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락(聚落)은 사람들의 생활 근거지인 가옥(家屋)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마을이다. 취락은 그 규모가 커지면 도시(都市)가 되고 규모가 작으면 촌락(村落)이 되지만 촌락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 쓰일 때가 많다. 우리말로 마을 또는 벌이라 하며 향리(鄕里) 등과도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원(語源)을 보면 취락은 회(會)의 의미를 안고 있다. 이것은 ‘한 곳에 모인다.’는 뜻이므로 군집의 의미와 같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酋長. 族長 / Chief, Chieftain, Jarl, Patriarch 부족(部族)이나 씨족(氏族) 등의 생활 공동체를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를 지칭하는 단어. 쉽게 말하자면 구성원(構成員)들이 혈연(血緣) 관계로 묶인 작은 공동체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보통 씨족단계를 벗어나 두 가문(家門) 이상을 통솔하게 되면 군장(君長), 그 이상의 연합체 단계가 되면 왕(王)이라고 부른다… 족장(族長)과 군장(君長)은 구분 없이 쓰이는 경우가 더 많다. 추장(酋長)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경우 좀 더 부족제(部族制)에 가까운 원시사회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된다. - 나무위키
소금(塩)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생활(生活)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한 생존(生存)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생활(生活)을 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수렵(狩獵)과 채취(採取) 또한 생활 방편(方便)이 안된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정처(定處) 없이 떠돌아다녀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생활이 아닌 생존 수단밖에 안 된다는 것이 정처(定處)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스스로 확인하고 있었다. 어차피 소금을 취하기 위해 수렵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찻잎(茶葉)을 위해 차(茶) 나무를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정당화하던 사람들도 농경(農耕)이라는 재배(栽培) 활동을 통해 생존이 아닌 생활을 할 수 있는 터전을 가꿔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하나 둘 정착(定着)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차(茶) 나무가 있는 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소금을 만들어 사고파는 유통망(流通網)을 구축한 것이었다. 소금장수는 역사상 최초의 소매(小賣) 장사꾼이었다. 환인(桓因)이 아들 환웅(桓雄)을 보내 신시(神市)라는 도시(都市)를 만들어 문명(文明)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해 줄 결정(決定)을 하게 만든 씨앗이 뿌려진 거였다. 우리가 촌락(村落)과 부락(部落), 취락(聚落)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마을들에 대한 표현은 그러나 엄연한 학문적 정의를 가진, 분명한 구분이 있는 용어들이다.
사람들은 먼저 알아낸 소금을 만들어 먹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해 부족한 찻잎에서 찻물을 만들어 마셨다. 소금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듯 사람은 물을 마시지 못하면 역시 살 수 없다. 그러나 소금과는 달리 물은 각종 균(菌)에 쉽게 오염되어 그 물을 마신 사람들을 병들게 했고 곧 수인성(水因性) 전염병(傳染病)이 되어 온 마을 사람들을 쓰러지게 했다. 차(茶) 나무에서 딴 찻잎(茶葉)이 없으면 사람들은 함께 모여 살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양은 언제나 모자랐다. 차(茶) 나무에서 찻잎(茶葉)을 딸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고 아무 때나 잎을 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인성(水因性) 전염병(傳染病)을 예방해 줄 만큼 약효가 있는 찻잎을 따는 시기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렇게 늘 모자란 찻잎을 사람들은 소금을 만드는 방법을 이용해 최대한 늘렸다. 그 방법은 우리고(infuse) 끓이는(brew) 방법이었다. 사람들이 처음 소금을 접한 것은 염분(鹽分)을 잔뜩 먹은 흙이었다. 그 흙을 퍼서 지게로 날라온 사람들은 그 흙에 물을 부어 흙에 있는 소금을 녹여냈다. 녹여낸 염수(鹽水)를 여러번 여과(濾過)해 더러운 이물질을 최대한 걸러내고 깨끗한 염수(鹽水)를 얻어냈다. 그 과정은 쉽지 않았고 그래서 그 공정(工程)의 전문가를 추장(酋長)이라고 불렀다. 그 후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염수(鹽水)를 만드는 여과(濾過) 과정을 한번에 해결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그것이 우리고 끓이는 방법이었다. 염분흙을 물에 담가 우리고 그래서 침출(浸出)된 염수를 끓여 소금 결정을 얻어내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후일 부족한 찻잎에서 찻물을 만드는 방법에 그대로 적용되었고 그 공정(工程)의 전문가를 이번엔 승상(丞相)이라고 불렀다. 승상(丞相)의 승(丞)자는 김오를 증(蒸)자에서 나온 글자였다.
