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陸地)였던 곳에 해수(海水)가 밀려 들어와 부상국(扶桑國)과 바다로 갈라지게 된 후 대표적인 중국의 차(茶) 수입항으로 계속 군림해 온 청주(靑州:지금의 산동성)는 나침반(羅針盤)과 천문학(天文學), 조선술(造船術) 같은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에 힘입은 해양무역의 확충으로 국제무역 주도지(主導地)로서의 지위를 점점 상실해 갔는데 마지막 사망선고가 내려진 건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顗)가 576년 천태종단(天台宗團)을 조직한 후였다. 대운하 건설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사천(四川) 아안(雅安)에 있는 몽정산(蒙頂山)의 주산(主山)인 동북변(東北邊)의 천태산(天台山)과 절강(浙江) 태주(台州)의 천태산(天台山)을 호북(湖北) 신양(信陽)의 천태산(天台山)으로 서로 연결시키는 수로(水路)를 만든 건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顗)였다. 사천 천태산에서 인공재배된 차(茶)들을 청의강(青衣江 Qingyi River)과 민강(岷江 Min River)을 거쳐 장강(長江)에 올리고 연운항(蓮運港)으로 들어온 일본차(茶)를 회수(淮水)와 섭수(滠水 Sheshui river)를 거쳐 무한(武漢)에서 장강에 올림으로써 수로를 연결시킨 지의(智顗)는 그래서 수양제(隋煬帝)로부터 지혜(智慧)로운 사람이란 칭송이 담긴 지자대사(智者大師)란 호(號)를 받게 된다. 지의(智顗)가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로 불리는 이유였다. 산동(山東)을 통해 수입되던 일본차(茶)들은 섭수(滠水 Sheshui)를 통해 무한(武漢)에서 장강으로 옮겨 갈 수 있는 수로(水路)가 개발되자 하역(荷役)할 필요가 없는 연운항(連云港)으로 수입되었다. 강소(江蘇) 연운항으로 들어온 일본차(茶)를 실은 선박(船舶)들은 내륙수운용(內陸水運用) 배들에게 화물(貨物)들을 넘겨준 후 돌아갔고 일본 차(茶)를 실은 내륙수운용 배(船)들은 거미줄처럼 흐르는 자연 하천을 타고 회수(淮水)로 들어갔다. 이로써 중국 서쪽 끝 사천(四川)에 있는, 차(茶)를 인공(人工) 재배(栽培)하는 생산지(生産地)와 일본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차(茶)를 들여오는 수입지(輸入地)가 한꺼번에 연결되어 중국 최대의 차(茶)가공기지인 태주(台州) 천태현(天台縣)의 천태산(天台山)으로 공급되었다.
장강(長江)을 따라 운반되는 차(茶)들은 진강(鎭江)에서 남쪽에 있는 태호(太湖)로 옮겨졌고 태호(太湖)에서 다시 항주(杭州)로, 항주(杭州)에서 다시 소흥(紹興)으로 잘 발달되어 있는 수많은 물길들 중 최고의 물길들을 그때그때 선택해 운반(運搬)되었다. 소흥(紹興)에서 조아강(曹娥江 Caoe river)을 따라 천태산맥 ( 天台山脈 Xianxia Range)속 남쪽으로 승주(嵊州 Shenzhou) 까지 들어온 배들은 징담강(澄潭江 Chengtan river)을 거슬러 목적지인 천태현(天台縣) 국청사(國淸寺)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130개가 넘는 사찰(寺刹)들이 일사불란하게 차(茶)를 가공해 삼문현앞 바다로 내보내고 있었다.
