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진실

by 역맥파인더

당(唐)나라 조정(朝庭)이 절동(浙東)을 포함한 강회(江淮) 지역에서 855년부터 연속 발생된 민란(民亂)들을 진압(鎭壓)하려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황(狀況)을 이용해 경문왕(景文王)은 실크 로드 상방(商幇)에게 암살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찻잎(茶葉)을 수입 가공(輸入加工)해 차(茶)로 수출(輸出)하는 무역 산업(貿易産業)을 다시 일으켜 세워 놓았다. 신라가 일본 찻잎(茶葉)을 다시 수입(輸入)한다는 비밀(秘密)이 새어 나가지 않게 일본 찻잎(茶葉)을 신라로 들여올 때 신라인들을 왜구(倭寇)로 가장(假裝)시켜 모든 걸 처리한다 해도 반드시 신라에 입국해 무역대금(貿易代金) 정산(精算) 같은 민감한 문제들을 조정 하기 위해 체류(滯留) 해야 할 일본인들이 꼭 있었다. 그런 일본인들을 드러나지 않게 숨길 곳은 왕궁(王宮)밖에 없었다. “왕의 침전(寢殿)에는 날마다 저녁때면 뱀들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궁인(宮人)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쫓으려 하니 왕은 말하기를 "나는 뱀이 없으면 편히 잘 수가 없으니 쫓지 말라." 했다. “왕이 잘 때에는 늘 뱀들이 혀를 내밀어 온 가슴을 덮어 주었다.” 경문왕(景文王)의 곤혹(困惑)스런 사정을 삼국유사(三國遺史) 경문대왕조(景文大王條)의 기록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영주 순흥 벽화 고분에 나타난 뱀과 이방인

쿠루시오 해류(黑潮 Kuroshio Current)가 대만(臺灣) 서쪽에서 시작해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동해로 진입하는, 오로지 동북쪽으로만 흐르는 특성상 일본에서 서남쪽 중국 방향으로 직접 흐르는 해류를 만나기란 그 당시엔 불가능한 일이었다. 521년 울릉도(鬱陵島)를 이사부(異斯夫)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정벌해 차지한 것도 울릉도를 돌아 거문도를 향해 흐르는 해류를 통해 움직이는 차(茶) 무역선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찻잎(茶葉)을 수출해야 하는 일본 입장에서도 차(茶)를 수입해야만 하는 페르시아와 아랍 입장에서도 신라의 중계무역 참여는 그들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6세기 중반부터 본격화된 기온저하(氣溫低下) 현상 때문에 850년경에 이르러서는 당나라에서 제조하는 차(茶) 생산량만으로는 당나라 자체 소비량도 채우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 회창폐불(會昌廢佛)을 통해 천태종단(天台宗團)의 사찰(寺刹)과 사원(寺院)들을 문 닫게 하고 그곳에 소속된 승려들과 노비들, 전답 같은 재산을 모두 흩어버려 마린 로드(Marine Road) 상방(商幇)의 거점(據點)들을 철저하게 파괴한 실크로드(Silk Road) 상방(商幇)은 당시 전 세계 차(茶) 유통을 독점하며 전대미문의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소그디안(Sogdian) 상인들이 서역에서 차(茶)를 팔아 가져온 막대한 수익금을 진상방(晉商幇)에게 입금하면 진상(晉商)들은 푸짐한 상납금(上納金)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런 불로소득(不勞所得)에 도취(陶醉)한 의종(懿宗)을 비롯한 당(唐) 황실(皇室)과 조정(朝庭)은 국가를 붕괴(崩壞)시키는 아홉 가지가 무엇인지 역사 앞에 시현(示現)하며 망해가고 있었다. 그런 막장 정세(情勢) 속에 신라 경문왕(景文王)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擔保)로 신라 백성들을 굶주림 속에서 구하고자 뱀(왜인)들에 둘러싸여 매일 밤을 보내는 고역(苦役)을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아들 헌강왕(憲康王) 때 누렸던 신라인들의 번영(繁榮)은 경문왕의 15년, 그 잠 못 이룬 밤들 때문이었음을 삼국유사는 그렇게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내물왕계 가문(家門)의 왕권(王權)을 지킬 수 있다면 동복형(同腹兄) 소성왕(昭聖王)의 장자(長子:애장왕)라도 동복형(同腹兄) 헌덕왕(憲德王)과 조카 김제륭(金悌隆: 후일의 僖康王)과 공모해 서슴지 않고 죽인 흥덕왕이었다. 흥덕왕이 일본 찻잎(茶葉) 중계무역을 당(唐)나라가 금지하라면 금지하고 재개하라면 재개하는 변신(變身)의 귀재(鬼才)로 처신한 덕에 신라는 청해진(淸海鎭)이 가져다 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청해진이 설치된 무주(武州)의 일부를 당(唐)나라에 할양(割讓)하면서 그 대가(代價)로 김대렴(金大廉)이 당(唐)으로부터 받아 와 지리산에 심은 차(茶) 나무들이 경문왕(景文王) 때에 와서는 제법 많은 찻잎들을 생산해 내고 있었다. 문제는 얼마나 자란 찻잎을 수확해야 가장 좋은 것인지를 몰라 채엽(採葉)하는 데에 늘 착오(錯誤)가 생겨 많은 손실(損失)이 발생하고 있다는 거였다. 청명(靑明)과 곡우(穀雨)라는 채엽 기간(期間)에 관한 분명한 기준은 있었으나 어느 정도나 자란 찻잎이 가장 잘 자란 찻잎이냐는 데에는 오랜 논쟁(論爭)이 있었다. 경문왕(景文王)은 이 다툼에서도 분명한 기준(基準)을 주었다.