우리 민족이 한식(寒食)을 설날, 수릿날(端午), 한가위(秋夕)와 함께 4대 명절(名節)로 중요시했던 이유는 그날이 동지(冬至)로부터 105번째로 날이 밝은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부터는 매일 산에 올라가 자신의 차(茶) 나무를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시작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불완전한 천문학(天文學) 수준 때문에 완벽하지 못한 역법(曆法)으로 계산된 날짜였기에 직접 눈으로 매일 확인해야 가장 좋은 상태의 찻잎을 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찻잎의 약효(藥效)가 최고인 시기였다. 한식(寒食) 다음날부터 단오(端午) 전까지 우전(雨前)과 세작(細雀), 중작(中雀)과 대작(大雀)이란 이름으로 네 번씩이나 약효 좋은 찻잎을 딸 수 있는 시기였다. 여름과 가을에도 두물과 세물, 네물이라는 이름으로 찻잎을 땄지만 약효는 단오(端午) 전(前)에 딴 찻잎과 비교하면 형편없었다. 일 년 동안 본인은 물론 가족의 건강이, 생사가 달린 일이었다. 그런 차(茶) 나무를 유산(遺産)으로 남겨준 조상의 묘(墓)는 그래서 애틋했고 이 차(茶) 나무가 누구의 것인지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조상의 묘(墓)는 반드시 가족 소유 차(茶) 나무 주변에 있어야 했다. 우리 민족이 조상의 묘지를 깊은 산속에 모시고 성묘(省墓)를 중시하며 조상을 숭배하는 문화를 가진 중요한 배경이었다. 우리 민족이 고유 풍속(風俗)이라 부르는 전래(傳來) 문화중에 허례허식이 많다고 생각하는 건 설날과 한가위에 모시는 제사(祭祀)만큼은 지독하게 유독 차례(茶禮)라고 지금까지 고집(固執)하는 배경(背景)을 모르기 때문이다. 민족의 고유(固有) 산업이었던 차산업(茶産業)을 빼앗기고 스스로 파묻은 한(恨) 때문이다.
차(茶) 나무를 한 그루 발견하게 되면 그 주변 지역에서는 한 개의 취락(聚落)이 형성되었다. 서너개의 취락(聚落)이 함께 하는 촌락(村落)이 형성되려면 여러 그루의 차(茶) 나무들이 발견되어야만 했다. 폭풍우와 번개가 자주 일어나는 지역에서는 집단 군락(群落)을 이루며 차(茶) 나무들이 생장(生長)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곳은 깊은 산골이기가 십상이었고 그래서 우리 민족의 주된 거주지는 깊은 산골이었다. 수령(樹齡) 이 오래된 완전히 다 자란 차(茶)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면 한 씨족(氏族) 정도는 안심하고 일 년을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찻잎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차(茶) 나무가 아닌 평범한 차(茶) 나무라도 한 가족 정도는 책임질 수 있는 찻잎을 제공해 줄 정도는 되었다. 그래서 차(茶) 나무를 발견하면 발견자는 그 차(茶) 나무를 발견한 사람이 누구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요란스러운 의식(儀式)을 치렀다. 어차피 그 깊은 산(山)을 들어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잘 아는 마을 사람들이기에 그들에게 지금 발견한 차(茶) 나무가 혹여 다른 누구의 것인지 확인한 후 자신의 것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공증(公證)받는 요식행위였다. 후일 차(茶) 나무가 기후변화로 사라진 그 땅에 차(茶) 나무의 변종으로 산삼(山蔘)이 자라나고 그 산삼(山蔘)에 대해 심마니들은 심봤다는 고함으로 차(茶) 나무를 발견했을 때 치루던 동일한 목적의 의식(儀式)을 치렀다.
