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새로운 황제 선종(宣宗)은 환관(宦官)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해나가면서도 환관들이 마음대로 전횡(專橫) 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한편 우이당쟁(牛李黨爭)의 당사자들인 번진(藩鎭) 협상파, 우승유(牛僧孺) 파당(派黨)과 번진 탄압 및 폐불(廢佛) 강행파, 이덕유(李德裕) 파당 모두를 억제했다. 대중(大中)을 연호(年號)로 사용하며 마린 로드 상방이 후원한 우승유 일파와 실크 로드 상방이 지원한 이덕유 일파 사이에서 중립을 지킨 선종(宣宗)의 13년 통치였다. 그러나 신라는 그동안 해상무역 재개(再開)를 놓고 찬반 극단을 오가며 반란이 연속되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문성왕은 부왕(父王) 신문왕(神文王)의 이복(異腹) 동생인 숙부 김의정(金誼靖)에게 양위(讓位)하고 죽었다. 헌안왕(憲安王)은 문성왕이 끝까지 거부하는 바람에 너무 늦어버린 일본 찻잎(茶葉) 수입 재개및 페르시아와의 해상무역 재개에 따른 책임을 져야만 했다. 이미 신라 경제는 실패를 넘어 붕괴(崩壞) 되고 있었다. 기아(飢餓)에 허덕이며 굶주려 죽는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암살을 당한다 하더라도 일본 찻잎(茶葉)를 수입 가공(輸入加工) 한 후 페르시아에 차(茶)로 수출(輸出)하는 해상무역을 복원(復元)해 신라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결연(決然)한 의지를 보인 희강왕(僖康王) 김제륭(金悌隆)의 손자 김응겸(金膺兼)이 후계자로 선발되어 헌안왕의 사위가 되었다. 헌안왕(憲安王)에게 김응겸(金膺兼)은 아버지 김균정(金均貞)을 죽인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 김제륭의 손자(孫子)였으나 아사자(餓死者)가 넘쳐나는 신라의 경제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대안(代案)인 일본 찻잎(茶葉) 수입 가공무역(輸入加工貿易)을 재개하겠다는 사람은 그 밖에 없었다. 누구도 암살의 위협(威脅)을 무릅쓰면서 나서려 하지 않았다. 신라왕에게 배신당하고 암살당한 장보고(張保皐)의 유령(幽靈)이 아직도 화백회의장(和白會議場)에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아다니는 신라 귀족사회(貴族社會)였다.
861년 경문왕(景文王)이 즉위하던 때 당(唐) 조정(朝庭)은 절동(浙東:전당강(錢塘江)의 동쪽 지역)에서 일어난 구보(裘甫)의 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하는 등 강회(江淮) 지역(장강 중하류 지역)에서 연이어 일어난 민란(民亂)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해상무역(海上貿易)을 금지했다가 허용하고 다시 금지했다가 장려(獎勵)하기를 반복하면서 당(唐) 조정(朝庭)은 이 지역 백성들의 신망(信望)을 완전히 상실(喪失)해 가고 있었다. 855년부터 일어난 절동(浙東) 지역의 반란(叛亂)은 858년 장강(長江) 하류에 위치한 남경(南京) 남쪽 선주(宣州:지금의 선성(宣城) 시에서 일어난 강전태(康全泰)의 반란(叛亂)에서부터 심각해져 있었다. 그 지역의 부상(富商)들과 토호(土豪)들도 반란에 참여하는 결정적 민심이반(民心離反)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상무역을 통해 당(唐) 나라를 먹여 살리던 절동[浙東:전당강(錢塘江)의 동쪽 지역]을 포함한 강회(江淮) 지역 백성들이 진봉(進俸)을 위한 착취(搾取)와 수탈(收奪)로 도탄(塗炭)에 빠져 있었다. 