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鬱陵島)를 돌아 대마도를 거쳐 남해(南海)를 동(東)에서 서(西)로 흐르는 연안해류(沿岸海流)를 이용해 항해하던 선박들이 고흥반도 남쪽의 거문도(巨文島)를 뜰채처럼 이용해 고흥반도(高興半島)와 여수반도(麗水半島) 사이의 벌교만(筏橋灣)으로 들어오면 일본 찻잎(茶葉)들은 솔뫼(조계산) 길상사(吉祥寺)에 있는 수많은 승려(僧侶)들에 의해 신속히 장흥(長興)으로 운반(運搬)되었다. 존제산(尊帝山)과 초암산(草庵山) 사이의 계곡(溪谷)을 따라 보성(寶城)에서 벌교(筏橋) 쪽으로 흐르는 칠동천(七洞川)을 거슬러 금천리(金川里)에서 보성강(寶城江)에 들어선 배(舟)들은 그대로 장흥(長興)까지 내달렸다. 벌교에서 장흥까지 배(舟)로 운반(運搬)되는 차(茶)들은 가족(家族)들을 굶주리지 않게 해주는 보물(寶物)이었고 그런 보물들을 무사히 벌교에서 장흥(長興)까지 운반될 수 있도록 지키는 곳이라 하여 보성(寶城)이란 고을 이름이 붙여졌다. 이렇게 배(舟)로 장흥(長興)까지 부리나케 달아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산(山)에는 주월산(舟越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장흥(長興)에 부려진 일본 찻잎(茶葉)들은 박혁거세(朴赫居世) 시절부터 진한(辰韓)의 자랑으로 내려온 시루(斯盧 SiLu)를 이용한 청태전(靑苔錢) 제조공정(製造工程)에 투입(投入)되었다. 지붕 있는 대청마루(樓)에서 하루 동안 말리는 시들리기(위조萎凋)를 거친 찻잎(茶葉)들은 시루(斯盧 SiLu)에서 일정 시간 수증기로만 찌어(蒸) 낸 다음 절구(臼)에 넣어 고르게 빻아졌다. 이후 양손을 동시에 사용해 찧어진 차를 돌돌 말아 동그란 모양을 잡고 누른 뒤 다시 대청마루(樓)에서 건조(乾燥)하고 그 후 한가운데 구멍을 뚫고 실로 묶은(貫) 뒤 다시 건조(乾燥) 했다. 우리 민족 고유(固有)의 전통 육아법(育兒法)인 단동십훈(檀童十訓) 중에서 잼잼(지암지암 持闇持闇)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절구에서 나온 찻잎(茶葉)을 동시에 양손에서 동그란 모양의 차환(茶丸)으로 만들어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청태전(靑笞錢)을 만들어 내기 위한 조기교육(早期敎育)의 일환(一環)이 바로 잼잼이었다. 떡 만들 듯이 시루에서 찌고 절구에서 찧어져 만들어진 장흥 차(長興茶)는 그래서 떡차(餠茶)로 불렸다.
진시황(秦始皇)때 사용되었다는 반량전(半兩錢)과 한무제(漢武帝) 때부터 사용되었다는 오수전(五銖錢) 같은 동전을 우리 민족은 동전(銅錢)이라고 석전(錫錢)이라고 또는 철전(鐵錢)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우리 민족은 그것들을 엽전(葉錢)이라고 불렀다. 우리 스스로를 비하(卑下)하는 데 사용되는 줄로만 알았던 그 엽전(葉錢)이라는 단어는 그러나 우리를 비하시키기는커녕 찬란(燦爛)한 과학기술문명(科學技術文明)의 선구(先驅)를 우리 선조(先祖)들이 작(作)하고 있음을 증명(證明)하는 증거(證據)였다. 찻잎(茶葉)을 시루(斯盧 Si Lu)에 쪄서 양손으로 잼잼해서 동그랗게 구형(球形)으로 만든 후 다시 눌러 원형(圓形)으로 만들고 그 후 가운데 구멍을 뚫어 교역(交易) 하기 편하게 여러 개를 한데 묶은, 청태전(靑苔錢)이라 불리는 차(茶)를 만들어 내던 장흥의 차(茶) 역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결코 녹록지 않은 차 제조산업(茶製造産業) 역사(歷史)가 우리에게 있었음을 증명하는 언어(言語) 사용사(使用史)다. 