대련반도(大連半島)부터 시작되는 길고 긴 중국 동해(東海) 연안선(沿岸線)중 만(灣 Bay)과 해협(海峽 Strait)은 많지만 차널(Channel: 차(茶)를 바다로 내보내는 통로)이라고 명명(命名)된 곳은 영파와 주산군도 사이 불도(佛渡)채널(Fodu Channel), 천태현(天台縣) 삼문현 앞바다에 있는 사번채널(蛇幡 Shefan channel)과 만산채널(滿山 Manshan), 그리고 복주(福州 Fu zhou) 와 천주(泉州 Quan zhou) 사이에 있는 포전시(莆田市 Putian) 앞바다와 남일도(南日) 사이에 있는 남일채널(Nanri Channel) 단 네 곳뿐인데 이유는 이곳에서 차(茶)들이 가공되어져 수출(輸出)되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와 아랍에서 온 선박들로 들끊는 이들 채널들이 몰려 있는 곳에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청부(請負)를 받은 황소(黃巢)가 이끄는 10만 반란군(叛亂軍)이 쳐들어 온 것이었다.
주도권(主導權)의 상실은 절대적 풍요에서 상대적 빈곤으로의 전락을 의미했고 수천년 동안 독보적인 지리적(地理的) 이점(利點)을 누려온 사람들에겐 박탈감을 안겨 주었다. 차(茶)를 거래하다 물건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소금(鹽)으로 거래품목을 바꾸어야만 했던 산동(山東) 조주(曹州 지금의 하택(荷澤) 출신 황소(黃巢)같은 사람들은 설상가상(雪上加霜), 기존 소금상인들의 철통같은 담합으로 소금을 거래할 수 있는 면허(免許)조차 받을 수도 없었다. 그들의 빈곤과 박탈감 그리고 만연(蔓延)한 당나라 관료(官僚)들의 부정부패는 결국 그들을 반란(反亂)으로 내몰았다. 실크로드 상방은 회창폐불(會昌廢佛)속에서도 살아남아 다시 활개를 치고 있는 마린로드(Marine Road) 상방(商幫)들을 궤멸(潰滅)시킬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황소(黃巢) 반란군에게 마린로드 상방의 근거지(根據地)들과 그들의 젖줄인 대식국(大食國:아랍)과 파사국(波斯國)에서 차(茶)를 구매하기 위해 온 상인들도 함께 없애 달라는 청부(請負)를 한 것이었다. 당시 절강(浙江)과 복건(福建), 광동(廣東)에는 무역 거래를 위해 몇 년씩 거주하는 외국 상인들이 많아 그들만의 거주지역이 따로 번방(蕃坊)이라 하여 설치되어 있었는데 광주(廣州) 같은 경우에는 차상인(茶商人)들의 가족들도 함께 거주(居住)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었다. 실크로드 상방이 유학자 출신의 왕선지(王仙之)를 제거하고 그가 이끌던 반란군(叛亂軍)을 자신들과 이미 청부계약(請負契約)을 맺은 황소(黃巢)에게 몰아주기 위해 자신들에게 이미 매수(買收)되어 있던 당나라 관리(官吏)들을 내세워 왕선지(王仙之)를 속이고 결국 그를 죽이는데 성공하자 황소(黃巢)는 즉각 움직였다.