나중에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차(茶) 나무 소유권에 대한 다툼이 많아지자 나온 대책(對策)은 표지(標識)를 세우는 것이었다. 처음 표지로 세운 나무는 쉽게 뽑혔고 그래서 대체(代替)한 비석(碑石)은 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결국 각양각색의 돌탑이 쌓아졌다. 우리 민족이 그토록 돌탑을 사랑하는 연유였고 그 많은 산(山)들에 그렇게 다양한 돌탑들이 수없이 세워진 연유였다. 기후변화로 차(茶) 나무가 사라진 뒤 돌탑을 쌓는 우리 민족의 손길은 더더욱 애절했고 애절한 만큼 돌탑은 더 많이 세워졌다. 일부 가문(家門)에서 집안을 상징하는 고유 문장(紋章)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연유였고 대부분의 문장(紋章)이 차(茶) 꽃잎과 찻잎 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연유였다. 푸거가(House of Fugger)와 부르봉 왕가(House of Bourbon)의 문장(紋章)은 두 가문 모두 일창이기(一槍二旗)의 찻잎 모양이었다. 우리 민족이 일본과 유럽에서 성행한,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을 그들만큼 많이 가지고 있지 않는 이유는 각양각색의 돌들로 돌탑을 그리도 자유자재로 쌓을 수 있는, 돌을 보는 남다른 안목(眼目)과 그들을 쌓아 올리는 비범한 손재주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기까지만 해도 서울 골목길에서도 쉽사리 볼 수 있었던 비사치기 놀이는 돌을 던질때 사용하는 여러 감각뿐 아니라 어떤 돌이 쉽게 깨지지 않는지 어떻게 세워야 잘 쓰러지지 않게 할 수 있는지 어려서부터 놀이를 통해 부수적으로 알게 하려는 선조들의 용의주도함이 아로새겨진 문화유산이었다. 잘 깨지지 않는 돌로 쓰러지지 않게 세운 돌탑으로 표시된 가문(家門)의 차(茶) 나무는 미필적(未畢的) 고의(故意)와 착오(錯誤)를 가장(假裝)한 절도(竊盜)로부터 가문의 번영을 그리고 안녕(安寧)을 지켜 주었다. 비석 차(且) 자가 네모진 돌들이 층층이 쌓인 모습을 하고 있는 연유다.
취락(聚落)과 촌락(村落), 부락(部落)은 도시(都市)와는 달리 모두 락(落)이란 글자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반드시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함의(含意)하고 있다. 락(落) 자는 삼수변(氵)수자와 초두머리 초(艹)자 그리고 제각각 각(各)자로 이루어진 글자인데 그 뜻을 파자를 통해 알아보면 차(茶) 나무에서 각자 찻잎을 딴 후 마을 공동의 바구니에 합치고 그 후 찻잎들을 물로 우리는(infuse 浸出) 작업중 각자 개인적으로 찻잎을 딴 후 마을 공동의 찻잎 저장고에 들이붓는 작업을 상형(象形)한 글자였다. 풀 초자는 키 큰 차(茶) 나무 가지에 달린 찻잎들을 가리키고 제각각 각(各)자는 그런 찻잎을 채취해 각자의 삼태기에 담았다가 채엽이 끝난 후 마을 공동의 큰 바구니에 쏟아 붇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즉 촌락, 부락, 취락이라고 락(落) 자가 들어간 마을들은 그저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고 차(茶) 나무에서 찻잎을 따고 찻잎을 가공하는 곳이기에 그리 불린 것이었다.