원형(圓形)의 차(茶)에 가운데 동그란 구멍을 만들어 그 구멍에 실을 꿰어 사용해 관(貫) 또는 민(緡)으로 전 세계에 팔려나간 장흥(長興) 청태전(靑苔田)은 염증(炎症)과 종양(腫瘍) 발생을 억제(抑制)하는 효과(效果)로 명성이 자자한 보물(寶物)이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 때 주조(鑄造)된 동전(銅錢)들을 보고 엽전(葉錢)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장흥(長興)이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된 급(級) 높은 고을이 된 연유였고 그나마 남아있는 조선의 다소(茶所) 중 삼분지 이가 넘는 다소(茶所)가 있는 조선 차(朝鮮茶)의 중심지(中心地)였던 연유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이러한 청태전(靑笞錢)이 신라(新羅) 시대에 장흥 보림사(寶林寺)에서 처음 재배(栽培)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32년 보림사(寶林寺) 법당(法堂)인 대적광전(大寂光殿) 앞 석등(石燈)이 사리장치(舍利藏置)를 가져가려던 도굴꾼들에 의해 쓰러졌다. 복원(復元) 작업 중 발견된 탑지(塔誌)엔 이 석등(石燈)이 당나귀 귀 왕으로 유명한 경문왕(景文王) 10년(870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궁예의 아버지인 헌안왕(憲安王)이 굶어 죽어가는 신라인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손자인 경문왕을 왕세자로 책봉한 후 신라왕으로서 행한 마지막 일은 장흥(長興)에 보림사(寶林寺)를 창건(創建) 한 것이었다. 헌안왕의 뜻을 받들어 그 자신도 목숨을 걸고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해 청태전(靑笞錢)이란 차(茶)를 만들어냈던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의 일생(一生)이 기록된 탑비(塔碑)가 지금도 보림사에는 온전히 서있다.
장흥 사람들은 장흥이란 고을 이름에 걸맞게 오래도록 흥해야 할 사람들이다. 특별히 그들을 칭찬하는 것은 그래서다. 고려(高麗)의 국시(國是)를 해상무역입국(海上貿易立國)으로 정하고 만부교(萬夫橋) 사건과 훈요십조(訓要十條)로 후세들의 각오(覺悟)를 분발(奮發)시키려 했던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노고(勞苦)는 그의 아들 광종(光宗)이 왕건(王建)이 키워 온 천태종단의 고승들, 제관(諦觀)과 의통(義通)을 중국 절강(浙江)의 오월국(吳越國)으로 망명(亡命)시킴으로써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고려는 또다시 선덕여왕과 태종 무열왕의 전철(前轍)을 데자뷔처럼 반복(反復)했던 거였다. 충선왕(忠宣王)과 공민왕(恭愍王), 조옹(櫟翁) 이제현(李齊賢)과 오은(五隱)들의 핏빛 가득한 차 산업(茶産業) 복원(復元)의 꿈이 결국 파멸(破滅)로 끝난 후 그들의 피로 건국(建國)한 조선(朝鮮)에서 편찬(編纂)된 지리지(地理志)에서 장흥(長興)의 다소(茶所)를 소개(紹介)하고 있었다. “조선 전역에서 차(茶)를 생산하는 다소(茶所)가 19개소가 있는데 그중 장흥 도호부(長興都護府)에만 13개소가 있다.”장흥(長興)은 삼한(三韓)의 차(茶) 중심지(中心地)였고 그랬기에 부침(浮沈)을 겪어야만 했다. 송제(松齊) 노숙동(盧叔同)등이 찬술(撰述)한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엔 기구(崎嶇)한 삼한(三韓)의 차역사(茶歷史)와 궤(軌)를 같이 하는 장흥(長興)의 역사(歷史)가 도드라져 있다.
“본래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오아현(烏兒縣)으로 고쳐서 보성군(寶城郡)에 붙였고 고려(高麗) 초에 정안현(定安縣)으로 고쳐서 영암군(靈巖郡)에 옮겨 붙였으며 인종(仁宗) 때 장흥부(長興府)로 승격(昇格)시켰고 원종(元宗) 6년(1265)에 회주목(懷州牧)으로 개칭했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다시 장흥부로 강등시켰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13년(1413)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昇格)시켰다.” 고려사(高麗史) 57 지리지(地理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