개하면, 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있다. 특히, 회개한 후, 짓는 죄에 관해서 더 큰 의심이 있다. 이러한 의문과 관련해서, 가난한 마음과 믿음이 중요하다. 죄를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성서에서 반복된다. 특히, 탕자의 비유(눅15)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아들의 모습을 가장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다. 아들은 자신의 궁핍한 처지를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마음이 그를 아버지 집까지 데려간다. 용서는 신의 소관이며, 믿음은 사람의 소관이다. 하느님은 회개하는 사람의 죄와 불법을 멀리 옮겨놓고 다시 기억지 아니하겠다 약속하신다. 사람이 할 일은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의심과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은 죄를 기억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죄의 기억은 사람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언제, 우리는 죄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레테의 강과 에우노에의 강은 문학의 형식을 빌린 사죄의 이미지이다. 단테의 신곡, 연옥 편에서 나오는 망각(레테)의 강과 회생(에우노에)의 강은 죄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하는 사람의 갈망이다.
영원하고 변함없는 사랑의 원천에서 두 강줄기가 흘려 나온다. 이쪽, 레테의 강은 사람에게 죄의 기억을 없애주는 힘이 있고, 저쪽. 에우노에의 강은 온갖 선행의 기억을 되살려 준다.
마텔다의 인도로 참회의 눈물과 망각의 강물로 깨끗해진 단테는 참회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단테는 이렇게 고백한다. “만약 눈물을 흘려야 하는 어떤 참회의 대가도 없이 레테의 강을 건너고 또 그 물을 마신다면, 하느님의 높으신 뜻이 깨질 것이다.” 왜, 참회란 개념이 생기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고백이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이 참회를 너무 가볍게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개신교회들은 보속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주요한 이유는 보속(penance)은 성서에서 요구되지 않았으며, 보속이라는 행위가 죄 사함의 한 요건이 될 수 없다는 해석 때문이다. 천주교회에서 행해지는 보속과 이를 행하지 않는 개신교회의 주장은 모두 성서에서 말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보속이 성서적이다" "아니다"를 주장하면, 편견을 낳게 된다. 오히려, 보속의 전통에는 어떤 유익이 있으며, 어떤 주의할 점들이 있는지를 살펴보자.
성문법에 있는 보상 원리가 양심법에도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람 치어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말하면 다야!”는 정당한 항의이다. 사회와 피해자에게 보상 없는 사죄는 부당하다.
보속의 몇 가지 유익을 살펴보자. 먼저, 보속이 죄를 뒤따르면, 동일한 죄를 피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익이 있다. 보속 없는 사죄는 죄짓는 행위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만들 것이다.
보속의 또 다른 유익은 사람으로 양심의 자유를 누리게 한다. 사회법을 어긴 죄인이 감옥에 갇히면, 그 양심은 오히려 자유를 누린다. 양심법을 어긴 죄인이 받는 보속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저자는 보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대신할 수 없지만, 오히려 그 희생을 온전하게 하리라 생각한다.
개신교회 교인들은 전도의 한 수단으로 사회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천주교회 교인들의 사회 봉사 활동에 비해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Daily Good News, 2017, 12. 4). 아마, 한편에는 보속교리가 있고, 한편에는 보속교리가 없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일 것이다.
사람이 양심법을 어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죄에 관하여 한국 개신교회가 연합하여 만든 용어정의나 절차가 없다. 그래서, 개신교회의 사죄에 대한 가르침은 개교회에 맡겨져 있고, 상당히 가볍게 다루어지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 교인들의 비양심적인 행위, 부조리, 불법은 교회의 사죄에 관한 불분명한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개신교회가 연합해서 사죄에 관한 기본적인 용어정의와 절차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