찻잎과 찻잎으로 만든 차(茶)에 가장 좋지 않은 건 고온(高溫)과 다습(多濕)이었다. 차(茶) 나무 가지에서 막 따낸 찻잎은 그로 인해 온도가 올라가는데 이러한 고온은 찻잎에 남아 있는 산화효소(酸化酵素)를 산화시켜 찻잎의 약효를 좌우하는 카테킨(Cathechin)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이를 최소화 하기 위해서는 채엽한 찻잎을 깨끗한 물로 우리는(infuse) 것이 중요했다. 마을들이 하천 유역에 터 잡은 연유였다. 평지(平地)에 위치한 한정(限定)된 지역을 모두 유역(流域)으로 만들기 위해선 물길을 인위적으로 원형(圓形)으로 만들어 주어야 했으나 마을이 주로 차(茶) 나무들과 가까운 산속에 들어앉은 우리나라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물을 꼬불꼬불하게 S자형(形)으로 흐르도록 만들어 유역(流域) 면적을 극대화시켰다. 취락(聚落)이 무조건 차(茶) 나무의 생장 지역을 중심으로 산에 가까운 지역들에 퍼져 있었다면 촌락은 차나무가 있는 산을 벗어나 몇 개의 취락(聚落)들을 비숫한 거리(距離) 안에 두는 상대적인 평지(平地)에 위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촌락(村落)에는 가파른 산지에 있는 취락(聚落)에서는 건설하기 어려운 찻잎의 가공 및 저장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가공과 저장(貯藏)에 있어 필수인 온도(溫度)와 습도(濕度)를 제어(制御)할 수 있는 과학자와 기술자 집단이 촌락에 존재했다는 걸 의미했고 그것들을 건설할 수 있는 많은 숫자의 기능공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금 제조법에서 착안되어 찻물 제조에 적용된 용해(溶解)와 침출(浸出:leaching)을 증류(蒸溜) 직전 단계까지 통제할 줄 알았던 전문가를 일컫는 용어가 추장(酋長)이었다. 그는 가는 잇금을 사용해 쳇불 구멍을 작게 줄인 체(簛)를 만들 줄 알았고 막 따온 찻잎을 물로 식히고 다시 뜨거운 물로 찻잎을 침출 시켜 일정 수준 이상의 약효를 유지하는 찻물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즉 마을에서 제일 가는 체(簛)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기 소유의 차(茶) 나무에서 따온 찻잎을 각자의 집에서 침출 시켜 음용(飮用)했던 사람들이 이제 채집(採集)한 찻잎들을 모두 추장(酋長)에게 모아주었다. 추장은 이렇게 모인 찻잎을 취락(聚落)에서 그만이 가지고 있는 쳇불 구멍이 가장 작은 체(簁)를 사용해 용해와 침출로 찻물을 만들어 150명 정도의 사람들을 일 년 내내 차(茶)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영도하는 사람이었다. 쳇불(그물) 구멍이 큰 순서로 어레미, 도드미, 중거리, 가루체, 고운체로 구분되는 체(籭)는 건조하는 중에 바스러져 작아진 조그만 찻잎까지도 침출 시킬 수 있도록 계속 쳇불 구멍을 줄인 개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어레미는 가로 3㎜, 세로 3.8㎜ 크기의 가장 큰 장방형 구멍(쳇불)을 가졌고 도드미는 쳇불 구멍의 크기가 가로 1.8㎜, 세로 2㎜, 중거리는 가로 1㎜, 세로 1㎜, 가루체는 가로 0.6㎜, 세로 0.6㎜, 고운체는 세로가 0.5㎜, 가로는 이보다 더 좁은 쳇불을 가진 체였다고 한다.
