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16년, 아아! 교직이여! 징검다리여! - 2

- 교단 수기 2 가출, 부질없는 방황을 넘어

by 산골 통신

인문계 고교 생활 3년 과정 중에서 방황의 가능성이 가장 큰 때가 고교 2학년 시절입니다. 고교 1학년 때는 중학교에 비해 한층 높아진 수업 내용과 정규수업,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 등 정신없이 돌아가는 입시 준비로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교 2학년이 되면 1학년 때 받은 성적표를 토대로 성적이 낮은 학생들은 심리적 방황을 하게 되고, 자신감이 없거나 가정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 일부 학생들은 교실 탈출을 감행하게 됩니다. 방황의 흔적은 빈번한 지각, 자율학습 땡땡이, 교무실에 불려오는 횟수로 나타납니다. 이들은 교실에서 조는 수준을 넘어 잠을 자는 수준으로 전이됩니다. 학교 생활은 개인 의지보다는 부모나 교사의 의지로 이어갑니다.

1993년 늦봄, 당시 고2 담임교사였던 저는 대전에서 경기도 송탄까지 차를 몰고 질주했습니다. 무려 20일이 넘게 장기 결석 중인 가출 학생 네 명을 붙잡아오기 위해서였습니다.

제 반 아이 태경이는 해맑고 순수했습니다. 궂은 일을 시켜도 군소리 없이 해냈습니다. 비록 성적은 하위권이었지만 착한 마음 씀씀이는 상위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업 부진에 기대 이하의 성적에 다각도로 힘들어했습니다. 이런 태경이가 급기야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다른 반 아이 정규, 그리고 경준이와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타학교 친구 규철이도 함께 있었습니다.


정규는 특별반에 소속될 만큼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이혼 등 가정 불화가 심각했습니다. 이후 성적이 급강하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상실했습니다. 기본 생활에 장애가 오고 외박을 자주 하다가 가출을 주도했습니다.


경준이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기대를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완고한 아버지는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했고, 기대 이하일 때는 용서 없이 체벌을 지속했습니다. 노래방을 운영하는 부모는 흔들리는 자식에게 통제와 강요로 일관했습니다. 경준이는 아버지의 체벌에 주눅이 들었고 이를 견디다 못해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가출을 감행한 네 친구는 주도면밀했습니다. 가출을 시도한 웬만한 아이들은 주변 친구들에게 소소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러나 네 친구는 어떠한 실마리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장기 결석이 진행되면서 네 친구의 부모는 물론 학급 담임들의 애간장이 탔습니다. 수업에 임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간곡한 부탁을 했습니다. 네 친구의 소식을 아는 친구는 제발 제게 와서 이야기해 달라는 당부였습니다. 아아, 신께서 알아주신 것일까요? 그러던 어느 날 오전, 한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정확한 것은 모르겠는데요. 애들이 송탄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시내에 나갔다가 껄렁거리는 애들한테 우연히 들었거든요. 자세한 것은 모르겠구요. 그리고 이 얘기 제가 했다는 거 절대 비밀로 해 주세요.”


저는 흥분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일과를 마친 후 나는 곧장 교장실에 들어갔습니다.

“교장 선생님, 2학년에 장기 가출 중인 아이들이 경기도 송탄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서 찾아오겠습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니, 박 선생. 구체적인 정보도 없이 그 넓은 곳에 가서 어떻게 애들을 찾는다는 겨. 시간도 좀 늦었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구.”


“교장 선생님, 그냥 속는 셈치고 다녀오렵니다. 설사 찾지 못한다 해도 다녀온 것으로 위안을 삼고 싶습니다.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저는 고집과 열정을 합쳐 부탁을 드렸습니다. 긴 한숨을 내쉰 교장 선생님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습니다.

경부고속도로 대전 톨게이트를 지나 질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황당했고 당황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송탄 버스 터미널 부근, 그리고 주유소, 식당 등을 닥치는 대로 찾아보리라 작심했습니다. 발품만이 기적을 만들 거라고 믿었습니다.

송탄에 도착했습니다. 경기도 송탄은 미군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간혹 미군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에 주차를 해 놓고 먼저 터미널 뒤에 있는 여관과 여인숙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군데의 여관 여인숙을 뒤지면서 기대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연속적인 허탕이었습니다. 업주들의 친절 불친절이 교차했습니다. 여인숙의 경우 잠시 하루 이틀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아예 한두 달 이상 기거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나름대로 구획을 정해 터미널 뒤 굴다리를 기점으로 우측 편은 다 돌았습니다.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좌측 편이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희망을 살렸습니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에 여인숙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워낙 많은 여관 여인숙을 뒤져 소득이 없던 터라 허탕이려니 하고 골목길에 들어섰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여인숙 대문 한 쪽이 열려 있었습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여주인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조심조심 발뒤꿈치를 들고 기역자 복도부터 살폈습니다. 모든 방문의 아래쪽에 정사각형 유리창이 두 개 있어 방안을 들여다보기에 편리했습니다. 기역자 중에 한 획의 복도 검색을 마치고 나머지 한 획의 끝부분에 있는 방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옷가지, 담배꽁초 가득한 재떨이, 수북한 만화책, 서너 개의 등산용 가방이 눈에 띄었습니다. 범죄 행위였으나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습니다.

