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선문이 생겨난 이유

by 역맥파인더

청태전(靑苔錢)으로 유명한 전남 장흥(長興) 가지산(迦智山)에 있던 가지산사(迦智山寺)를 보림사(寶林寺)로 개창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은 무쇠솥을 도입해 볶기라는 새로운 차(茶) 가공방법을 본격적으로 도입했고 이렇게 시작한 새로운 차(茶) 가공방법은 빠르게 신라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후일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불린 신라에서의 선종(禪宗)의 확립은 일본 차(茶)를 수입해 가공 수출해 온 신라 주요 내륙 무역로에 소재한 사찰(寺刹)과 사원(寺院)들에서의 차(茶) 가공방법이 증청(蒸靑:찌기)에서 전청(煎靑:볶기)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의 확장은 수천년 동안 인류의 생명을 지켜왔던 시루(甑)와 절구(臼)를 사용한 우리 민족 고유의 차(茶) 생산방식이었던 증차(蒸茶)가 사라지고 결국 무쇠솥으로 차(茶)를 볶아내는 전차(煎茶)만이 남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람들의 생명을 지킴으로써 모두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을 가능케 했던, 차(茶)를 만들고 나누던 일들은 이제 패권(覇權)을 차지하기 위한 죽고 죽이는 경쟁만이 판치는 살벌한 도박판이 되었다. 실크로드 상방(商幇)과 마린로드 상방(商幇)간의 경쟁은 결국 빗살무늬토기때부터 이루어져 온 증차(蒸茶)의 몰락을 가져왔다. 증차(蒸茶)를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했던 시루와 절구가 그리고 체(篩,籭)가 이제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결국 이사금(尼師今)이라는 신라 왕의 명칭이 이빨에 난 금이라는 뜻의 잇금에서 유래되었다는 엉터리 기록만 남긴 채 위대했던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제세이화(制世理化)한 수천년의 역사는 그렇게 증차인 청태전(靑苔錢)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구산선문 (1).jpg 구산선문의 위치 : 섬진강 낙동강 남한강 금강등 해상무역에 유리한 지역에 위치

해상무역으로 주로 유통되는 청태전(靑苔錢)과 초원로와 실크로드를 통해 주로 유통되는 청전차(靑塼茶)로 대표되는 증차(蒸茶) 제조 공정은 사실 최종완성품을 만들어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실현시켜 주는 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청전차(靑塼茶)에 비해 생산기간이 짧게 소요되는 청태전마저도 제대로 된 품질을 확인 후 출하하려면 최소 1년은 숙성시켜야 했다. 게다가 따는 순간부터 변질되는 찻잎의 약효를 보존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증청(蒸靑)이라는 살청법(殺靑法)은 여러가지 시설들과 대규모 전문 노동력이 요구되는 장치산업(裝置産業)이었다. 시루 안에 체(篩,籭)를 걸어 그 위에 찻잎들을 놓고 시루 밑에 놓인 물을 끓이는 찜통에 불을 때서 그 증기로 찻잎들을 살청(殺靑)하는 증청살청법(蒸靑殺靑法)은 따내는 순간부터 산화(酸化)가 시작되는 찻잎 고유의 속성과 곡우 전(穀雨 前)부터 단오 전(端午 前)까지 약 두 달 동안에 전 세계로 수출될 물량을 모두 생산해 내야 하는 시간 제약 때문에 자본과 노동의 집약적 운용이 강제될 수밖에 없는 공정이었다. 기후 변화로 더 이상 찻잎을 찾을 수 없는 바이칼 호수 서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살려낸 우리 민족 최고 최장의 세계사적 공헌이었던 증차(蒸茶)였지만 찻잎 약효와는 양립할 수 없는 고온(高溫)과 다습(多濕)을 이용하는 기술이었기에 이를 극복할 시설들과 전문가들이 많이 필요한 엄청난 규모의 자본집약적 생산방식을 요구하는 고비용(高費用) 공정이었다.

