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이 자라는 길은 내면에서 시작된다. 외부의 소음이 잦아들 때, 비로소 내면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고요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마주하고, 혼은 조금씩 자라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외따로 있음’, 즉 마음의 공간을 지키는 시간이다.
국어사전은 ‘외로움(loneliness)’을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으로 풀이한다. 그렇다면 홀로 있으면서도 호젓하고 편안한 마음, 즉 고요 속의 평안을 표현할 수 있는 낱말은 없을까? 영어의 ‘solitude’가 바로 그러한 느낌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단어를 흔히 ‘고독(孤獨)’으로 번역한다. 하지만 그 의미는 고독과는 분명히 다르다. 국어사전은 ‘고독’을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으로 설명한다. ‘고독감(孤獨感)’, ‘고독사(孤獨死)’라는 말에서도 느껴지듯, 고독은 본질적으로 외로움의 정서에 가깝다.
"Solitude"는 다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그것을 “혼자 있는 상태나 상황”으로 풀이한다. 한자어 ‘고독’이 외롭고 쓸쓸한 감정을 포함한다면, ‘solitude’는 감정을 포함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상태를 뜻할 뿐이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 시간 속에서 오히려 평온과 자유를 느낄 수도 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이렇게 구분했다. “‘Loneliness’는 혼자됨의 고통을, ‘Solitude’는 혼자됨의 즐거움을 말한다.”
성서에는 외따움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장면이 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을 때, 제자들은 오고 가는 사람들로 지쳐 쉴 틈이 없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에 가서 잠시 쉬라.”라고 말했고, 그들은 배를 타고 사막 근처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외따로 있음은 회피가 아니라 회복의 시간이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가 의미 있는 활동과 휴식을 위해 ‘외따로 있음’을 선택한다.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는 말했다.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있을 때, 나의 정신은 더 맑고 뚜렷해진다.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을 때 창의성과 독창성이 살아난다. Solitude는 발명의 비밀이다.” 아인슈타인 역시 종종 혼자 일했지만, 그는 언제나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보이지 않는 공동체 속에 자신이 속해 있다고 느꼈다. 진정한 외따움은 세상과 단절된 고립이 아니라, 내면의 중심에서 다시 세상과 연결되는 시간이다.
나 역시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업랜드(Upland)에서 종종 대머리산(Mt. Baldy)을 오른다. 그 산길의 이정표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Please use the area in a manner which will leave no trace so that the next hikers will also find the beauty and solitude they seek.
“다음 등산객들도 아름다움과 외따움을 즐길 수 있도록, 이 지역을 떠날 때는 자연에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Solitude. Respect the solitude of others. Use low voices. Wear colors that blend with the landscape.
“외따움. 다른 사람의 외따움을 존중해 주십시오. 낮은 목소리를 사용하고, 자연과 어울리는 색의 옷을 입어 주세요.”
이 문장을 ‘고독’으로 번역한다면 문맥이 어색하고 의미가 왜곡된다. ‘고독을 즐기십시오’라는 말은 낯설지만, ‘외따움을 즐기십시오’라고 하면 마음이 부드럽게 열린다. 그래서 나는 ‘solitude’에 대응하는 새로운 우리말로 ‘외따움’을 제안하고 싶다. 문맥이 자연스럽고, 감정의 결도 훨씬 풍부하게 전달된다.
“사람은 낙원에서조차 혼자일 수 없다.”는 서양의 속담처럼, 사람은 본래 사회적인 존재다. 그러나 동시에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하기도 한다. 연대감이 삶의 한 축이라면, 외따움은 또 다른 축이다.
사회적 관계가 사람을 확장시킨다면, 외따움은 그 사람의 중심을 깊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