먼저 등산용 가방을 뒤졌습니다. 졸지에 주택 침입에 절도범이 되었습니다. 저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있었습니다. 고지를 정복했습니다. 녀석들의 학생증에 반가운 얼굴들이 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았습니다.


침착해야 했습니다. 자고 있는 여인숙 주인이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만에 하나, 저의 존재가 아이들에게 알려질 경우 만사가 수포로 돌아갈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조심스레 영화 속 공동경비구역을 이동하듯 여인숙을 빠져 나와 대책을 세웠습니다.


여인숙 대문 중 한 쪽이 안으로 열려 있었습니다. 크지 않은 체구의 제가 버티고 숨어 있기에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문설주와 대문의 틈 사이로 녀석들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잠복했습니다. 오줌이 지렸습니다.

추리닝 복장에 슬리퍼를 신고 경준이가 담배를 피우며 나타났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로 경준이의 친구 같아 보이는 아이가 뒤를 따랐습니다. 녀석들이 여인숙 대문을 지나 꼬부라진 복도로 진입했습니다. 저는 녀석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우뚝 섰습니다. 녀석들은 저를 뚫고 달아나지 않는 한 달리 달아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경준아!”


경준이는 저를 돌아보는 순간 피우던 담배를 내려 끄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옆에 있는 친구도 덩달아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는 여인숙을 뒤집어버릴 기세였습니다. 평소 잘 쓰지도 않는 육두문자를 동원하여 경준이의 왼쪽 뺨을 저의 오른손으로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리곤 왼손으로 녀석의 오른쪽 뺨을 정조준했습니다.

“이 한 방은 네 녀석이 미워서이다! 쫙! 또 한 방은 네 녀석이 반가워서다! 쫙! 들어와! 짜샤!”


잠에서 깬 여인숙 주인 아줌마가 퀭한 눈으로 저를 쏘아보더니 무슨 행패냐며 항의했습니다.

“아주머니! 저 대전에서 올라온 이 아이들 고등학교 선생입니다! 지금 제게 아무 말씀 하지 마세요! 아주머니 당장 영업 못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줌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에도 경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녀석들이 저의 경계망을 뚫고 도주할 가능성에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습니다. 의외로 두 친구는 나의 지시에 순응했습니다. 고맙고 또 고맙기만 했습니다.


녀석들이 머무는 방에 들어갔습니다. 담배를 한 개비 물었습니다. 꿀맛이었습니다. 한숨을 몇 번 내쉬고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알 수 없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나기도 하고 꿈을 꾸고 있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나머지 태경이랑 정규는 어디에 있냐?”


“예에, 지금 일하고 있는데요.”


“그래? 그럼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 알겠구만. 안내할 수 있겠지?”


“아, 예에.”


어느 덧 시간은 밤 11시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정규가 일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정규는 미군들이 주로 드나드는 노래방에서 종업원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친구와 함께 손님처럼 위장하여 노래방에 들어섰습니다. 아아, 정규가 쟁반을 들고 한 방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작심했던 터라 거침없이 정규의 뺨에 충격을 가했습니다. 고래고래 소리도 질렀습니다.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깍두기 두 사람이 저의 양쪽 겨드랑이를 붙잡았습니다.

“당신 도대체 뭔데 행패요?”


“나는 저 학생의 고등학교 선생이오! 이제 고교생인 애들이 이런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되는 거요? 이 손 좀 놓고 얘기 합시다!”


“아니, 여보시오! 저 자식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에 아르바이트 한다고 해서 하라고 한 거지. 우리가 고등학생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래도 최소한 아르바이트를 시킬 때는 신분 확인 정도는 하고 해야 하는 것 아니오! 한창 공부해야 할 시점에 가출을 한 아이들이란 말이오!”


옥신각신 끝에 진정이 되고 주인인 듯한 남자가 나타나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저는 정규가 그 동안 일을 했을 테니 일한 대가를 지불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사장은 거만한 태도로 만 원 권 지폐를 세더니 정규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노래방을 나와 내 학급에 소속된 태경이가 일하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몇 분 걸리지 않는 거리였습니다.

태경이는 경양식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레스토랑에 들어섰을 때 마감 시간이 지났는지 모든 의자들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요란한 기계음, 진공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태경이는 혼자 바닥 카페트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담임 교사인 저를 보더니 태경이는 몇 초 동안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습니다. 해맑은 피부인 데다가 바싹 야윈 태경이에게 소위 귀싸대기를 갈긴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레스토랑 주인 아줌마에게 구체적인 정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럴싸한 계몽을 덧붙인 후 역시 일한 대가를 태경이에게 지불하게 했습니다.