차(茶) 나무가 줄어드는 만큼 찻잎을 걸러준 체(篩)들에 술이 걸러졌다. 추장의 추(酋) 자에서 떨어지는 찻잎을 뜻하는 八 자가 없어진 酉자가 술을 뜻하게 된 연유였다. 영국 옥스퍼드대 진화생물학 로빈 던바(Robin Dunbar) 교수는 한 사람이 제대로 사귈 수 있는 친구의 수는 최대 150명이라고 밝혔다. 발칙한 진화론이라는 번역본 제목을 가진 그의 책에서 그는 그것이 요즘 같은 디지털세대여도 진짜 친구 수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부족사회(部族社會)도 평균 구성원(構成員)이 153명으로 조사되었다고 했다. 2011년에 나온 책이다. 지난 2019년 3월 23일 서아프리카 말리(Mali)에서 발생한 토착(土着) 유목민 부족 폴라니족에 대한 집단 학살로 밝혀진 규모도 130명이 약간 넘는 규모였다. (그분들의 명복을 빌며 그 이외에는 증빙할 자료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인용했음을 양해 바란다.) 그 정도 인원으로 이루어진 집단을 이끄는 사람을 추장(酋長)이라고 불렀다. 찻잎을 모아서 죽여 찻잎 가공을 끝낸다는 뜻의 추(酋) 자 밑에 규격과 법도를 뜻하는 촌(寸) 자가 붙어 따르다, 우러르다의 존(尊) 자가 나온 것은 당연했다. 존(尊) 자의 동자(同字)인 위의 사진의 존자를 보면 찻잎을 여러 개의 체(簛)들로 순차적으로 걸러내는 모습(井)이 잘 상형 되어 있다.
차(茶) 나무를 찾아 떠난 유랑의 길이었기에 차(茶) 나무를 발견하면 정착하고 차(茶) 나무가 모자라 또다시 찻물이 부족해지기 시작하면 대다수는 다시 유랑해야 하는 역사가 반복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리고 쓰린 석별(惜別)의 정(情)을 노래한 것이 아리랑이었다. 차(茶) 나무가 점점 사라져 갔기에 사람들은 차나무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모여들게 마련이었다. 희귀해져 가는 차(茶) 나무가 자라는 곳에 단(壇)을 쌓아 신단수(神壇樹)라 불렀고 그 신단수의 찻잎들에서 우려진(infuse) 물을 수로(ditch)를 따라 흘려보내 마을을 형성할 수 있게 해 살아 나갔다. 신단수(神壇樹)에서 채취한 찻잎을 우려낼(鬯 infuse) 물이 필요했기에 큰 개울을 끼고 있는 곳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최적의 장소로 손꼽았다. 차(茶) 나무가 더욱 희귀해지면서부터는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채엽(採葉)하던 것을 금지시키고 모든 찻잎을 공동 소유로 한 뒤 각 지역의 찻잎들을 모두 한 곳으로 모았다. 한 곳으로 모인 찻잎(茶葉)들로부터 최대의 찻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안된 시설이 인도에서 링감(Lingam)과 요니(Yoni)라 불린 차즙(茶汁)을 만드는 기구(절구)였고 그렇게 나온 찻잎의 액즙(液汁)을 많은 물에 섞일 수 있게 하는 수조(水槽)였다. 희소해진 차(茶) 나무 때문에 한 곳에 모여진 찻잎은 사람들도 모이게 했고 결국 사람들은 몰려 살게 되었다. 이것이 도시(都市)와 도읍(都邑)이었다. 모헨조-다로는 차즙(茶汁)을 만들어 내는 링감과 요니(Yoni)가 내부에 설치된 스투파(Stupa)와 대형 목욕탕(great bath)으로 잘못 알려진 수조(水槽) 시설이 있는 높은 언덕 지역(都)과 사람들이 거주하고 생업을 하는 지역(市)이 함께 그러나 분리되어 존재하는 도시를 보여주고 있다.
