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짓는 남자 2

늦은 입학, 빠른 세상

by 트렌트

입학식 날, 운동장엔 봄바람이 불었다.
교복은 새것인데, 마음은 낡아 있었다.
나는 1년 늦게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 나보다 한 살 어렸다.

“형이에요?”
“응, 뭐… 그런 셈이지.”
“와, 멋있다. 형이면 술도 먹을 수 있어요?”

그때 나는 웃었다.
그 웃음이, 그 아이들에겐 그냥 농담처럼 들렸겠지만
내겐 마음을 감추는 가면이었다.

낮에는 늘 졸렸고, 밤에는 늘 깨어 있었다.
학교 수업은 먼 나라의 언어 같았고,
내 머릿속은 늘 복잡했다.
그래도 이상하게 외롭진 않았다.

“형준 형, 오늘 땡땡이 치죠?”
“왜?”
“피시방 가요.
형은 리니지 잘하잖아요.”

그렇게 우리는 종종 수업을 빼먹고,
학교 근처 피시방으로 향했다.
커피믹스 한 잔, 담배 한 개비,
그리고 모니터 속 세상.
그게 우리만의 작은 도피였다.

“형, 이러다 대학 못 가요.”
“괜찮아. 나 이미 늦었거든.”
그 말에 녀석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왠지 부러웠다.

피시방의 새벽은 늘 비슷했다.
자판기 커피 냄새,
모니터 불빛 아래에서
우리 얼굴만이 또렷했다.

“형, 이 게임은 언제 끝나요?”
“글쎄.
아마도 우리가 현실로 돌아갈 때쯤?”

그때의 나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이 참 묘하다.
우린 게임보다 현실에서 더 길을 잃고 있었으니까.

집에 돌아오면 모두 잠들어 있었다.
조용한 집, 냉장고 불빛,
그리고 거실 벽에 걸린 누나의 서울대 졸업장.
그 아래에는 내 성적표가 놓여 있었다.
결석 17회, 지각 12회.
빨간 글씨로 덕지덕지 써진 숫자들.

나는 한참을 바라보다,
불을 껐다.
그리고 속삭였다.
“괜찮아. 나도 언젠가는, 나만의 길을 만들 거야.”

그 시절의 나는 늘 느렸다.
공부도, 사람도, 꿈도.
하지만 느리다고 해서 멈춘 건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세상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사람일 뿐이었다.

누군가는 앞서 달렸고,
나는 뒤에서 길을 다졌다.
그게 내 방식이었다.

이제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방황이 내 인생의 토대가 되었다.
그때 만난 친구들,
밤새 켜져 있던 피시방 불빛,
그리고 수없이 결석한 교실의 자리가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삶은 늘 느리게 배운다.
하지만 느리게 배운 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삶을 짓는 남자〉 시리즈 예고

다음 편 ― “중국, 그리고 자발적 군대”

: 낯선 땅에서 자신을 잃고, 다시 찾아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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