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은 신라의 영토가 아니었다

by 역맥파인더

궁예(弓裔)의 아버지 헌안왕(憲安王)은 이복형인 김우징(金祐徵: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의 고명(顧命)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죽은 문성왕(文聖王)은 841년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에 청해진(淸海鎭)에 파견된 신라 대사(大使) 장보고(張保皐)가 부하였던 자객 염장(閻長)에게 암살(暗殺)당하고 청해진 폐쇄(閉鎖)에 반발하는 장보고의 부하들이 당군(唐軍)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鎭壓) 당하는 상황(狀況)을 목도(目睹)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문성왕은 평생을 공포(恐怖) 속에 산 임금이었다. 문성왕(文聖王)은 그 공포(恐怖) 때문에 유일한 신라의 공황(恐慌) 타개책인 일본 찻잎(茶葉)을 수입, 가공해 차(茶)로 만들어 수출하는 무역을 재개(再開)할 기회를 끝내 놓쳐 버렸다. 문성왕(文聖王)의 할아버지인 김균정(金均貞)의 사촌 형, 흥덕왕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828년), 새로 황제가 된 당(唐) 문종(文宗)은 자신의 조부(祖父)인 헌종(憲宗)이 819년 이정기(李正己)의 제(齊)나라를 멸망시키며 금지 시켰던 해상무역을 진흥시키겠다며 무진주(武珍州:지금의 전남)를 할양(割讓)하라고 신라에 통보해 왔다. 그때 흥덕왕(興德王)은 자신의 조부(祖父) 원성왕(元聖王)이 해상무역을 지원하는 당(唐) 대종(代宗)의 정책 변경을 기회로 태종무열왕계 혜공왕을 제거하고 내물왕계 왕권을 회복시켰듯이 또한 자신의 친형 헌덕왕(憲德王)이 내물왕계의 왕권(王權)을 보전(保全)하기 위해 친조카인 애장왕을 희생양으로 삼았듯이 당나라의 새 황제 문종의 요구대로 일본 찻잎(茶葉) 수입가공무역을 손바닥 뒤집듯 금지(禁止)에서 장려(獎勵)로 바꾸고 영토 할양도 마다하지 않았다.

청해진 장도 유적지 사진 (1).jpg 청해진이 있던 전남 완도의 장도

헌덕왕(憲德王)과 흥덕왕(興德王) 형제가 그저 왕의 숙부인 김언승과 김수종이었던 시절, 그들은 일본 찻잎(茶葉)을 수입해 가공한 후 차(茶)로 만들어 수출하는 무역을 금지하고 그 해상무역을 실행한 자를 처벌하라는 당나라의 압력에 굴복해 자신들의 큰형 소성왕(昭聖王)의 적장자인 애장왕(哀莊王)을 희생양으로 처형해 내물왕계 왕권을 지켰다. 일찍이 당(唐) 대종의 의도에 발맞춰 일본 찻잎(茶葉) 수입 가공무역 장려책으로 왕위에 오른 조부(祖父) 원성왕(元聖王) 이래 지켜온 내물왕계 왕권을 유지 시킨 그들이었다. 이정기(李正己)의 제(齊)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특별히 창설된 외인부대(外人部隊), 무령군(武寧軍)에서 잔뼈가 굵은 퇴역군인 장보고(張保皐)가 이런 상황에서 무진주(武珍州)에 새로 설치되는 청해진(淸海鎭)에 신라 측 대사(大使: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어 파견(派遣)되었다. 흥덕왕이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청해진에 강력한 방어 성곽을 지어놓겠다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흥덕왕이 당(唐) 문종의 지시로 장보고에게 지원한 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킬 성(城)으로 그때 완성되었던 성곽이 지금도 존재하는 강진(康津)의 병영성(兵營城)이다. 조선 태종때 마천목(馬天牧) 장군이 밤새 눈이 왔음에도 다음 날 눈이 쌓이지 않은 곳에만 둘러 성을 쌓았다는 설성(雪城) 설화는 이때 기반석(基盤石)들이 얼마나 철저히 돌들로만 다져져서 그 위에 성벽이 올라갔는지 알게 해주는 기록이다.