도읍(都邑)과 도시(都市)에 쓰이는 도(都) 자는 놈 자(者) 자와 언덕을 뜻하는 우부방(⻏= 阜)으로 이루어져 있다. 놈 자(者) 자는 그러나 사람을 뜻하는 글자가 아니었다. 갑골문을 보면 이파리가 뻗은 나무줄기 아래로 입구자가 그려진 이 글자는 사탕수수에서 떨어지는 달콤한 즙을 받아먹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사탕수수를 뜻했었다고 네이버 한자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자는 사탕수수가 아니라 찻잎에 물을 부어 우려낸(Infuse) 찻물을 담아내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였다. 놈 자(者) 자와 언덕을 뜻하는 우부방으로 이뤄진 도(都) 자가 도읍(都邑)이란 뜻 외에 웅덩이, 못(池), 모두 다, 모이다, 쌓다의 뜻을 가진 이유였다. 모든 찻잎을 다 모아 쌓아놓고 찻잎을 압착(壓搾 squeeze)해 액즙(液汁)을 낸 후 큰 수조(水槽)로 보내 물과 섞이게 하여 결국 압착된 찻잎이 우려난(鬯) 물을 수로(水路)를 통해 분배하는 것을 상형한 글자가 시(市)였다. 읍(邑)이란 글자는 입 구(口) 자와 꼬리 파(巴) 자로 이뤄진 글자인데 큰 수조(口, great bath, 大水槽)에 링감(Lingam 절굿공이)을 사용해 얻은 차즙(茶汁)과 그런 차즙을 물에 우려낸(鬯) 물을 만들어 이 차즙수(茶汁水)를 꼬리(巴) 모양처럼 마을을 빙 둘러 감싸는 여러개의 수조(水槽)를 통해 지역의 구석구석까지 공급하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였다. 자연 경사를 이용한 구릉(丘陵) 지대를 이용해 두 개의 권역으로 나뉘어 건설된 모헨조다로는 도시(都市)라는 말을 만들어 낸 최초의 촌락(村落)이었다.
링가(Linga), 시바링가(Shiva Linga)라고도 불리는 링감(Lingam)은 남근상(phallus)이 아니었다. 링감과 함께 있는 요니(yoni) 또한 샥티(Shakti) 여신의 상징이 아니었다. 농업박물관에 한국의 유물(遺物)로 버젓이 전시되고 있는 옛날 돌로 만들어진 맷돌을 보면 맷돌에서 갈린 즙(汁)을 그릇에 떨어져 모이게 하도록 골이 파여 있는, 인도에서 요니(yoni)라고 불리는 것과 똑같은 홈통(漕) 장치가 선명한데 요니(yoni)는 절구 역할을 하는 링감에 의해 생산된 찻잎의 액즙(液汁)을 수조(水槽)로 인도하는 홈통 역할을 하는 장치였다. 절구공이의 두께를 요니에 나있는 구멍에 쏙 들어갔다 나왔다 할 정도로만 만들면 그건 그대로 링감의 모습이었다. 결국 링감(Lingam)은 액즙(液汁)을 만들기 위한 확(舂)이었고 절구(臼)였다. 생산된 찻잎의 액즙(液汁)을 제대로 흐르게 하기 위해 링감에는 끊임없이 물이 부어졌었다. 지금도 인도인들이 링감에 물을 부으면서 기도하는 연유다. 차(茶) 나무가 없어져 찻잎이 모자라게 되자 차(茶) 나무에서 생산되는 찻잎을 한 곳에 모아 최대한 많은 찻물을 만드는 방법이 필사적으로 탐구되었고 그중 찾아낸 한 방법이 그냥 찻잎을 물에 담가 우려(Infuse)내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wine) 만들 듯 찻잎들을 압착(壓搾)해 액즙을 낸 후, 압착된 찻잎과 차즙(茶汁)을 대수조(大水槽)에 담긴 물과 섞이게 하여 더 많은 찻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여러 개의 수조(水槽)를 차례로 거치게 하는 공정(工程)이 추가되었다.