법주사전경 (1).jpg 법주사 전경 - 산속에 이토록 많은 건물들이 있어야 하는 이유

찻잎(茶葉)를 생산하고 가공해 상품으로 만드는 공장과 그 차(茶)들을 구매하려 방문한 세계 각지의 머천트(merchant)들을 위한 숙박시설까지 갖춘 대규모 산업단지들이 당나라 전역에서 일거에 파괴되어 신라에서 구산선문이 성립되게 만든 만행이 벌어진 건 845년 당나라 무종(武宗)때였다. 당시 무종(武宗)이 재위했던 짧은 6년동안 사용되어진 연호를 따서 회창폐불(會昌廢佛)이라 불린 법란(法亂)이었다. 기후변화로 쪼그라 들기만 하던 실크로드의 교역량을 유지하려는 필사적인 진상방(晉商幫)과 소그드(sogdian)상방(商幫)의 집요한 시도는 결국 후한(後漢) 명제(明帝) 시절 백마사(白馬寺)로부터 다시 시작된 월지(月氏)들의 팔백여년간의 투자를 파괴하는 재앙을 가져왔다. 발해와 신라, 일본까지 아우르며 황해와 남해를 동아시아의 지중해로 만들어 해상무역의 황금기를 열어 제쳤던 고구려 유민(遺民) 이정기(李正己)와 그의 후계자들을 절멸시키기 위한 실크로드 상방의 집요한 제거공작은 당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우이당쟁(牛李黨爭)의 원인이었고 결국 이길보의 아들 이덕유(李德裕)가 회창폐불(會昌廢佛)을 일으키게 한 원동력이었다. 회창폐불(會昌廢佛)이 진행된 시기는 845년 4월부터 8월까지 단 4개월이었지만 천태종단 산하의 마린 로드 상방과 관련된 모든 차(茶) 생산기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843년 폐불의 사전조치로 사도승(私度僧)과 소년승(少年僧)들을 절에서 쫒아내는 추방명령이 강제 집행되었다. 차(茶) 생산기술을 국가로부터 공인받아 생산한 차(茶)를 공납(貢納)함으로써 국가로부터 면세(免稅)와 면역(免役)을 받은 공도승(公度僧)들은 도첩(度牒)이라는 국가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도첩에서 첩(牒)자는 차잎(枼)을 마루(片: 版)에서 가공하는 걸 뜻하는 글자였고 따라서 도첩이라는 자격증 이름 자체가 국가기관이 인정한 일정 수준(度)에 도달한 전문 차(茶) 생산기술자라는 뜻이었다. 이런 자격증(度牒)을 가진 공도승들에게는 차(茶) 가공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보통 어릴 때부터 시작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을 동자승(童子僧)과 사도승(私度僧)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모두 추방해버린 거였다. 그리고 2년후 毀佛寺勒僧尼還俗制 라는 이름의 조서(詔書)로 4600개에 달하는 사원(사원)과 40,000개의 초제난야(招提蘭若:사찰)들을 폐쇄해 버렸다. 결국 그 사원과 사찰(寺刹)에서 활동하던 승(僧)이라 불린 도첩을 가진 남자 중과 니(尼)라 불린 도첩 가진 여자 중 합쳐 총 260,000명이 쫒겨나 환속(還俗)되었다. 환속되었다는 건 차(茶)를 공납(貢納)함으로써 누렸던 면역(免役)과 면세(免稅)의 특권이 사라졌다는 걸 의미했다. 게다가 폐쇄시킨 사원과 사찰이 역대로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했고 그 토지를 매개로 소유해 왔던 절노비 150,000명을 해방시켜 조세(租稅)와 부역(賦役)을 바치는 일반 백성으로 호적대장(戶籍大帳)에 등록시켰다. 이런 파괴가 강행된 이유는 차(茶) 생산 역사에 있어 고인돌 혁명과 시루 혁명을 뒤잇는 무쇠솥 혁명이 천태종단에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산사 전경 (1).jpg 김제 금산사 전경 - 산속에 이토록 믾은 비싼 건물들이 있는 이유

무쇠솥을 이용한 전차(煎茶)생산법을 개발한 이유로 하루아침에 생산설비와 유통시설에서 쫒겨난 천태종단 소속 당나라 차(茶)생산 기술자들이 신라로 건너온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맨 몸으로 건너온 그들을 신라 헌안왕(憲安王)은 격하게 반겼고 그들을 실크로드 상방으로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내어 허울만 남은 신라 차(茶)산업을 부흥시키겠다고 약속한 김응렴(金膺廉)에게 헌안왕은 왕위를 넘겨주었다. 김응렴은 헌안왕의 아버지인 김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헌안왕의 육촌형 희강왕(僖康王) 김제륭의 손자였다. 불구대천원수(不俱戴天怨讐)의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헌안왕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 애꾸가 되어 겨우 살아남은 헌안왕의 아들이 궁예였다. 거지꼴로 당나라에서 건너와 김헌창의 난으로 대부분 지리멸렬해진 신라의 사찰들을 넘겨받은 체징(體澄)을 비롯한 수많은 승려들이 채택한 차(茶) 생산방법은 신라에서 그동안 행해져 온 증차(蒸茶)제조법이 아닌 무쇠솥을 이용한 전차(煎茶) 제조법이었다. 실크로드 상방에게 생산한 모든 차(茶)를 전량 공급해 왔기에 차(茶)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게 된 김제 금산사와 달성의 동화사 그리고 보은의 법주사 같은 법상종단 소속 사찰들에게는 일부 전수되고 있던 무쇠솥을 사용한 전차(煎茶) 제조법이 신라 전역에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당나라에 있던 모든 차(茶) 생산 기반을 강탈당하고 아사 위기에 몰린 당나라 망명파들이 신라에서 든든한 생존 기반을 확보하는 길은 하루라도 빨리 전세계 상인들이 원하는 차(茶) 를 생산해 판매하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실크로드 상방이 모조리 장악한 당나라에서 생산되는 증차(蒸茶)를 압도하는 값싼 그러나 품질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그러면서 그들보다 더 빨리 공급되는 햇차(新茶)를 만들어 출시해야만 했다. 햇볕에 달궈진 고인돌 위에서 구워내던 아득한 옛날의 차(茶) 제조법이 무쇠솥으로 찻잎들을 볶아내는 전차(煎茶) 제조법으로 부활했다. 당나라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차(茶) 기술자들로 신라의 사찰들은 다시 진평왕과 선덕여왕 때의 전성기를 맞이할 채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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