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십조는 왜 조작되었을까

by 역맥파인더

당(唐) 현종(玄宗)의 아들 숙종(肅宗)과 손자 대종(代宗)의 은밀한 비공식적 해상무역 지원정책이 만들어 낸 신화(神話)가 이정기였다. 이정기(李正己)는 고구려 유민(遺民)들이 몰려 사는 영주(營州 지금의 조양 朝陽)에서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자란 고구려인이었다. 그를 열전(列傳)에 올려 자세히 기록한 구당서(舊唐書)의 첫 문장은 이정기는 고려인이다(李正己 高麗人也)였다. 안사(安史)의 난이 한창이던 758년 고구려 유민들이 몰려 사는 영주(營州 지금의 朝陽)를 치소(治所)로 둔 평로 절도사(平盧節度使) 왕현지가 죽고 절도사 세습제에 의해 그의 아들이 절도사(節度使)를 세습하려 할 때 이정기는 왕현지의 아들을 살해하고 고종사촌 형인 후희일(侯希逸)을 절도사로 추대하고 당(唐) 조정으로부터 추인(追認)을 받아냈다. 안사의 난을 적극 진압하겠다는 당(唐) 조정과의 약속대로 이정기는 중국 소금 생산의 절반을 담당하는 산동반도를 안록산으로부터 빼앗아 오기 위해 761년 겨울, 2만의 평로군(平盧軍)을 발해만(渤海灣)을 통해 봉래수성(蓬萊水城 지금의 등주 登州)에 상륙시켰다. 762년 봄에 안록산 반란군이 장악했던 청주(靑州)를 탈환한 이정기는 치주(淄州 지금의 치박 淄博)와 밀주(密州 지금의 청도 靑島), 해주(海州 지금의 連云港)까지 점령해 산동반도의 모든 염전(鹽田)을 안록산 반란군으로부터 탈환(奪還) 했다. 762년에 일어난 이정기의 등주(登州) 상륙(上陸) 작전과 염전(鹽田) 탈환 작전 성공은 이제 막 즉위(卽位)한 37살의 대종(代宗)을 매우 기쁘게 했다. 국가 전매제(專賣制)로 운영되고 있기에 산동반도(山東半島)의 염전(鹽田)들에서 나온 수입은 당나라 재정수입(財政收入)의 절반(折半)을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정기 제나라 영역 지도 (1).jpg 이정기의 제나라 판도 출처:KBS 역사저널

구당서(舊唐書)는 765년 이회옥(李懷玉)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로 당시 절도사 후희일이 쫓겨나고 이정기가 절도사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당(唐) 대종(代宗)이 이정기의 절도사 취임을 추인(追認) 해 주었다고 또한 기록했다. 이회옥(李懷玉)은 이정기의 본명이다. 쿠데타로 쫓겨난 후희일(侯希逸)은 처형되기는커녕 776년 검교우복야(檢校右僕射)로 임명되어 회양군왕(淮陽郡王)으로 책봉(冊封)되었다고 적고 있다. 검교(檢校)는 명예직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실직(實職)이 아니라 하더라도 후희일이 처벌되기는커녕 대종(代宗)에 의해 우대(優待)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고구려 유민(遺民)의 아들이라는 것은 빌미일 뿐 실제로는 해운(海運)을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정기는 탄핵(彈劾)당했다. 그를 진압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실크 로드 상방의 사주(使嗾)를 받은 일부 당 조정 신료(臣僚)들 뿐이었다. 이정기를 가짜 쿠데타를 통해 절도사(節度使)로 만든 건 실크 로드 상방들에게 명분(名分)을 주지 않으면서 이정기에게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려는 당(唐) 대종(代宗)의 각본(脚本)이었다. 당(唐) 대종(代宗)은 해운(海運)을 할 줄 아는 고구려 유민(遺民) 세력들에게 최대한의 재량권(裁量權)을 허락해 신라와 일본, 그리고 발해를 절강(浙江)과 연결하는 해상 무역망(貿易網)을 조직(組織)하고 이를 이용한 동남해(東南海) 무역지대(貿易地帶) 운영을 묵인(默認)하고 더 나아가 지원(支援)함으로써 실크 로드 상방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있었다.