황소(黃巢)는 얼마 되지 않는 자기 수하(手下) 반란군(叛亂軍)들을 데리고 왕선지가 죽으면 그가 이끌던 주력(主力) 반란군들을 인수(引受)해 지체없이 장강(長江)을 도하(渡河)하기 위해 장강(長江)과 제일 가까운 호수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곳은 황소(黃巢)가 기다리고 있던 호수(湖水)라 해서 그 후 소호(巢湖)라고 불리게 되었다. 실크로드 상방(商幇)의 계략(計略)으로 결국 왕선지가 잡혀 죽자 갈 곳 없어진 반란군들은 황소 휘하로 들어가 그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십만 대군이 모이자 황소(黃巢)는 드디어 장강을 도하(渡河)해 안휘(安徽), 선주(宣州 Xinzhou)를 거쳐 절강(浙江) 항주(杭州)에 진입했다. 항주에서 청부(請負)받은 대로 대식국(大食國 압바스 칼리프)과 파사국(波斯國 페르시아)의 차상인(茶商人)들을 제거한 후 반란군은 소흥(紹興)을 거쳐 천태산맥(天台山脈 Xianxia Range)으로 향했다. 마린로드 상방의 핵심 차(茶)생산기지가 천태산(天台山)에 자리잡은 것은 백제(百濟)에 고이왕(古爾王)이 즉위하고 간다라의 쿠샨제국에서 바슈데바 1세가 사망한 다음이었다. 238년부터 251년 사이에 대규모로 건설된 천태산(天台山) 차(茶) 생산기지(生産基地)는 중심이 되는 천태현(天台縣)이 천미터가 넘는 산들로 삼면(三面)이 둘러싸여 있고 오직 동쪽만이 만산(滿山)해협(海峽 Channel)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천혜(天惠)의 요새(要塞)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산군도(舟山群島)와 전남 영광(靈光) 법성포(法聖浦) 그리고 야마토(Yamato)를 잇는 마린로드(Marine Road) 상방(商幫)의 차공급해상무역로(茶供給海上貿易路)가 확립(確立)되었다. 황소반란군(黃巢叛亂軍)이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청부(請負)를 받아 파괴(破壞)하러 가는 곳이 바로 마린 로드 상방(商幫)의 원천(源泉)이었던 절강(浙江) 태주(台州)의 천태산(天台山 Xianxia), 바로 그곳이었다.
천태산(天台山 Tiantai Mountain)에 있는 국청사(國淸寺)를 위시해 천태산맥(Xianxia Range)에 있는 130개가 넘는 천태종단(天台宗團 Tiantai Order)의 차(茶) 생산단지를 쓸어버린 황소반란군이 바다로만 뚫린 그곳을 벗어나 청부(請負)받은 복주(福州)와 광주(廣州)를 청소(淸掃)하러 진격하기 위해서는 산에 길을 내야만 했다. 자신들을 학살(虐殺)하는 10만이 넘는 반란군에게 배(船)를 내 줄 해상(海上) 세력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700리에 걸친 산길을 새로 내야했다. 이렇게 길을 만들며 도착한 복주(福州 Fuzhou)와 광주(廣州 Guangzhou)에서 20만이 넘는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이 학살(虐殺)되었다. 소수의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장년(壯年)의 남자들만이 탈출할 수 있었다. 이 학살 소식은 곧 압바스(Abbasid) 칼리프국에 전해졌고 압바스 칼리프(Caliphate)는 머천트들에게 신라에서 차(茶)를 수입(輸入)할 것을 명령했다. 학살을 피해 도망 온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을 뒤이어 아랍과 페르시아에서 차상인(茶商人)들이 대거 신라로 입국했다. 이들에게 수출할 차(茶)의 원료인 찻잎을 공급해 줄 일본의 사신(使臣)은 878년 8월 벌써 신라에 입국해 있었다. 소흥(紹興)과 명주(明州 지금의 寧波)로 수출(輸出)해 천태산(天台山)으로 보내져야 할 어마어마한 찻잎이 일본 항구마다 쌓여 썩고 있었다. 헌강왕(憲康王) 4년(878년) 8월에 일본국에서 사신(使臣)이 와 조원전(朝元殿)에서 인견(引見)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헌강왕 본기(本紀) 기사(紀事)는 일본이 황소(黃巢)의 난으로 얼마나 다급해 하고 있었는지를 증명하고 있는 기록이었다.
황소(黃巢) 반란군이 휩쓸고 간 천태현(天台縣)에 실크로드 상방(商幫)과 한 몸이 되어 있는 법상종단(法相宗團)의 자은사(慈恩寺)가 강 건너로 국청사(國淸寺)가 보이는 언덕에 들어앉은 건 천태산(天台山 Xianxia Mountain)의 차산업(茶産業) 지배권이 누구 손에 들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