강진병영성 (1).jpg 강진 병영성 성곽 출처:KBS

당시 신라에는 국방상 요충지(要衝地)에 군대를 주둔(駐屯)시키고 성곽(城廓)을 축조하는 등 요새화(要塞化)시킨 곳을 진(鎭)이라고 했는데 총 4개의 진(鎭)이 있었다. 태종 무열왕 때 설치된 서북방의 패강진(浿江鎭), 동북방의 북진(北鎭), 그리고 흥덕왕 3년(828)과 4년(829)에 연속 설치된 청해진(淸海鎭)과 당성진(唐城鎭)이 그것이었는데 그 중 신라가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를 의미하는 대사(大使)를 임명(任命)한 곳은 청해진뿐이었다. 당시 청해진(淸海鎭)은 신라의 영토(領土)가 아니었다. 청해진이 신라의 영토였다면 장보고가 군인 만 명과 함께 흥덕왕으로부터 받아내야 할 관직은 외교관 계급인 대사(大使)가 아니라 청해진과 똑같이 군정(軍政)을 펴던 패강진(浿江鎭)에서처럼 두상대감(頭上大監)이란 장관을 임명해 군영(軍營)으로 통치하게 해야 했었다. 장보고의 직함(職銜)은 그러나 두상대감이 아니라 대사였다. 당시 청해진과 무진주의 해안은 신라의 영토가 아니었다. 흥덕왕은 이렇게 함으로써 전쟁 없는 평화와 경제적 부흥과 내물왕계 왕권의 유지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경덕왕처럼 줄을 잘못 서 왕권(王權)을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죄없는 조카까지 죽이며 지킨 왕위였다.

신라4진분포지도 (1).jpg 신라 4진 분포

무주(武州)의 청해진이 폐쇄되고 그 대신 강화도(江華島)에 혈구진(穴口鎭) 설치 공사가 시작된 건 장보고 암살이 일어난 다음 해인 문성왕 4년(842년)의 일이었다. 청해진 설치와 해상무역 장려책을 쓰던 당 문종(文宗)이 독살당하고 840년 해상 무역을 강력하게 금지한 당 무종(武宗)이 황제로 즉위하고 다음 해인 841년, 해상무역(海上貿易)의 대명사였던 장보고(張保皐)가 부하였던 염장(閻長)에게 암살(暗殺)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842년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청해진(淸海鎭)을 대체(代替)할 혈구진(穴口鎭)의 공사가 강화도(江華島)에서 시작되었다. 그동안 당(唐) 명주(明州: 지금의 寧波)로 보내져 마린 로드를 통해 아랍으로 운반되던 일본 찻잎을 가공해 만든 차(茶)를 북쪽의 강화도(江華島)로 돌려 실크 로드를 통해 유통 시키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진골(眞骨)의 신분으로 해양(海洋) 업무를 관장(管掌)하는 파진찬(波珍飡)을 보좌(輔佐)하는, 6두품(六頭品) 신분으로 해양 업무를 실무(實務) 하는 일길찬(一吉飡) 홍필(弘弼)의 반란(叛亂)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이익이 훨씬 큰, 수익성 높은 판매처를 버리고 거의 수탈당하듯 수익성이 낮은 곳으로 차(茶)를 팔아야 하는 사람들의 정당한 항의였다. 그리고 그 해 문성왕(文聖王)은 장보고의 딸이 아닌 태종 무열왕의 후손(後孫)인 김양(金陽)의 딸을 비(妃)로 맞아야 했다. 실크로드 상방 편을 들다 왕좌를 뺏긴 태종무열왕계 집안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얼마 안 있어 태자(太子)로 책봉(冊封)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 찻잎(茶葉)를 수입 가공 처리해 전 세계에 수출하던 신라의 차(茶) 산업을 스스로 없애고 그 대가(代價)로 당(唐) 태종(太宗)으로부터 군사동맹(軍事同盟)을 얻어낸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 득세(得勢)해야만 하는 시대였다. 회창폐불(會昌廢佛)로 불리는 해상무역거점(海上貿易據點)들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破壞)가 다반사(茶飯事)인 시대였다.

쿠루시오 해류등 한반도 주변 해류의 경로룰 나타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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