신라발해대당무역로 (1).jpg 출처: KBS 역사저널

765년 이정기(李正己)를 평로치청절도관찰사겸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兼 海運押新羅渤海兩藩司)로 임명한 당(唐) 대종(代宗)은 공식적으로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이정기(732-781)가 해상무역을 발전시켜 마린로드 상방을 돕도록 뒤에서 지원했다.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이 55년 가까이 제(齊)나라를 유지하며 해상무역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대종(代宗)의 지원과 묵인때문이었다. 769년 광저우 시박사(市舶使)에 등록한 시박(市舶:외국 선박)은 모두 4천 척이 넘었다고 사서(史書)는 기록하고 있다. 광저우의 좁은 해안엔 대종(代宗)의 공공연한 암묵적 지원으로 이정기의 제(齊)나라가 주도한 중계무역으로 신라에서 가공한 후 들어온 일본 차(茶)를 수입하려는 온 세상의 배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파사박(婆娑舶)이라 불리던 페르시아 선박이었다. 실크 로드 상방중 해상무역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견지(堅持) 해 온 소그드 상방으로선 참을 수 없는 도전(挑戰)이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선 당(唐) 황실인 이가(李家)놈들이 자신들을 철저히 농락(籠絡)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당(唐) 태종이 실크 로드 상방의 지원을 받아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이란 쿠데타를 626년에 일으켜 수(隨) 양제(煬帝)처럼 대운하(大運河)를 이용한 해상무역을 확대하려던 형 태자(太子) 이건성과 동생 제왕(齊王) 이원길을 죽이고 아버지 고조(高祖) 이연(李淵)을 유폐(幽廢)시켜 권력을 잡은 이후 신라에 의해 주도(主導)되는 것으로 가장(假裝)되어 오던 일본 차(茶)의 중계무역은 금지되었다. 수(隨) 나라 때 마린 로드(marine road) 상방(商幇)이 주도하는 해상무역의 거점(據點)으로 번성하던 천태종단(天台宗團)의 사원(寺院)들은 당(唐) 태종의 쿠데타 이후 실크 로드 상방이 지원한 규기(窺基)의 법상종단(法相宗團)에 의해 무자비(無慈悲)하게 파괴되었다. 천태종단에 대해 무자비했던 규기(窺基)의 종단이 자은종단(慈恩宗團)이란 별칭을 갖고 있는 건 역사(歷史)가 자신의 맨얼굴을 보인 몇 안 되는 경우였다. 따라서 수(隨)나라 양제(煬帝) 때 대운하(大運河) 완성을 정점(頂點)으로 찬란히 꽃핀 해양문화는 시들어 버렸다. 당(唐) 태종(재위:626-649)의 강력한 해상무역금지는 그의 아들 고종(高宗)에 의해 유지되다가 이슬람 혁명의 동쪽 전파를 막기 위해 661년 한 해만 광주(지금의 廣東)에 시박사(市舶司)를 설치한 것을 제외하면 줄곧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고종(高宗)의 와병(臥病)이후 실권자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는 그동안 실크 로드 상방에게만 경도(傾倒)되었던 무역정책을 변경해 해상무역이 대폭 강화된 해상무역파와 육상무역파의 균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은 당 태종의 손자들 답게 실크 로드 상방과 거리를 두는 데에 주저했고 결국 자신의 아들들을 더 이상 죽일 수 없었던 무측천(武則天)은 직접 나서야만 했다. 무주(武周)라고 불리는 나라가 세워진 연유였다. 무측천(武則天)의 반(半) 해상무역 금지는 예종의 삼남인 현종(玄宗)에 의해 해상무역 장려로 뒤집어졌고 결국 그 반동(反動)으로 안사(安史)의 난이 발발했다.

