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실의 변덕스러운 무역정책

by 역맥파인더

삼국사기에 궁예의 아버지로 기록된 신라왕은 헌안왕(憲安王)인데 그가 궁예를 버리고 왕위를 물려준 사람은 경문왕(景文王)이었다.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은 후사(後嗣)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경문왕을 사위로 삼은 후 왕위를 물려준 것이었는데 그 경문왕은 헌안왕의 아버지인 김균정(金均貞)을 죽인 희강왕(僖康王 金悌隆)의 손자였다. 헌안왕 자신도 전임(前任) 왕인 문성왕(文聖王)의 아들이 아닌 숙부(叔父)로서 조카 문성왕의 고명(顧命)으로 왕위를 계승한 처지였다. 4년이 안 되는 짧은 재위 기간 내내 경제공황(經濟恐慌)을 겪으며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보아야 했던 불행한 임금이었다. 이러한 굶주림은 기후변화와 기상악화에 따른 농업생산의 부진에서 초래(招來)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상은 달랐다. 일본에서 차(茶)를 수입해 가공 처리한 후 초원로(草原路:Green Road)와 실크 로드(Silk Road) 그리고 마린 로드(Marine Road) 무역상(貿易商)들에게 중계(中繼) 판매해 막대한 무역 이익을 거두어 왔던 청해진(淸海鎭) 시절 신라차(新羅茶)를 거래해 온 무역상(Merchant)들이 당나라 조정의 잦은 무역정책 변동(變動)과 그에 무책임하게 동조해 버리는 신라 왕실(王室) 때문에 차거래(茶去來) 지연(遲延)과 취소(取消)가 빈발(頻發)해지자 파산(破産)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청명(淸明)과 곡우(穀雨) 절기(節氣)에 찻잎 수확이 집중되어 있고 단오(端午) 전까지 가공(加工) 생산이 완료되어야만 육상과 해양으로 연결된 전 세계 유통망을 통해 상품으로 팔려 나갈 수 있는 차(茶)는 그런 이유로 약속된 기일(期日)과 물량(物量)을 지키는 것이 관건(關鍵)인 품목이었다. 엄청난 금액의 선수금(先受金)으로 이루어지는 차(茶) 계약은 지켜지지 않을 경우 신라의 왕실 재정규모로도 배상이 버거울 정도로 막대한 은괴(銀塊)가 오고 가는 엄청난 거래였다. 예로부터 차(茶) 상인(商人)은 머천트 (Merchant)라는 별도의 직함(職銜)이 주어질 정도로 거대한 규모로 거래가 이뤄지고 수백수천 명에 달하는 대상(隊商 캐러반 Caravan)과 수천 척(隻)에 달하는 선단(船團)으로 차(茶)라는 상품을 다루기에 특별한 대우를 받는 상인들이었다. 안록산의 반란이 진압된 후 차(茶)를 수입해 가기 위해 광동 앞바다에 정박(碇泊)한 대형 선박(船舶)만 4천 척이었다고 신당서(新唐書)는 기록하고 있다.

원성왕가계도.jpg 원성왕 가계도 - 4명이 피살되었다.

