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 반란의 진실

by 역맥파인더

문성왕(文聖王) 6년(844년), 강화도 혈구진(穴口鎭) 축성 공사가 완료되고 청해진(淸海鎭)은 폐쇄되었다. 일본 찻잎(茶葉)을 가공해 차(茶)로 만들어 당나라 광동항(廣東港)을 통해 전 세계로 수출하는 해상 무역로의 핵심 군사 거점 중 하나였던 청해진은 이제 없어졌다. 청해진(淸海鎭)에 의해 해적(海賊)들로부터 보호되던 차(茶) 무역선(貿易船)들은 이제 경기 화성(華城) 당성진(唐城鎭)과 인주(仁州) 강화(江華) 혈구진(穴口鎭)에 의해 보호되어 산동반도와 발해만(渤海灣) 이북을 목적지로 항해(航海)하고 있었다. 산동반도 등주(登州)와 발해만 천진(天津)엔 실크 로드 무역 상방(貿易商幇)의 주력인 진상(晉商)들이 신라에서 보내는 차(茶)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운반된 차(茶)들은 진상(晉商)을 통해 당나라 밖에서 기다리는 소그드상(Sogdian Caravan)들에게 인도되었다. 청해진(淸海鎭)과 혈구진(穴口鎭)은 상품의 원료와 가공자(加工者) 그리고 최종 소비자가 모두 똑같은 거래(去來)에서 유통(流通) 경로(徑路)와 담당 상인(商人)들만이 달라진 당시 차(茶) 무역(貿易)의 극단적(極端的) 경쟁(競爭)을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주는 상징(象徵)이 되었다.

혈구진지도 (1).jpg 혈구진 지도

무주(武州)의 청해진은 마린 로드(Marine Road) 상방(商幇)을, 인주(仁州)의 강화 혈구진(穴口鎭)은 실크 로드(Silk Road) 상방(商幇)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런 세월도 잠시, 846년 회창폐불(會昌廢佛)이라 불리는 사상 최악의 천태종단(天台宗團) 탄압을 자행하던 당(唐) 무종(武宗)이 급서(急逝)했다. 3년밖에 안 되는 기간 동안 마린 로드 상방의 대부분의 사찰(寺刹)들은 파괴되었고 승려들은 학살되었다. 천태종단 사원들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노비들은 환속되었다. 그렇게 무자비한 철권을 휘두르며 해상무역을 금지시켰던 당 무종이 급사한 것이었다. 문성왕 8년(846년)의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청해진(淸海鎭) 사람들은 일본 찻잎(茶葉) 수입 재개(再開)를 요구하며 농성(籠城) 했다. 문성왕은 반란(叛亂)이라며 무자비하게 진압(鎭壓)했다. 문성왕 9년(847년), 이찬(伊湌) 김양순(金良順)과 파진찬(波珍飡) 흥종(興宗)이 역시 일본 찻잎(茶葉) 수입 가공 무역 재개(再開)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파진찬(波珍飡)은 무역(貿易)과 해양(海洋) 업무를 관장(管掌)하는 최상위 관직이었다. 일본 찻잎(茶葉) 수입 가공무역 재개에 대한 요구는 청해진에서만 제기(提起)된 것이 아니었다. 그해 4월 대마도(對馬島) 사람 6명이 무주(武州) 진도군(珍島郡) 황모도(黃茅嶋)에 표류(漂流) 해 왔으나 문성왕(文聖王)은 그들이 표류(漂流)되었다고 믿지 않았다. 일본 찻잎(茶葉)을 팔러 온 상인이라 생각한 문성왕은 무주(光州)로 그들을 이송(移送)해 감금(監禁)하도록 했다. 결국 그해 9월, 일본과 신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실크 로드 상방(商幇)이 당(唐) 조정(朝庭)을 움직여 5백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신단(使臣團)을 신라에 파견(派遣)했다. 대부분이 실크로드 상방(商幇)의 진상(晉商)들로 구성된 사신단(使臣團)은 모두 서라벌에 체류(滯留)하면서 일본과 신라의 교류(交流)를 면밀히 감시(監視)했다.

청해진에서 혈구진으로 변경된 차무역로 (1).jpg 청해진에서 혈구진으로의 차무역 항로 변경

문성왕 11년(849년), 이찬(伊湌) 김식(金式)과 대흔(大昕)이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다. 대아찬(大阿飡) 흔린(昕鄰)도 연루(蓮漏)를 의심받고 조사받았다. 문성왕 13년(851년), 청해진에서 소요(騷擾)가 재발(再發)하자 문성왕은 주민(住民)들을 모두 김제(金堤) 동진강(東進江) 벽골제(碧骨堤) 공사장으로 끌고 가게 했다. 경덕왕 때 법상종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본격화되었던 모악산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차(茶) 교역로가 재개되고 있었다. 당(唐) 대종의 암묵적 지원하에 활발했던 해상 무역으로 원성왕 때도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던 벽골제는 이번에는 천태종단이 아닌 법상종단을 위해 보수되고 있었다. 벽골제는 벼농사를 위한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서해 바다의 조석(潮汐)을 이용해 차(茶) 무역선을 바다로 들고나가게 하는 선당(船塘)의 역할을 하기 위해 지어졌던 시설이었다. 벽골제를 선당(船塘)으로 사용하기 위해 보(洑:돌아 흐르게 하는 둑)와 제(堤)를 다시 쌓고 바닥을 깊게 준설하는 작업에 청해진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투입한 것이었다. 이제 청해진이 있던 완도와 주변 섬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공도(空島)가 되었다. 장보고의 몰락(沒落)을 목도(目睹)한 문성왕(文聖王)은 죽을 때까지 그때의 공포(恐怖)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唐) 황제가 846년 무종(武宗)에서 선종(宣宗)으로 바뀌어 해상무역 금지 조치가 해제되었어도 일본 찻잎(茶葉)을 수입 가공(輸入加工) 한 후 해상무역을 통해 전 세계에 차(茶)를 수출(輸出)했던 전통(傳統)적인 신라 산업체계(産業體係)는 복원(復元)되지 않았다. 문성왕은 복원(復元)을 시도(試圖)조차 하지 않았다. 재위(在位) 기간 내내 반란이 끊이지 않은 이유였다. 처음엔 차 산업(茶産業)을 지키자는 반란이 일어났고 당 무종(武宗)이 죽은 후엔 사라진 차 산업(茶産業)을 복원(復元) 하자고 일어난 반란(反亂)이었다. 당 무종이 죽고 해상무역에 대해 관대한 선종(宣宗)이 즉위하자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은 바다 건너 당나라로 건너가 차(茶) 무역 허가장을 가지고 왔다. 작제건이 당 선종(宣宗)의 아들이라는 매몽(買夢) 설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고 작제건이 터 잡은 송악(松嶽)에 왕기(王氣)가 흐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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