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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기, 자신, 자아

by 남상석
“나는 너로 인해 내가 된다.”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나의 이름 나의 존재

“나(我)”, “자기(自己)”, “자신(自身)”, “자아(自我)” — 우리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부른다. 이 단어들은 단순한 대명사가 아니다. 내가 나임을 드러내고, 남과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만약 내가 타인과 완전히 같다면, 누군가 대신 나를 살아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 결국 내가 나로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나의 유일성이 다른 이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름도, 얼굴도, 기호도,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영)의 결이 다르다. 그러므로 나에게 “남과 같아지라”는 말은 곧 “너는 사라져라”라는 말이다.

개념의 혼동, 자기와 자아

사람의 근본적인 질문,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사유에서 “자기”와 “자아”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낱말이다. 그러나 이 두 용어는 종종 혼동되어 심각한 오해를 낳는다. 중요한 개념에 대한 혼란은 생각보다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1992년, 미국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 대학촌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 좋은 예다.

일본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한 학생이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핼러윈 파티에 가던 중 잘못해 다른 집에 들어갔다. 놀란 주인의 아내가 급히 남편에게 알렸고, 남편은 총을 들고 나와 학생에게 “Freeze!(꼼짝 마)”라고 외쳤다. 그러나 학생은 이를 “Please”로 오해하고 웃으며 다가갔다. 결국 총알이 발사되었고 그는 목숨을 잃었다. 말 하나의 오해가 비극으로 이어진 것처럼, “자기”에 대한 개념 혼동도 삶과 생각에 큰 영향을 준다.

자기(自己)- 혼이 깃든 이름

“자기(自己)”는 “나”라는 존재, 곧 혼(魂)을 가리킨다. 그러나 직접 “혼”이라 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쓰는 말이다. 특정 사상이나 종교 교리에 제한되지 않고 누구나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인 용어다. 또한 “자기”는 친밀한 호칭으로 쓰인다. 부부가 서로를 “자기”라 부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자신(自身)”은 자기의 몸(身)을 가리키거나, “자기 자신(自己自身)”을 줄인 말이다. 영어의 self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self-control은 “자기 통제”로 번역한다.

흥미로운 점은 myself다. 정확히 번역하면 “내 자기”가 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나 자신”이라고 한다. 이렇게 “자신”은 “자기 자신”을 줄인 형태로, 언뜻 “자기”와 같아 보인다. 언어 혼동을 줄이려면 “self”는 일관되게 “자기”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기와 우리- 관계의 시작

자기는 ‘우리’를 이루는 최소 단위다.
두 자기가 만나 부부가 되고, 여러 자기가 모여 또 다른 우리를 만든다.
우리의 기본 단위는 자기다.
피로 맺어진 우리, 약속으로 세워진 우리, 사랑으로 이루어진 우리가 있다.

그러나 한 자기가 다양한 우리 속에 속하다 보면, 갈등이 생긴다. 나는 한 개인으로서 가족에 속하고, 동시에 수많은 다른 우리에 속한다. 속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한다. 내가 우리에 속하면 그 가치와 목적을 공유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역할과 공동체의 역할 사이에는 늘 긴장이 존재한다.

내 속의 너무 많은 나

자기는 마음속 다양한 욕구 때문에 갈등을 겪는다.

시인 하덕규는 노래 “가시나무”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바람만 불면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많은 이들이 이 노래에 공감하는 것은 실제로 자기 안에서 여러 욕구들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 정체감을 가진 ‘하나의 자기’여야 한다. 그러나 자기가 여럿으로 분열되면 내면의 갈등은 물론, 주변과의 관계 갈등까지 불러온다.

주체로서의 나, 객체로서의 나

사람은 자기를 주체로도, 객체로도 인식한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주체다.
“나 좀 봐, 내가 왜 이러지?”라고 할 때, 나는 객체다.

이 구분 속에서 “관찰하는 자기”, “진아(眞我)”, “가아(假我)”라는 말이 생겨났다. 골프장에서 공을 잘못 치고 자기에게 “이 바보”라고 욕할 때, 욕하는 자기와 욕을 듣는 자기는 같은 자기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 바보”라고 하면 큰 싸움이 난다.

관계 속의 자기

가족에는 가족애(familyhood), 이웃에는 이웃애(neighborhood), 친구에는 우정(friendhood), 그리고 자기에 대한 자기애(selfhood)가 있다. 자기 혹은 남이 자기의 인성이나 신체 조건을 욕하면 갈등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내가 자기를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자기애는 자기를 옹호한다.