신라가 오랜 세월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육성해 온 차(茶) 상인(merchant)들이 860년 헌안왕(憲安王) 때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파산해 있었다.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 사후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생명이 경각에 달린 부왕(父王) 신무왕(神武王 김우징)이 장보고(張保皐)에 의탁(依託)해 기사회생(起死回生) 한 것을 생생히 경험한 문성왕(文聖王)은 841년 갑작스러운 당나라 무역정책의 선회(旋回)로 장보고가 암살되고 청해진(淸海鎭)이 해체되는 사변을 두려움에 떨며 지켜봤다. 이제 일본의 차(茶)들은 더 이상 신라를 거치지 않은 채 중국으로 바로 수출되고 있었다. 마한(馬韓)으로 보내지는 차(茶)가 집산(集散)된다고 해서 이름도 대마도(對馬島)인 쓰시마에 여전히 집산된 일본 차(茶)들은 그러나 당나라 선박에 실려 더러는 쿠루시오 해류를 타고 울릉도(鬱陵島)까지 가서 일부는 발해(渤海)로 일부는 명주(溟州)라 불린 강릉(江陵)으로 들어갔고 대부분은 쓰시마에서 해류를 타고 신라 남해안을 따라 순천 벌교(筏橋)에 기항(寄港) 한 후 바로 광주(廣東)로 수출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신라에서 가공된 차(茶)를 최고로 평가하며 수입하던 페르시아 머천트(Merchant:茶商)들이 모두 거래선을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원성왕릉(元聖王陵)과 그의 손자인 흥덕왕릉(興德王陵)에 서역인(西域人:페르시아인) 무신상(武神像)이 세워질 만큼 흔했던 페르시아 차상인(茶商人)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승려(僧侶)로 절에서 차(茶) 가공 기술자로 일하며 신라왕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운명을 저주(咀呪)했던 궁예(弓裔)는 그렇기에 신라 왕실의 비겁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할 수 있었다. 당(唐) 황실이 실크 로드 상방(商幇)과 결탁해 해상무역(海上貿易)을 금지하는 쪽으로 무역정책을 변경할 때마다 신라 왕실은 발 빠르게 동조해 해상(海上)으로 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본에서의 차(茶) 수입과 중국으로의 차(茶) 수출을 금지해 버렸다. 그럴 때마다 일본 차(茶)를 수입 가공해 수출하던 궁예(弓裔) 같은 차(茶) 기술자들은 그 어떤 보상(補償)도 대책(對策)도 없이 실업자(失業者)가 됐고 가족들은 굶어야 했었다. 9세기 내내 간헐적으로 그러나 끊이지 않고 출현한 신라 해적(海賊)의 발생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해상무역의 장려(獎勵)와 금지(禁止)가 쳇바퀴 돌 듯 반복되던 역사는 차(茶) 무역을 마린 로드(Marine Road)를 통해 하던 해상무역파와 실크 로드와 초원로를 통해 하던 육상 무역파의 경쟁과 대립 때문이었다.


손바닥 뒤집듯 손쉽게 바뀌던 당(唐) 나라의 해상무역 장려(獎勵)와 금지 조치(措置)였다. 그때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쿠데타와 반란 같은 극도의 정치 불안이 야기(惹起)되었고 극심한 사회 혼란과 경기 침체(經氣 沈滯)가 초래되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재위 기간:712-756)의 해상무역 장려(獎勵)는 실크로드 상방(商幇)이 지원(支援)한 안사의 반란을 불러왔고 안사의 반란(安史之亂 755-763)으로 생명의 위기를 느낀 현종(玄宗)의 장남 숙종(肅宗 재위:756-762)과 숙종의 장남 대종(代宗 재위:762-779)은 비공식적으로 해상무역(海上貿易)을 적극 장려(獎勵)했다. 실크 로드 무역 상방들이 자신의 집안을 도륙(屠戮)하려 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숙종(肅宗)과 대종(代宗)은 실크 로드 무역 상방을 의도적으로 약화(弱化)시키는 정책을 시행(施行)했다. 특히 대종(代宗)은 실크 로드 상방의 사주(使嗾)와 지원(支援)을 받아 당나라 초기부터 중국을 괴롭혀 온 토번(吐番:티베트 왕국)에게 당 태종(太宗) 이래로 공물(貢物)로 바쳐 온 막대한 비단(緋緞) 제공을 금지시켰다. 토번(吐番)에 무상(無償)으로 공물(貢物)로 전해진 비단(緋緞)이 소그드(sogdian) 상인들에 의해 비싼 값으로 다시 중국 전역에서 중국인들에게 팔리고 있는 현실에 대종(代宗)이 크게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대종(代宗)은 실크 로드파가 장악한 법상종단(法相宗團)이 아닌 마린 로드파가 주도하는 천태종단(天台宗團) 사원(寺院)들에 대해 아낌없는 지원(支援)을 해주었다.

keyword
이전 02화왕건은 왜 궁예의 부하가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