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은 왜 궁예의 부하가 되었을까

지금은 사라진 패강(浿江)

by 역맥파인더

고려가 개창(開創) 되었을 때 왕건(王建)은 왕(王)이 아니었다. 고려의 왕은 궁예(弓裔)였다. 왕건은 자신의 집안이 호족으로 군림하고 있는 송악(松嶽)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그리고 668년에 멸망한 고려의 국호(國號)를 되살린 궁예(弓裔)의 기치(旗幟)를 따라 아버지 왕륭(王隆)과 함께 그의 휘하(麾下)에 들어가 있었다. 왕건 집안의 가령지(家領地)는 당(唐)나라를 앞세운 실크로드 상방(商幇)의 압력으로 신라가 포기해버린 차(茶) 산업(産業)의 중심지였던 대방군(帶方郡)의 패강(浿江) 지역이었다. 평양(平壤)에서 대동강(大同江)과 합쳐져 증남포(甑南浦)를 거쳐 황해(黃海)에 도달하는, 곡산군(谷山郡) 하도면(下圖面)에서 발원(發源)해 동서(東西)로 흐르는 남강(南江)이 곡산군 곡산면(谷山面) 서쪽에 인접한 수안군(遂安郡)에서 발원(發源)해 남쪽으로 흐르는 예성강(禮成江)과 만나 자연적인 경계선(境界線)을 이루는 평양 남강(南江) 이남(以南) 지역과 황해도 예성강(禮成江) 이서(以西) 지역이 낙랑군(樂浪郡)과 더불어 삼한(三韓)의 차(茶) 산업을 이끌어 온 대방군(帶方郡)이었다. 차(茶) 산업을 포기함으로써 당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살아남은 신라는 오랜 당나라와의 전쟁 끝에 되찾은 이 지역에 강력한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남강(南江) 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한, 멸악산맥(滅惡山脈) 북쪽 기슭을 따라 동서로 흐르면서 남북으로 흐르는 재령강(載寧江)과 예성강(禮成江)을 연결해 주는 평산군(平山郡)의 패강(浿江)에 패강진(浿江鎭)이라는 강력한 군정청(軍政廳)을 설치한 신라 정부는 고대(古代) 차(茶) 공장(工場)으로 최고의 문명(文明)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추장스러운 고인돌(dolmen)들마저 그 자리 그대로 지켜내는 이 지역 사람들을 최고의 경계심으로 관리했었다. 점차 영역을 넓혀 간 신라 정부는 패강진의 관할(管轄)을 평양의 남강(南江) 이남까지 확대해 갔다. 고인돌들을 그 자리 그대로 지켜올 정도로 자신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는 대방(帶方) 사람들은 차(茶) 산업을 스스로 짓밟아버린 신라(新羅) 정부를 언제든 기회만 생기면 불태워 버릴 불길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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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에게 궁예는 한국 역사상 유일무이했던 승려왕(僧侶王)으로,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버려진 아들로,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에 벽화(壁畫)로 그려져 있는 신라왕의 화상(畫像)을 보게 되자 칼로 쳐 그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게 한 장수로, 사람들로 하여금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하고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 버렸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될 정도로, 신라가 당나라에 청병(請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그래서 고구려의 옛 서울 평양엔 풀만 무성해졌으니 고구려의 복수를 반드시 할 거라고 김부식이 기록할 정도로 대방(帶方) 사람들보다 신라에 대한 더 큰 복수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것이 왕건이 궁예의 부하로 있었던 이유중 하나였다. 태어났을 때 나라에 해로운 사람이 될 터이니 기르지 말라는 일관(日官)의 말을 따라 아버지인 헌안왕(憲安王)이 자신을 죽이려 했고 그때 한쪽 눈을 실명케 되었다는 사연을 길러준 어미에게 전해 들은 궁예는 세달사(世達寺)란 절로 들어가 중이 되었고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선종이라 불렀다(自號善宗)고 했다.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불렀다고 한 걸로 보아 궁예는 도첩(度牒)을 받지 못한 사도승(私度僧)이었을 것이다. 세달사는 사(寺)로 기록된 걸로 보아 사액(賜額)되어 부역(賦役)과 세금(稅金)이 면제된 절이었을 것이고 사(寺)로 불리던 그 당시 대부분의 절들같이 차(茶)를 가공(加工)하는 공장(工場) 구실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궁예가 차(茶) 가공 노동자로 일할 당시엔 헌안왕(憲安王)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물려받은 경문왕(景文王)이 당나라 몰래 일본 차(茶)를 수입해 와 아랍으로 가공수출하던 시절이었기에 결국 궁예는 세달사란 절에서 차(茶) 노동자로 매일매일을 중노동에 허리가 휘어지는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었다. 후사(後嗣)가 없다는 이유로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준 아버지 때문에 절에서 차(茶) 가공 노동자로 비참하게 살아야 했던 궁예. 차(茶) 산업을 포기해 수천 년 키워온 터전을 일순간에 망가뜨려놓고는 이제 와서 차(茶) 가공 수출로 흥청거리는 경주의 신라를 봐야 했던 왕건과 대방지역 사람들. 이유는 달랐으나 그들의 원한(怨恨)이 사무친다는 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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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송악의 호족 왕륭이 아들 왕건과 함께 896년 궁예 밑으로 들어간 건 명주(溟州)의 차(茶) 때문이었다. 당나라에서 벌어진 황소의 난이 진압되고 그 난을 피해 신라로 들어 온 아랍과 페르시아의 머천트(Merchant:茶상인)들이 모두 다시 돌아간 게 874년이었다. 그 이후 신라는 매년 찻잎 부족 사태를 겪어야 했고 더욱이 일본이 생산된 찻잎을 모두 당나라로 수출하게 되자 극도의 경기침체에 고통받아야 했다. 특히나 왕륭의 아버지 작제건(作帝建)때부터 당나라의 머천트와 차(茶) 공급 계약을 체결, 안정적인 차(茶) 판매를 통해 조금씩 옛 대방(帶方)의 명성을 되찾아가던 송악지역은 차(茶)를 만들기 위한 찻잎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주(溟州)의 김순식이 궁예를 통해 안정적인 대륙으로의 차(茶) 수출 교역로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는 정보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구명줄이라고 왕륭(용건)은 생각했다. 이미 궁예는 원주에서 안성으로 나가 당항성을 이용하는 교역로와 영월로 나가 남한강 수로를 이용, 임진강을 통한 북방 교역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왕륭은 한강에서 임진강으로 들어가는 찻잎들을 송악으로 돌려 차를 제조한 뒤 백령도를 통해 발해만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로 무역한다면 더 큰 이익을 볼 것이라며 궁예를 설득했다. 궁예가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지를 옮긴 것은 이런 연유였다. 구산선문중 하나인 수미산문(須彌山門)이 해주에 터잡은 연유이기도 했다. 896년 궁예가 차(茶) 박람회(博覽會)라 할수 있는 팔관회를 11월에 개최했다는 기록은 왕륭의 아버지 작제건때 연을 맺은 당나라 차(茶)상인(merchant)들이 대거 송악으로 들어와 명주(溟州)의 차(茶)들을 확인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작제건이 당 황제(선종)가 잠저(潛邸)일 때 송악에 머물면서 낳은 아들이고 그가 성장해 아버지가 준 신궁(神弓)을 들고 바다 건너 아버지를 찾으러 가다가 서해 용녀(龍女)와 결혼해 돼지와 칠보(七寶)까지 얻어 돌아왔다는 작제건 설화(說話)는 당나라 차(茶)상인(merchant)과 차(茶) 납품 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온 작제건을 기록한 설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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