링감(Lingam)과 요니(Yoni) 앞에는 항상 미로(迷路 labyrinth) 같은 수로(水路)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원심력(遠心力)을 높여 찻물의 흐름 속도를 높이기 위한 장치였다. 액즙(液汁)으로 흘러내려 흐름이 완만할 수밖에 없는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절구질되는 링감에는 계속적으로 그 위로 물이 부어졌고 미로(迷路)로 들어선 찻잎 액즙은 미로(迷路)를 돌아 나가면서 점점 흐름 속도가 빨라졌다. 영국과 아일랜드 그리고 테라섬과 크레테섬 사이의 중간 지점에 있는 몰타(Malta)섬에는 그래서 동서로 교역되는 찻잎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고 결국 유럽 차(茶)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교역되는 찻잎을 보관 저장하고 갈변(褐變)이 심해 더 이상 저장할 수 없는 찻잎을 압착해 찻물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일이었다. 신전(神殿)으로 잘못 알고 있는 석조물(石造物)들은 찻잎 액즙(液汁)을 내어 찻물을 만들어 내는 수조(水槽)시설들이었고 동서(東西)로 교역될 찻잎들의 보관 창고였다. 온도와 습도를 통제하기 위해 화강암으로 지어진 신전(神殿)엔 그래서 창문이 없었고 경면주사(鏡面朱砂)가 석벽(石壁)에 칠해져 있었다. 석조물에 새겨진 소용돌이 문양(文樣)은 찻잎 액즙(液汁)을 수조(水槽)에 보낼 때 반드시 소용돌이 모양으로 수로(水路)를 만들라는 안내였다.
포도주를 만들 때 포도들로 가득 찬 포도 확에서 포도들을 발로 으깨 즙을 내듯이 찻잎의 즙을 내는 확(절구)의 역할을 하는 링감과 링감을 통해 찧어져 압착되어 나온 차즙(茶汁)을 수조(水槽)로 연결된 소용돌이 모양의 수로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요니(yoni)를 각종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고 착즙(搾汁)을 위해 여러 마을로부터 운반되어 집중보관되는 찻잎들을 도적들과 습기, 고온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벽돌로 벽을 두르고 지붕을 친, 대형 저장고(granary: 大舍)로 지은 건축물이 스투파(Stupa: 塔)였다. 스투파가 원기둥의 벽에 돔지붕을 하고 있는 것은 찻잎에 가장 안 좋은 내부의 습도와 온도를 낮추는데 원형이 최고라는 기하학적 지혜 때문이었다.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은 찻잎을 절구질해 액즙을 만들어 수로(水路)로 내보내는 돌로 만드는 스투파 건설 기술을 보존하기 위한 건축물이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짓던 당시 통일신라는 당나라의 압력으로 또다시 차(茶) 산업을 포기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영국과 독일등에서 발견되는 헨지(Henge)들은 기후변화로 부족해진 찻잎들을 한 곳에 모아 압착해 찻물을 내고 이를 물이 가득 차 흐르는, 수조(水槽)와 수로(水路) 역할을 함께 하는 도랑(확, ditch)으로 보내 대량의 찻물을 만들어 사람들이 사는 거주 지역에 공급하던 시설이 있었던 곳이었다. 다른 곳보다 높은 구릉에 자리한 원형의 Henge 위에 지금은 몇 개의 바위들만 열석(列石)으로 남아 서있지만 원래는 석굴암처럼 찻잎을 압착해 액즙을 내기 위해 지어진 스투파 모양의 원형 건물들이 온도와 습도를 낮추기 위해 실리카(Sio2) 암석들로 만들어져 두세개씩 서 있었다. 차(茶) 나무가 모두 사라져 더 이상 찻물을 만들지 못하게 되고 알콜분해효소가 없는 사람들 또한 차(茶) 나무를 찾아 동쪽으로 떠나자 그 돌건물들은 허물어져 갔다. 술을 잘 마실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과 성(城)과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잘 다듬어진 스투파 건물의 돌들을 빼내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기둥 역할을 하던 일부 깨진 돌들만 남아 환상열석(環狀列石)이란 이름으로 흔적만 남아 있지만 그들의 원래 모습은 찻잎의 액즙(液汁)을 만들어 수조(水槽)와 수로 역할을 하던 디치(ditch)로 흘려 보내던 돔(dome) 천장을 가진 원형의 스투파였다. 잉글랜드 솔즈베리에 있는 스톤헨지(Salisbury Plain in Wiltshire)는 헨지(Henge) 위에 건설되었던 스투파(Stupa)의 전형이었다.