그런 절동(浙東) 지역에서 859년 구보(裘甫)가 주동해 일어난 반란에는 지역 토호(土豪)뿐 아니라 호상(豪商)까지도 부랑인(浮浪人)과 군도(群盜)들이 몰락 농민(沒落 農民)들과 섞여 있는 반란군(叛亂軍)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경문왕(景文王)은 여전히 서슬 퍼런 실크 로드 상방(商幇)들의 감시(監視)와 견제(牽制)를 피해 일본 찻잎(茶葉) 수입 가공무역 산업을 복원(復元) 하기 위해 왜구(倭寇)라는 기발한 위장(僞裝)을 생각해 냈다. 일본 찻잎(茶葉)을 정상적인 상거래로 교역(交易)하는 것이 아니라 신라인들을 왜구(倭寇)로 변장(變裝)시키고 일본 찻잎(茶葉)을 잔뜩 실은 신라 배를 왜구선(倭寇船)으로 꾸며 신라(新羅) 해안에 상륙시키는 방법이었다. 신라인들을 왜구(倭寇) 차림으로 신라에 상륙시켜 일본 찻잎(茶葉)들을 신라 땅에 하역(荷役) 한 후 왜구(倭寇)로서 다시 일본에 돌아가게 하는 눈속임이었다. 경문왕(景文王)은 일본에 미리 협조를 구해 864년 4월 일본 국사(國使)가 신라에 파견되도록 조치했다. 신라에 들어온 일본 국사(國使)에게 자세한 위장(僞裝) 내용이 통보되었다. 이로써 신라와 일본 상호 간에 왜구(倭寇)로 가장(假裝)한 찻잎(茶葉) 무역으로 불상사(不祥事)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협력체제가 구축(構築)되었다. 일본 찻잎(茶葉)을 가공해 수출(輸出)할 때도 실크 로드 상방(商幇)이 잘 알고 있는 페르시아 쪽 상인들에게 수출하지 않고 용모(容貌)와 언어(言語)가 사뭇 다른 아랍(Arab) 상인들과 거래(去來)를 하는 변칙(變則)이 동원되었다. 아랍인들은 특히 언어(言語)가 달라 페르시아인(persian) 들과 확실히 구별되었는데 후일(後日) 경문왕의 아들 헌강왕(憲康王) 때 처용(處容)이 신라에 들어오게 된 연유였다. 천일야화(千一夜話)로 유명한 아랍 설화(說話) 문학의 대표적 이야기들은 신라(新羅)와의 무역(貿易)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기원전 350년대 전국(戰國) 시대 위(魏) 나라 양혜왕(梁惠王)이 완성한 홍구(鴻溝)를 기반(基盤)한 통제거(通濟渠)가 605년 개통되어 황하(黃河)와 회수(淮水)가 연결되고 610년 수(隨) 양제(煬帝)가 장강(長江)과 절강(浙江:전당강)을 연결하는 강남운하(江南運河)를 새로 완성했다. 이로써 춘추(春秋) 시대 오(吳) 나라와 월(越) 나라의 경쟁(競爭)을 통해 이미 기원전 480년대 완성된 회수(淮水)와 장강(長江)을 연결하는, 회안(淮安)과 양주(揚州)를 연결하는 한구(邗溝)와 여항(余港)이라 불렸던 항주(杭州)와 명주(明州)라 불렸던 영파(寧波)를 용강(甬江)과 조아강(曹娥江)등을 이용해 연결한 절동운하(浙東運河)를 이들과 연결해 이용하는 해상운송(海上運送)이 본격화되었다. 역참(驛站)이 필요 없는 해상운송은 물류비용(物流費用)이 거의 들지 않았다. 비용절감(費用節減)을 확인한 지역 중소 차(茶) 상인들이 점점 실크 로드 상방(商幇)들에게 차(茶)를 팔지 않았다. 중국 내륙의 물자와 일본과 발해(渤海) 같은 동해 연안 국가들의 물자들도 명주(明州:지금의 영파寧波)를 포함한 중국의 절동(浙東) 지방으로 몰려들었다. 이정기(李正己)와 장보고(張保皐)는 그런 해양시대(海洋時代)를 활짝 꽃 피우다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실크로드 상방(商幇)들의 견제(牽制)에 휘말려 역사의 희생양(犧牲羊)이 된 기린아(麒麟兒)들이었다. 850년대 이후부터 절동(浙東:전당강의 동쪽 지역) 지방에서 반란(叛亂)이 빈발(頻發)했던 건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선박(船舶)이라 불린 새로운 차원의 배인 무역선(貿易船)을 타고 전 세계를 누비는 선원(船員)이 주인공인 신밧드 이야기가 탄생(誕生)된 배경(背景)이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로 알려진 천일야화(千一夜話) 속 신밧드 이야기의 신밧드는 Sinbad라고 썼다. 처용(處容) 같은 아랍인들은 신라(新羅)를 시나(Sinae)라고 부르고 썼다. 아랍인들이 船舶을 손박이라고 읽는 데에는 다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