자기와 영

나의 본질은 ‘살아있는 혼’이다. 살아있는 혼으로서의 자기(自己)는 몸과 함께 진, 선, 미와 같은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영을 포함한다. 영을 가진 자기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 속에서 서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자기의 갈등

자기의 방향과 가치가 공동체와 다르면 분열과 다툼이 일어난다.
분열된 우리 속에서 자기를 밝히면 미움, 시기, 무관심이 따르고,
조화로운 우리 속에서 자기를 밝히면 칭찬, 인정, 동정이 따른다.

힘든 노동 후 잠자리에 누웠을 때 신음하는 자신을 의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음을 내는 자기와 그것을 인식하는 자기 모두 같은 자기다.

“오늘 무리를 해서라도 이 일을 마쳐야겠다.”라는 다짐과 “이러다 병난다. 그만두자.”라는 갈등 역시 자기 안의 두 목소리다. 이를 “관찰하는 자기”나 “진정한 자기”라고 부르지만, 결국은 한 자기 안에서 생기는 갈등일 뿐이다.

자아(自我)

“자아(自我)”는 자기(自己)와 동의어지만, 좀 더 학문적으로 사용된다. 철학은 자아를 지(知), 정(情), 의(意)로 이루어진 인격의 주체라 설명한다. 발달심리학은 자아를 사회적 교류와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자기 이해로 본다.

정신분석학에서 자아(Ego)는 본능(Id)과 도덕(Superego)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 따라서 “ego”는 이기심을 내포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아(自我)”는 단순히 ‘이기적’이라는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

자아와 정체성

자아 개념(self-concept)과 정체성(identity)은 평생에 걸쳐 형성된다. 특히 청소년기는 자아 형성의 결정적 시기다. 정체성은 성별, 취향, 학력, 직업, 국가, 신앙, 가치관 등으로 드러난다. “나는 가수다”라고 말하는 이는 가수다운 재능과 삶을 보여야 한다. 정체성과 삶이 일치할 때 당당할 수 있다.

반대로 도둑이나 배신자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 없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온갖 종류의 배신자들이 지옥의 가장 밑바닥, 차가운 호수 속에 꽁꽁 얼어붙어 있다. 단테가 그곳을 지나면서 한 영혼의 머리채를 잡고 이름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는 “내 머리털을 모두 뽑아낸다 해도, 내 머리를 천 번이나 걷어찬다 해도, 내가 누구인지 너에게 밝히지 않겠다”라고 대답한다.

정체성을 잘못 인식하면 자기기만이나 위선으로 흐른다. 가장 심각한 거짓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성숙한 자아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은 다양하다. 유전적, 생화학적 요인, 혹은 성장 과정에서의 억압이다. 원하는 것을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박사과정 지도교수가 나에게 묻던 말이 생각난다.

“너 정말 무엇을 원해?”

다른 사람, 주변 상황을 고려하다가, 정작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밝히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문학 속 하이디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만, 결국 “진실된 너 자신”을 붙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피터의 할머니가 하이디에게 유언처럼 말한다.

“하이디, 너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어. 그러나, 그 불을 계속 밝히기 위해서, 너의 깊은 마음을 보고, 진실된 너 자신을 붙들어야 해.”

정신분열과 치매의 공통점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데 있다. 정신분열은 혼과 영이 분열된 상태이며, 치매는 기억과 정체성이 무너진 상태다.

일부 설교자들이 “자아를 버려야 한다”라고 주장하지만, 자아는 버리거나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다. 자아를 버리면 얼빠진 존재가 될 뿐이다. 자아는 세우고 새롭게 해야 할 대상이다.

자아실현- 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나

자기는 우리 없는 곳에서 존재할 수 없고, 우리는 자기 없는 집합체가 될 수 없다. 미숙한 자기는 이기적이지만, 성숙한 자기는 우리 안에서 완성된다.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로 인해 내가 된다.” (Ich werde am Du; I become through Thou)

자아는 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비로소 빚어진다. 그가 말한 “나- 너(I– Thou) 관계”는 서로를 도구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인격 대 인격으로 마주하는 만남을 뜻한다. 우리가 타인이나 신을 “그것(It)”으로 대상화하지 않고, “너(Thou)”로 존중하며 만날 때, 진정한 자아가 드러난다.

나의 선이 우리의 선이 되고, 우리의 선이 나의 선이 될 때, 온전한 자아실현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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