돌이 많지 않았던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강변 지역에서 건축을 위해 개발된 것은 벽돌(adobe 甓)이었다. 점토와 짚을 섞어 네모나게 압축한 후 뜨거운 태양에 말린 벽돌은 물을 가둬두는 저수지의 바닥과 벽에도 방수용인 역청과 함께 사용되었다. 벽돌을 뜻하는 한자가 지금은 벽돌 전(塼, 磚) 자를 많이 쓰지만 원래는 찻잎을 뜻하는 점 주(丶)가 들어 있는 기와 와(瓦) 자가 부수로 사용된 벽돌 벽(甓) 자를 쓴 연유였다. 포도주를 담았던 대표적 용기인 암포라처럼 차(茶)를 담는 대표적 용기인 자기(瓷器)를 기와 와(瓦) 자가 들어간 자(瓷) 자를 쓰는 연유였다. 벽돌을 의미했던 기와(瓦) 다음에(次) 발명된 것이 자기라는 뜻이기도 했다. 자기(瓷器)는 차(茶)를 담기 위해 개발된 첨단과학기술이었고 결국 이것은 벽돌이 차(茶) 때문에 발명된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물과 스투파의 벽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벽돌(甓)과 달리 후일 찻물 공급 수로(水路) 건설용으로 개발된 벽돌은 세개의 수로로 펼쳐진 모습을 상형해 㼙자가 사용되었고 또한 햇볕에 말리지 않고 노천 가마의 불에 구워 더 단단하게 만들어진 벽돌은 甃자로 구별해 사용했다.
지금은 사라져 리그베다에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인더스 강 동쪽에서 같은 방향으로 흘렀던 가가하크라(Ghaggar-Hakra) 강의 하류에 없어진 강과는 달리 지금도 있는 도라비라(Dholavira)는 모헨조다로와 달리 모든 건축물을 돌로만 건설한 도시였다. 우리 민족이 암석을 돌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도시를 빙 둘러 17개나 건설한 찻물 제조를 위한 대형 수조는 물론 강을 막아 만든 댐까지도 돌로 만든 도시였다. Citadel이라고 불린 주변보다 높은 지역에 스투파를 건설하고 찻잎을 압착해 액즙을 만들어 이를 다시 거주지역을 빙 둘러 조성된 대형 수조들로 차례로 흘려 보내 대량의 찻물을 만들어 공급한 도라비라(Dholavira)는 찻물을 세개의 지역에 직접 연결된 세개의 수로로 공급한 도시 모헨조다로와는 다른 찻물 공급 방식을 구현한 마을이었다. 도(都)와는 다른 읍(邑)이었다.
속절없는 기후변화와 빼앗긴 차(茶) 산업으로 취락(聚落)과 촌락(村落)이 무언지조차 잊어버리기까지 한 우리 민족의 공동체 역사는 그러나 우리의 몸속 유전자안에는 우리의 고유문화에는 선명히 남아있다. 촌락(村落)이 취락(聚落)과 함께 발전해 간 역사는 찻잎을 가공하고 저장하기 위해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킨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기후변화로 차(茶) 나무가 사라지고 차(茶) 산업마저 빼앗긴 그 아픔들이 지금 돌탑으로 남아있다. 그 자체가 차(茶) 나무를 상징했던 돌탑을 우리 민족은 아직도 몸으로 기억한다. 돌탑은 우리 민족이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在世理化)의 정신으로 온 누리를 이끌었던 그때의 총화다. 그래서 그 역사를 잊어버린 우리 민족이 아직도 돌탑을 쌓고 그 돌탑에 기도하고 있는 연유다. 산에만 쌓아 올렸던 돌탑을 지금은 돌이 있는 모든 곳에 심지어 바닷가에도 쌓아 올리는 연유다. 까닭도 모르면서. 그러나 조상이 우리에게 유전자로 남긴 몸과 마음은 기억하고 있기에 오늘도 누군가에 의해 어디선가에서는 어떤 홍익인간 제세이화(弘益人間 의 염원을 담아 쌓아 올려지고 기원되고 있을 돌탑들이다. 그게 우리나라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