녀석들 넷을 데리고 여인숙으로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멀게 느껴졌습니다. 행여나 달아나지는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순간 저는 운명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이 네 친구들의 운명에 선생인 제가 관여하여 진정 좋은 쪽으로 영향을 주고 있을까 의문했습니다.


저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했습니다. 여인숙에 돌아와 네 친구에게 제안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송탄에 있다는 정보만 가지고 왔다. 만일 너희들이 나와 함께 가고 싶지 않다면 가지 않아도 좋다. 대전에 홀로 내려가서 찾지 못했다고 말하면 된다. 모든 결정은 너희들이 한다.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집으로, 학교로 돌아가는 일이 훗날 너희들 인생에서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후회하는 말을 듣기 싫다. 지금부터 내가 밖에서 1시간을 기다리겠다.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할 것이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해주기 바란다.”

자정이 훨씬 넘어 있었습니다. 저는 송탄 터미널로 뛰어가 주차했던 차를 끌고 여인숙 입구 공터에 세웠습니다. 줄담배는 유일한 안식을 주었습니다. 부디 네 친구가 가출 생활을 접고 함께 갈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기다림은 설렘을 동반했습니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네 친구가 가방을 메고 주차장에 나타났습니다.


“샘, 저희들 내려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네 친구와 악수했습니다. 그리움, 기다림, 고마움의 감정이 상호작용했습니다. 트렁크에 네 친구의 짐을 꾹꾹 눌러 넣었습니다. 빈자리 없는 차 안이 풍성했습니다. 듬직했습니다.


고속도로에 올라 잔잔한 음악을 틀었습니다. 가출 생활에 관한 개인적 소회를 돌아가며 이야기했습니다. 앞으로의 다짐은 속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녀석들은 깔깔대며 웃기도 했습니다. 저는 왠지 모를 속울음을 삼켰습니다.


대전 톨게이트를 나와 우측 제법 넓은 공터에 차를 세웠습니다. 저는 좀 짓궂은 제안을 했습니다. 교황이 다른 나라 방문할 때 비행기에서 내리면 땅 바닥에 키스하듯 대전 도착 기념 땅 바닥에 키스를 하라고 했습니다. 네 친구는 동시에 아스팔트에 뽀뽀를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추측 불가능한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곧장 우리 학교로 차를 몰았습니다. 학교 운동장 네 바퀴를 돌았습니다. 한 바퀴마다 한 사람씩 몫이라고 말했습니다. 학교 잘 다니라는 저의 바람을 그렇게 동그란 원으로 전했습니다.

새벽, 저와 네 친구는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아내가 당황했지만 덩달아 기뻐했습니다. 17평 아파트가 꽉 찼습니다. 우리는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아침 일찍 부모님께 연락했습니다. 먼저 다른 학교 학생인 규철이의 고모부가 와서 규철이를 데려갔습니다.


규철이를 보내고 우리는 함께 학교에 갔습니다. 가는 동안 세 친구는 모든 징계를 감수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많은 선생님들이 반겨주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세 친구를 학생과 선도계로 데려가는 순간 귀를 의심하고 싶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 자식들, 뭣 하러 데려 와! 저것들 와 봤자 또 나갈 놈들인디!”

최선을 다해 데리고 제게 무심코 내뱉은 동료 교사의 말씀 한 마디가 가슴을 찔렀습니다. 그러면서도 더 잘 하라는 말씀을 반어적으로 하는 거라고 믿었습니다. 세 친구는 교칙에 따라 일정 기간 징계를 받고 나서 정상적인 학교 생활에 돌입했습니다.

2학년 과정을 힘들게 마친 세 친구는 고3이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정규는 가정내 불행이 깊어지면서 고3 1학기를 마친 후 자퇴를 하였습니다. 경준이는 도저히 학과 공부를 따라갈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고3 2학기 초반 역시 자퇴했습니다. 태경이는 잘 적응하여 졸업을 한 후 중국에 중의학을 공부하러 떠났습니다. 다른 학교 학생 규철이도 무사히 졸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훗날, 정규는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학에 진학했고 경준이는 부모님의 노래방을 인수하여 사업가로 변신했습니다.


교사란 학생들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성적으로 한 줄을 세워 대학 커트라인에 집어 넣고 대학 진학을 하느냐 못 하느냐로 고등학교 선생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정도일까요? 입시 현실에 젖어 대학 진학만이 최고선이 되어버린 학교. SKY 대학에 진학하면 그 이름이 교문에 길거리에 휘날려야 현실. 대입 이외의 다른 대안을 찾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것이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벌주의와 대학 서열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학교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소외되고 억압받는 학생을 위한 관심과 배려, 끊임없는 관찰과 대화, 성적 아닌 특기와 적성의 계발이 절실합니다.


교사의 소임은 무엇보다도 우리 학생들이 좋아서 가는 길을 향해 잘 건널 수 있도록 견고하게 존재하는 징검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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