이정기제나라대운하 (1).jpg 이정기 제나라 시대의 대운하 교역로(빨간선)

3백 년 후 고려(高麗)에서 다시 똑같은 상황이 재연(再演)되었다. 왕건(王建)이 932년 만부교(萬夫橋) 사건과 933년 훈요십조(訓要十條)를 통해 움직일 수 없는 고려(高麗)의 국시(國是)로 못 박았던 건 바로 다름 아닌 해상무역입국(海上貿易立國)이었다. 그 국시(國是)를 깨트려 버린 건 자신의 셋째 아들과 넷째 아들인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이었다. 어머니가 버드나무 잎을 띄운 물바가지를 왕건에게 건넨 고사(故事)로 유명한 나주(羅州) 호족(豪族) 오다련(吳多憐)의 딸 장화왕후(莊和王后)인 큰아 혜종(惠宗:재위 943-945)은 지금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다. 혜성(槥城:忠南 唐津)의 호족 박술희(朴述希)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漢江) 이 된 광주(廣州)의 해상호족(海上豪族)인 왕규(王規)는 왕건의 국시를 지키려 한 혜종을 돕다 오명(汚名)을 뒤집어쓰고 죽었다. 충주(忠州) 호족(豪族) 유긍달(劉兢達)의 딸을 어머니(神明順成王太后)로 둔 정종(定宗: 堯 재위 945-949)과 광종(光宗: 昭재위:949-975)이 연이어 아버지 왕건(王建)의 해상무역입국(海上貿易立國) 국시(國是)를 뒤집는 데에는 많은 피(血)가 필요했다. 왕건과 함께 해상무역입국의 꿈을 키우며 그와 함께 역사를 만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호족(豪族)들의 기득권(旣得權)을 유지(維持)하는 데에만 골몰(汨沒)하는 분열(分裂) 세력으로 몰려 광종(光宗:재위 949-975)의 왕권강화(王權强化)라는 명분(名分)으로 처형(處刑)되었다. 왕건의 국시(國是)가 찢겨져 나가는 것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고려인(高麗人)들 대신에 쌍기(雙冀) 같은 후주인(後周人)들이 고려의 관직(官職)을 차지했다. 실크 로드 상방의 지원을 업은 후주인(後周人)들은 후일 세종(世宗)으로 불린 시영(柴榮)을 앞세워 삼무일종(三武一宗)으로 일컬어지는 불교탄압 즉, 천태종단(天台宗團)을 탄압한 마지막을 기록한 사람들이었다. 후주인(後周人) 쌍기(雙冀)에 의해 과거제도(科擧制度)가 강제(强制)되고 미화(美化)된 이유였다. 그리고 결국 얼마 안가 해상무역입국(海上貿易立國)이라는 국시(國是)를 유지(維持)시키기 위해 왕건이 심모원려(深謀遠慮)로 장치(裝置)해 놓은, 중추보안체제(中樞保安體制)라 할 훈요십조(訓要十條)가 조작(造作)되고 말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산맥인 차령산맥(車嶺山脈)을 만들어 그 이남지역의 인재들을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이 훈요십조에 삽입(揷入)된 것이었다. 산맥이라 날조(捏造)된 이 낮은 구릉들이 이어지는 선(線)은 사실 기후 조건(氣候條件)에 의해 제한(制限)될 수밖에 없는 차(茶) 나무 가공산업(加工産業)의 북방한계선(北方限界線)이었다. 후일 악화된 기후변화로 남쪽으로 더 물러선 차(茶) 가공(加工) 북방한계선이 된 노령산맥(蘆嶺山脈)과 더불어 차(茶) 가공무역의 중심지역으로 군림해 온 지역(地域) 표지(標識)였다.


당(唐) 현종의 손자인 대종(代宗)은 자신의 이름으로 해상 무역이 권장될 때 실크로드파의 소그드 상방(商幇)이 어떤 짓을 벌일지 잘 알기에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산동반도의 이정기(李正己)를 뒤에서 지원해 안사의 난으로 붕괴된 해상무역 유통망과 조직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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