당나귀 귀였다. 모양이 당나귀 귀처럼 생긴 찻잎을 청명과 곡우 사이에 채엽(採葉)하라고 명확(明確)한 지침(指針)을 주었다. “왕위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 귀처럼 되었다. 그러나 왕후(王后)와 궁인들 모두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오직 두건(頭巾)을 만드는 장인(匠人) 한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토록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도림사(道林寺)의 대나무 숲 속에 사람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나무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 그 후로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숲에서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 왕이 이 소리를 싫어해서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山茱萸)를 심었다. 그러자 바람이 불면 다만 이러한 소리만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 삼국유사(三國遺史) 경문대왕조(景文大王條)의 기록이다.


수리부엉이

백성들은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며 나라에서 제일 귀한 곳에 있는 왕의 허물을 언제고 기억하다가 찻잎을 따야 될 때 당나귀 귀 모양을 한 찻잎만을 따냈다. 경문왕의 영특(英特)한 지혜(智慧)를 삼국유사(三國遺史) 경문대왕조(景文大王條)의 설화(說話)는 지금까지 기리고 있었다. 그렇게 따 낸 찻잎들이 수리부엉이의 눈썹과 매우 닮아 있음을 알아낸 신라인들은 단오(端午) 전에 찻잎을 모두 가공해 일 년 차농사(茶農事)를 마친 후 수리떡을 만들어 먹었다. 물론 그 수리떡엔 차(茶) 나무 꽃이 그 이쁜 꽃잎들을 보이며 어린아이들을 교육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 경제 위기 속에서 신라와 백성들을 누가 구해낼 수 있겠냐며 고민하던 궁예의 아버지 헌안왕(憲安王)이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인 철천지 원수의 손자인 김응렴(金膺廉)을 왕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하게 한 일화(逸話)는 그래서 소중하다.


헌안왕(憲安王)은 당시 20살이던 훗날의 경문왕, 김응렴(金膺廉)에게 물었다. “착한 사람을 본 적 있느냐?”

그 질문에 훗날 경문왕이 되어 신라를 구하는 김응렴(金膺廉)이 한 답(答)은 이랬다. “높은 직위(職位)를 가진 사람임에도 남을 대할 때 자신을 낮추는 사람, 재물이 많은 부자였으나 사치(奢侈) 대신 절제(節制)를 덕(德)으로 여기는 사람, 권세(權勢)와 영화(榮華)를 누리면서도 남에게 세도(勢道)를 부리지 않은 사람. 이렇게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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